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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Sep 11. 2024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가을빛이 투명한 어느 날, 마로니에 공원에는 백일장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백일장에 나는 홀린 듯 지원하여 이곳에 왔다. 즉석에서 글감을 받고 주어진 시간 안에 글을 완성하면, 당일날 결과가 나온다.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백일장 참가에 대비하여 글감 연습을 하거나, 시간 안에 쓰는 연습한 것도 아니다. 그럼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여기에 왔나? 생각해보면, 자신감이 있어서 글을 쓴 적은 없다. 나를 쓰게 하는 것은 한 편의 완성된 글이 가져다주는 자부심이었다. 나는 오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의심하며 공원 한가운데를 비추는 햇빛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웅성웅성 참가자들이 모이자 주최자의 인사말이 시작되고 공통 글제가 공개되었다. 


'약속, 일기장, 가방, 어제' 


매일 익숙하게 쓰는 단어인데, 글로 풀어내려니 낯설게만 보였다.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어느 순간 멀게 느껴지는 것처럼, 친숙하게 여긴 단어도 갑자기 멀어질 수도 있구나. 친한 사람 사이에는 많은 추억이 있어서 단 하나의 이야기만을 고르기 어렵듯, 익숙한 단어와의 사이도 비슷한지도 모른다. 어지러운 방 안에서 물건을 찾듯, 나는 단 하나의 물건을 재빠르게 찾아야 했다. 내가 찾은 것은 ‘가방’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가방에 대해 적어 내려갔다. 아버지가 만드는 등산용 배낭에 대해서. 30년 전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베트남 호치민으로 건너가 한국 서울을 오가며 일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유럽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주문받은 배낭이 베트남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베트남 사람들의 부지런함과 야무진 솜씨로 만들어진 배낭이 아버지의 자부심이자 밥벌이였다. 베트남에서 그을린 피부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수많은 배낭을 살펴보았을 아버지의 두터운 손도 여전하다. 아버지의 가방은 내 안에 깊숙하게 차지하고 있는 이야기. 나를 구성하고 지금의 나를 만든 이야기다.

 

Donde voy, Donde voy (돈데 보이 돈데 보이)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 건가요?

Esperanza es mi destinacion (에스페란사 에스 미 데스티나시온)

희망을 찾는 것이 내 바램이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면, 멕시코 여가수의 구슬픈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옛 기억이 자동으로 흘러나오는지도 모른다. 규모 있는 무역상사에 다니던 젊은 시절, 아버지는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남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몇 달 간 지냈다. 수출 활로를 뚫기 위한 영업을 위해서였다. 태양이 내리쬐는 땅에서 아버지의 임무는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만큼이나 막막하지 않았을가. 하지만 극적으로 성사된 바이어들과의 만남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달콤했을 것만 같다. 그때 맛본 달콤함이 아버지를 30년 동안 배낭을 메고 다닐 운명으로 이끌지 아무도 몰랐으리라.


