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인 나는 학생들로부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감탄하게 만드는 말부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놀라게 만드는 기상천외한 말들을 많이 들을 수 있다.
다양한 학생들의 다양한 모습을 매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교사만의 특권임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특권에도 따르는 책임이 있다.
학생들의 말로부터 내 마음이 아픈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말이다.
교사이기 이전에, 학생이기 이전에 우리 모두는 사람이라서
무심코 던진 말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말로서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교사도, 학생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상처를 요령을 교사가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뿐이다.
또 상처를 주는 방법을 교사가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래서 교사로서 나도 모르는 사이 학생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말을 하지는 않았나 끊임없이 돌아보게 된다.
요즘 학생들은 너무나도 빠르게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참아보려고 하다가도 시도해보려고 하지도 않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나도 기운이 다 빠져버린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준비해 왔는데...하는 아쉬움이다.
나는 학생들의 '할 수 없음'에 대한 선언이 '의지의 부족'이라는 문제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는 조금 어려운 활동이어도 줄곧 따라오려고 노력하던 학생이
안절부절 못 하는 표정으로 '전 못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수없이 자주 들어왔던 '할 수 없음'에 대한 선언이었지만, 그 학생의 말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에 대한 자책과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잘 해 왔잖아?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어.'라고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너무 힘들었어요.'
'할 수 없음'에 대한 선언을 '의지의 부족'으로 단순하게 치환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최선을 다 해 보려고 하는 학생에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들었다는 미안함이 너무 무거웠다.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것에는 소홀했으면서
결과만을 가지고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음'에 대해 인정하기까지 너는 얼마나 울었고 얼마나 아팠을까.
아픔에 무뎌지기 위해 너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고 얼마나 떨었을까.
학교는 잘 하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못 하라고 있는 곳이며, 못 하는거 연습하라고 있는 곳이다.
조금은 당당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달님 심심하지 않게 해님이 밤하늘에 쏟아부은 별만큼이나
무수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 만큼의 가능성을 가질만한 자격이 충분한 너에게 전한다.
너는 참 큰 사람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