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거의 한 달 만에 쓰는 것 같아요. 이렇게 뒤늦은 답장을 받아주시는 헤븐님, 기다려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라고 시작해야 하지만 편지 대신 다른 글을 통해서 헤븐님의 근황과 생각을 글로 만났으니까 안부 대신 이렇게 편지를 열고 싶어요. 지금 해방될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계신가요? 너무 갑작스러운 인사인지도 모르겠네요. 지난 편지에서 전해주신 ‘해방될 자유, 사랑할 용기’가 궁금했거든요. 자유, 사랑, 용기는 참 커다란 말이에요. 그래서 저마다 다른 정의를 갖고 있어 오해를 부르지만 그렇게 수많은 정의를 품을 수 있는 단어의 넉넉함이 좋기도 해요.
저는 시간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무려 시간을 초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죠. 지금 SF에서나 가능할법한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 수전 손택이 책을 읽는 시간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라고 말했으니까, 우주선을 타고 시간을 초월하여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잠시나마 시간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습게도 저는 시간에서 해방되길 원하지만 동시에 흩어지는 시간을 모으고 싶어요. 참 저란 인간은 모순적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읽으면서 공감했던 이유는 일상과 의식의 두 층위를 보여주어서였어요. 평온해 보이는 일상 밑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의식과 감정이 흐르고 있다는 걸 읽었어요. 왜 이리 많은 ‘나’가 있어서 복잡하고 피곤하지?라고 생각했던 저에게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말해주어서 반갑고도 위안이 되었지요. 사실 제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 글자화 한다면 엄청나게 정신없는 글이 될 거예요. 그런데 울프는 그런 복잡한 의식의 흐름을 쓰는데 도전했고 성공했어요. 물론 정교하게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복잡함이겠지만요.
요즘 제 머릿속에 있는 의식 한 가닥을 꺼내볼게요. 저에겐 풀리지 않는 몇 가지 미스터리가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머리끈에 관한 것이에요. 분명 손목에 머리끈이 있었는데 머리를 묶으려면 없지 뭐여요. 쓰고 보니 이상한 말이지만,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짝이 없어지는 양말처럼 여러 개 묶음이었던 머리끈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결국 없어지고 말아요. 발이 달려 도망갔거나, 누가 가져갔거나. 아니면 어떤 미스터리 한 이유로 머리끈이 자꾸만 증발하는 것이죠. 하아... 머리끈이란!
머리끈이 없어서 며칠째 집게핀으로 대신했어요. 오랫동안 쓰지 않던 집게핀을 꺼내 기존에 달려있던 치렁치렁한 장식을 모두 떼어버리고 집게핀으로 머리를 고정했지요. 가능한 집에서만 쓰고 외출할 때는 쓰고 싶지는 않은, 그런 외양을 지닌 집게핀에요. 아무튼 저는 이 집게핀으로 며칠을 버티다가 결국 머리끈을 샀어요.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머리끈이지만 돈의 문제라기보다 머리끈이 자꾸만 없어지는 이 미스터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언젠가 우연히 머리끈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우연히 없어졌듯 우연히 나타나기를 말이에요.
사실 이것은 미스터리가 아니라 전적인 저의 부주의와 게으름인 거죠.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려서 잃어버려요. 그렇게 저는 무수한 머리끈들과 인사도 없이 헤어졌어요. 잃어버린 머리끈을 잊어버리고 새 머리끈을 사는 패턴이 반복되어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과연 잊어버려서 잃어버리는 것이 머리끈뿐일까? 아니면 잃어버려서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오랜 친구에게서 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받았어요. 제가 상처 받고 서운했을 모습이 떠올라서 연락한다고 했어요. 몇 달 전 친구와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었고 그렇게 잠시 연락하지 않고 지냈거든요. 침묵을 깨고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와 ‘상처’라고 이름 붙인 일에 대해서는 서로 말하지 않고 그동안의 안부와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어요. 마치 밟으면 터지는 지뢰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요.
처음에는 친구와 보낸 20여 년의 시간이 하나의 사건으로 큰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사건의 발단이 된 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친구가 떠난다고 연락을 한 것이죠. 외국으로.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도 함께요.
적당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사라지는 머리끈처럼 어떤 인연은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시간의 힘은 한편으로는 단단하기도 해서 그동안 같이 보낸 시간이 있으니 다시 아무렇지 않게 연락하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적당한 때가 되면요. 적당한 때... 그것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우연히 나타나는 머리끈처럼 그렇게 기별 없이 다시 시작하지 않을까요. 모르겠어요. 사실. 인연은 머리끈과 달리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으니까요. 인연은 저에게 미스터리예요. 어떻게 사라지고 나타나지는 모르는 머리끈처럼 말이죠. 잃어버려서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서늘해져요. 가을바람처럼요.
가을비가 오고 나니 바람결이 달라졌어요. 어쩌면 이미 달라져 있었겠지요? 제가 몰랐을 뿐. 언제 도착했는지 모르는 계절처럼 많은 것들이 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것 같아요. 저의 의식과 무관하게 벌어질 일은 벌어지듯이 앞으로도 준비없이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할 것 같아요. 아마도 잃어버린다고 잊어버리는 건 아닐거예요. 이렇게 저는 지금 이 계절을 잊고 싶지 않아서 편지를 쓰고 있네요.
가을 바람을 쐬며,
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