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되어 봤자 얼마나 잘못되겠는가

by 김성민


편지를 읽다가 마지막에 올려주신 그림을 보고 순간 헉. 놀랐어요. 그림 속 나신으로 책 읽는 여인의 모습이 도발적으로 느껴졌거든요. 침대에 누워 요염한 포즈를 취하는 여인보다 더 자극적입니다. 헤븐님은 발가벗고 책을 읽어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종종 발가벗고 책을 읽는답니다. 반신욕 할 때 욕조에 책을 갖고 들어가거든요. 그러다가 책이 홀딱 젖는 낭패를 보기도 하지만요. 그럼에도 반신욕 독서를 멈출 수가 없어요. 뜨거운 물에 모공이 활짝 열리듯 저의 꽉 막혔던 뇌세포들이 열리는 것 같아 책을 읽는 시간이 더 즐겁게 느껴져서요. 그림처럼 자극적인 모습은 아니겠지만 거침없이 움직이는 생각들 덕분에 고민하던 일의 실마리를 얻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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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모습은 속옷이 보이기 쉬운 핫팬츠와 헐렁한 반팔 티셔츠를 입은 헤븐님 일지도요? 언급하신 노래들을 찾아봤거든요. life is wet. 제목에서부터 감지되는 축축함이 편지 전반에서 느껴진다고 하면 제가 과장하는 걸까요. (^^) 성적 모험담을 담은 에리카 종의 『비행 공포』나 여성의 사랑과 성욕을 다룬 웬즈데이 마틴의 『나는 침대 위에서 이따금 우울해진다』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지만 저는 조금 건조해져 볼게요. 편지에 쓰신,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아무 데나 간다, 그리하여 ‘천국 말고 아무 데나’라는 제목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요. 천국은 헤븐님의 닉네임이죠. 블로그 이름도 ‘천국의 시간, 책 이야기’ 이고요?



어떤 질문은 타이밍을 놓치면 하기가 어려운데 그러한 질문이 헤븐님의 닉네임에 관한 것이었어요. 종종 궁금했거든요. 천국은 헤븐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제 ‘헤븐’은 저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어 ‘헤븐’ 하면 ‘천국’ 보다 헤븐님이 먼저 떠오른답니다. 그런데 헤븐님은 천국 말고 아무 데나 가고 싶다고 하셨으니, 그곳은 천국보다 더 좋을까요? 혹시 그곳에 가게 되신다면 저에게 꼭 알려주세요. 천국 대신 갈 만큼 멋진 곳인지 궁금하거든요.



천국, 유토피아, 낙원은 모두가 가고 싶은 곳을 상징하는 이름이죠. 지상 낙원을 꿈꾸고 천국에 가기를 소망하니까요. 얼마 전에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었어요. 잘 알려져 있듯 나환자들의 집단거주지 소록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고요. 원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소설이 시작해요. 군인이자 의사인 조백헌 원장은 소록도에 활기를 불어넣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새로운 사업을 발표해요. 한마디로 소록도 천국 만들기 프로젝트. 1970년대 발표된 소설은 당시 활발히 진행되던 토지 간척사업을 반영하고 있어요. 오마도 간척사업 과정을 그리고 있거든요. 3부로 구성된 소설은 간척사업을 이끄는 조백헌 원장과 그를 경계하는 이상욱 보건과장 그리고 나환자 원생들 사이의 여러 갈등과 반목을 보여주고 있어요. 제가 이 소설을 꺼낸 건 짐작하셨듯이 ‘천국’ 때문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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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백헌 원장은 나환자들이 오순도순 서로 도우며 오래오래 함께 살 수 있는 간척 농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예요. 나환자들은 병이 다 나아도 섬을 벗어나 일반 사회로 돌아가기가 어려웠어요. 문둥병이 고칠 수 없는 몹쓸 병으로 여겨지고 한번 문둥이는 영원한 문둥이처럼 낙인이 찍혔으니까요. 지금은 한센병, 한센인이라고 순화해서 말하고 나을 수 있는 병이지만 당시만 해도 가족들도 버릴 만큼 격리가 심했다고 해요. 그러니 그들의 몸에 벚꽃처럼 피는 분홍빛이 얼마나 저주스러웠을까요. 병에 걸렸다는 것 자체가 씻을 수 없는 상처이자 차별, 심지어 계급이기도 했어요.