몸 바쳐 일하던 회사가 부도가 났다. 정권의 압력으로 기업이 공중 분해되었다. 갓 결혼한 아버지에게는 먹여 살릴 아내와 딸이 있었다. 무역부서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회사를 차렸다. 나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자주 부재했다. 무역업의 특성상 출장이 많았고 어린 나는 아버지가 출장에 무엇 때문에 가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내가 직접 만나고 볼 수 있는 건 아버지의 손에 들린 선물이었다.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당시 흔하게 볼 수 없었던 유럽제 색연필과 초콜릿은 아버지의 공백을 채워주고도 남았다. 나는 아버지가 정확히 어디로 가서 무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방안에 차곡차곡 유럽제 문구류가 쌓이는 한 아버지의 부재는 오히려 반가웠고 기다려졌다. 선물은 나에게 상상을 자극하는 유럽을 향해 열린 창이었다. 나는 출장에서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렸는지, 아니면 아버지 손에 들린 선물을 기다렸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후자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가방은 우리 가족의 생활을 지탱해주었다. 가방은 아버지에게 생활을 보장해주는 수단이었으며 삶을 꾸려가는 기반이었다. 시간의 물결에 따라 가방 무역업이 흘러갔다. 거센 파도도 있고 거친 바람도 있었지만 시간의 물결은 아버지의 사업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집 바깥에서 불던 바람은 알지 못 하지만 집 안에서 불었던 바람 중 하나는 딸로 인한 것이었다.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면 나머지도 자연히 따라오리라 믿었다. 딸은 학창 시절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고 대체로 아버지의 바람대로 나아갔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벌어진 실패는 아버지의 옛 실패를 떠올리게 했다. 공부만이 아버지의 생활을 구제할 수 있던 시절, 대학 간판이 모든 것을 결정하리라 믿었던 시절, 아버지는 기대했던 1차 대학이 아닌 2차 대학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자신이 이루지 못 한 마음의 응어리를 딸이 이루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딸 역시 대학 입시 실패 후, 자신과 동일한 길을 걷게 되자 견딜 수 없었고 딸과 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물리적 공백이 있었다면 대학 진학 즈음 아버지와 심리적 공백이 있었던 셈이다.


이듬해 딸은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아버지가 만든 가방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출장을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버지가 만드는 가방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대학시절 여대생에게 필요한 건 맵시 좋은 가방이었지 등산용 가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게에서 가방을 고르는 딸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아빠가 가방 만드는 일을 하는데 어째 넌 맨날 가방 타령을 하냐? 가방이 대체 몇 개인데”.


“아빠가 만드는 가방은 내가 멜 만한 가방이 아니잖아요”.


대학생 딸은 아버지가 가방으로 번 돈으로 가방을 샀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베트남에 새 공장이 문을 열었다. 공장 개관식에 참석 하기 위해 딸은 베트남 호치민으로 갔다. 비로소 아버지의 가방을 자세히 대면하는 기회가 되었고 베트남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 만들어지는 배낭을 보았다. 딸은 크고 투박한 가방을 메어보며 비로소 아버지의 인생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베트남에 있는 공장 사무실 한쪽 벽에는 성경 말씀 구절을 적은 액자가 걸려있다.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들라’


성경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은 30년 배낭 외길인생에서 만난 말씀이었다. 배낭 제작이 밥벌이에서 소명이 된 순간이 아니었을까.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으로 시작한 배낭 무역업이 아버지의 인생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 순간이 박제되어 액자로 걸려있다. 


‘낡아지지 않는 배낭’은 영원히 끊이지 않는 물질적 공급이다. 그러한 배낭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팔아 구제해서 마련’해야 한다고 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무엇을 팔아 마련해야 할까? 아홉 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던 아버지가, 외아들로 네 명의 여동생을 건사하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아버지는 무엇을 팔아 마련해야 했을까? 단 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아야 했던 삶에서 길러진 인내와 끈기였을까? 겉으로 보기에 빈손인 아버지는 무형의 무언가를 팔며 ‘낡아지지 않는 가방’을 만들었을까? 


아버지가 낡아지지 않는 가방을 만들기 위해 팔았던 무형의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노력이었는지, 어머니의 내조였는지, 운이었는지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는지 아니면 그 전부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아버지의 가방은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았다는 것. 내가 아버지의 삶을 기억하는 한 아버지의 가방은 영원히 낡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낡아지지 않는 가방’을 메고 오늘도 걸어가 신다. 


*


원고지를 채워갈수록 글씨는 엉망이 되어갔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글씨가 번졌다. 심호흡을 했다. 마침표를 찍었다. 원고지를 제출하고 마로니에 공원을 빠져나왔다. 홀가분하면서도 아직 토해내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 안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 걸까. 고개를 흔들었다. 남아 있는 것을 떨쳐버리겠다는 듯이.  


오후 늦게, 문자가 왔다. 입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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