수학 8점 받은 친구 대학 보내놨더니 다단계에 빠진 이야기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명목 하에 고3은 밤 열 시까지 학교에 있어야 하던 시절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특별반이란 이름으로 자습실을 따로 받았다. 학교의 명운을 걸 정도는 아니었던 친구들은 교실에 있었다. 교실에 남은 아이들도 고3이니만큼 열심히 자율 학습을 했을 것 같지만 그렇진 않았고, 실제로는 가위바위보로 스타크래프트를 하거나, 영어공책 눈금에다 오목을 두거나, 전자사전으로 오셀로를 하거나, 묵향이니 비뢰도니 드래곤라자니 하는 무협,판타지를 돌려보고는 했다. 나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을 위한 안내서'라는, 1236페이지짜리 양장본 책을 읽다가 지금 이런 거 읽을 때냐면서 국사 선생님에게 그 책으로 뒤통수를 얻어맞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야말로 그런 책들을 읽을 때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녀석이 공부를 하겠다고 갑자기 찾아온 건 수능 100일 전이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했다. 말이야 맞는 말인데... 하면서도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특별반에 가지 않는 녀석들 중에서는, 그래도 내가 가장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녀석은 수학 8점 영어 23점이 나온 모의고사 성적표를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봐봐. 8점이 8등급이라는건 아무것도 모르고 찍어도 4%는 깔아준다는 거야. 그렇다면 공부를 좀만 하면 훨씬 잘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니가 좀 도와줘라."
"그래서 어딜 가고 싶다고?"
"K대."
"...일단 도와는 줄게. 성적은 못 올리는데, 점수는 올려줄 수 있다. K대는 나도 못 가지만."
"내가 빽이 든든해서 괜찮아."
"무슨 빽이 있는데."
"하느님."
"... 그거 참, 대단한 빽이네."
"내가 구하면 하느님이 돕는다. 그렇게 되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패기 하나는 넘치는 녀석였다. 난 그 녀석의 빽을 믿기로 하고, '경우의 수'와 '확률과 통계'에 걸었다.
"영어는 무조건 양치기. EBS 문제만 들입다 풀어. 1000 문제 3일 안에 풀면 90점 나온다. 여기 나오는 답을, 그냥 싹 다 외워. 그냥 암기과목이라 생각하고."
"2점짜리 다 맞추고, 4점짜리 그려서 풀 수 있는 거 다 그려. 찍는 것보단 이렇게라도 해서 4점 더 먹는게 나아. 그리고 푼 거 다 제외하고 가장 적은 번호로 하나로 밀어. 어차피 확률은 20퍼센트니까. 그리고 단답형. 영역마다 잘 나오는 답이 있어. 아니 –1, 0, 1이 아니지. 수능 단답형은 1부터 999까지 있다고. 예를 들면 수열 파트다. 55, 385, 440 이런 숫자들. 찍는 것도 근거가 있어야 되는거야.”
어떻게 보면 택도 없는 방법이었지만, 꽤 열심히 했던 그 녀석의 빽이 통했는지 어쨌는지, 놈은 수능 당일 공부한 것에 더해 수학 단답형 4개를 찍어서 맞추고, 수학 4등급 영어 3등급을 만들어냈다. 100일 전보다 평균 50점이 오른 쾌거였다. 담임선생님은 상담 때 당황하며 혹시 컨닝을 했는지 물었고, 수능 평균 3.5등급을 찍는 놈이 왜 내신은 야구부보다 낮아서 320명 중에 316등을 했냐고 질책했다. 적당히 원서를 쓰고, 나름 지방 사립 중엔 상위권 대학의 국문과에, 마지막 차수로 추가합격했다.
다음 해 여름방학,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반수할거다.”
“갑자기?”
“전공이 아무래도 안 맞아. 공부 다시해야겠어.”
“어디 갈 건데?”
“K대. 이번에도 좀 도와줄 수 있나?”
“지금 너 대학 다니는 것만도 기적이야 임마. 내가 했던 방식대로 또 하면 옛날 점수 나와. 할 거면 학원 다녀. 제대로.”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해볼게.”
그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면, 그냥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았을 텐데.
전공은, 나에게도 잘 맞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학교를 다니고, 군대를 다녀왔더니 3년이 지나 있었다. 전역을 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녀석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잘 지내나? 밥 한 번 먹자.”
그러고 보니, 그 이후 밥 한 번 얻어먹은 적 없었다. 녀석은 번화가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아울렛에서 약속을 잡았다. 옷도 사 줄 생각인가, 싶었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매장 7층 영화관 앞 커피숍에서 만났다. 녀석은 정장을 빼 입고 와 있었다.
“학교 잘 다니고 있어? 전에 힘들다며.”
“학고 받고 그냥 제적 당했다.”
“그래 반수 해서 뭐 K대 간다더니.”
“야 7.5등급 나오더라.”
“내가 학원 다니랬잖아 임마.”
“아니 난 될 줄 알았지.”
“군대는?”
“지금 공익 하고 있는데, 우울증 판정 받아서 한 3년째 계속 하는 중.”
그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밥을 먹으러 가게 되었을 때, 그 놈이 내게 물었다.
“샌드위치 좋아하나?”
“...싫지는 않지?”
그 놈은 나를, 세븐일레븐으로 데려갔다.
삼각김밥 파는 그 편의점 세븐일레븐. 정장에 시계 좋은 거 차고는 편의점에서, 그것도 2천원짜리 계란 샌드위치를 집어주는 녀석에게 속으로 ‘적어도 밥이기는 하라고’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만, 뭐라도 챙겨주는 게 어딘가 싶어서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녀석이 물었다.
“혹시...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아나?”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대로 대답했다.
“다단계잖아.”
그리고 녀석의 설득이 시작되었다.
“아니 이건 절대 그런 게 아니고, 마케팅의 한 형태인건데, 실제로 대기업들도 다들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고...”
기나긴 장광설이 이어졌고, 마침 전역하고 시간도 남아있었고, 살면서 한 번쯤 어떤 곳인지 봐 두고는 싶었다는 생각에 녀석을 따라갔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테이블에 앉아 한창 수익구조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했다. 제품을 구매할 사람을 데려오면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했는데, 인센티브가 흑자가 되는 구간까진 81명 정도가 필요할 시스템이었다.
“너 요새, 교회 다니냐?”
“끊은 지 좀 됐지.”
“학교도 안 다니고?”
“어. 제적이니까.”
“군대는... 공익 계속 기간만 연장?”
“그랬지.”
‘나도 그렇지만 너도 친구 없을 것 같은데 어디서 사람을 땡겨오냐.’
이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진 못하고, 그 곳의 다이아등급인지 하는 사람이 와서 통장 사본을 보면서도 괜히 기업의 사회적 가치 등등을 꼬투리 삼아서 부정적인 뜻을 나타내자, 업체 쪽에서 나는 이 곳과 맞지 않는 것 같다며 나를 쫓아내다시피 내보냈다.
아닌 척 하고 있지만 진이 빠진 채 돌아오는 길, 운이 좋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때는 그저 대학을 가면 모든 게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운에 맡겨서라도 이름값 더 높은 대학 가는 게 답인 줄 알았는데, 어른들은 다 그렇게 얘기했는데. 생각보다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고,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과 잘 한다는 것이 의미를 갖게 되는 건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 후로 10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도 그 친구가 던진 숙제를 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