조백헌 원장이 소록도를 지상 낙원, 천국 만들기 프로젝트를 제시했을 때, 원생들의 대표인 장로들과 이상욱은 절벽 같은 침묵으로 답했어요. 30년 전 소록도 원장으로 부임했던 일본인 주정수 원장은 조백헌 원장과 마찬가지로 소록도 낙원 만들기 프로젝트를 실시했고 그의 계획에 감동한 원생들은 노예처럼 혹독하게 일했어요. 그들이 가혹한 채찍 아래서 참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누리게 될 공원과 복지 때문이었죠. 계획대로 소록도 한가운데 공원이 만들어지지만, 그 공원은 어느새 주원장의 업적을 기리는 하나의 작품이 되어요. 그리고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동상을 세우고 ‘보은 감사의 날’을 지정해 원생들은 한 달에 한 번 원장의 치적을 기리며 동상 앞에서 송가를 부르며 그를 찬양하는 것이죠. 원생들은 ‘우리들의 천국’이 오리라 믿었지만 ‘당신들의 천국’이었고 동상은 원장의 배반을 상징하는 뼈아픈 증거물이 되지요. 배반은 불신을 낳고 불신은 그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요. 새로 부임한 원장이 이전 원장들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 대신 불신을 택함으로써 자신들을 배반으로부터 보호한다고 할까요.



하지만 조원장은 수많은 우여곡절에도 오마도 간척사업을 이끌고 짧은 순간이나마 솟아오른 땅을 걸어가면서 마치 홍해를 가른 모세의 모습을 연출하지요. 그 장면은 아무리 돌을 쌓아도 응답 없는 막막한 바다가 보여준 짧은 기적이자 영광이었어요. 왜냐하면 솟아 오른 땅은 태풍이 오면서 금방 다시 가라앉거든요. 절대적인 자연의 힘과 싸우는 눈물겨운 고투는 정부가 간척사업을 빼앗으려고 하면서 다시 위기를 겪어요. 위기는 어찌나 쉬지도 않고 찾아오는지. 원생들은 어느새 조원장을 신뢰하고 있었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인물로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었죠. 사방에서 압박을 받는 조원장에게 힘을 실어 주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시종일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조원장을 감시하는 인물이 있어요. 보건과장 이상욱은 마지막까지 조원장의 진심을 믿지 않는 인물이지요. 왜냐하면 조원장이 아무리 애쓴다고 하여도 그가 이룩할 낙원은 결국 ‘당신들의 천국’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유였어요. 소록도 내에서만 오순도순 사는 삶은 보이지 않는 천국의 울타리일 것이라고요. 다시 말하면 이상욱이 볼 때 진정한 천국은 탈출할 자유와 심지어 죽을 자유가 있는 천국이에요. 헤븐님의 말을 빌리면 ‘천국 말고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곳이지요.



그렇더라도 섬을 탈출할 자유를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일 일거예요. 용기가 필요할 테니까요. 섬을 탈출할 용기, 어디든 갈 수 있는 용기, ‘내면의 또 다른 새로운 자신을 외면하지 않을 용기’. 어쩌면 헤븐님에게 ‘천국 말고 아무 데나’는 해방의 공간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내면의 욕망과 욕구를 분출할, 바다를 닮은 공간 말이죠. 만약 그렇다면, 저의 ‘아무 데나’는 내면의 깊은 심연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어렴풋이 보이지만, 애써 보려 하지 않았던 그 무엇이 있는 곳이요. 막상 마주하면 생각보다 시시할지도 몰라요. 그러나 작정하고 저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 보는 모험을 감행한다면 무언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girl writing.jpg Young Girl Writing a Letter (Jonathan Janson, 2008)



편지가 심연으로 내려가는 ‘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편지를 실에 단단히 묶어서 내려가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려가는 대신 올라갈 수도 있을까요? 편지를 실에 묶어서 띄운다면 말이죠. 이러한 발상은 『연과 실』에서 읽었는데요. 20년 넘게 문예 창작을 가르치는 소설가가 말하는 소설 작법과 글쓰기 전반에 관한 책이에요. 어떻게 글쓰기가 삶의 방편이 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죠. 실용적인 조언이 담긴 내용과 달리 제목은 사뭇 비유적이에요. ‘당신의 연에 길고 튼튼한 실을 묶으라’는 말은 당신의 글에 튼튼한 실을 묶고 하늘을 향해 날려 보라는 것이지요. 연이 날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바람의 일. 바람에게 맡겨 보자고 말해요. ‘천국 말고 아무 데나’에 가는 방법이 될지도 몰라요. 그전에 단단히 묶기, 단단하게 쓰기가 선행되어야겠고요. 어떻게 써야 단단한 쓰기가 될까요? 제가 찾은 답은 이것이에요.



‘글을 쓸 때 거의 모든 면에서 그렇듯이, 우리 모두 더욱 용감해져야 한다. 잘못되어 봤자 얼마나 잘못되겠는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날에,

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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