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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Feb 24. 2022

한나와 아이히만

<책 읽어주는 남자>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나는 책꽂이 앞으로 다가갔다. 프리모 레비, 엘리 비젤, 타데우시 보로프스키, 장 아메리 등 희생자들이 쓴 글과 그 옆에는 루돌프 회스가 쓴 자서전적인 글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 그리고 강제 수용소에 대한 학술적인 글들이 있었다. (『책을 읽어주는 남자』, 256쪽)        



한나가 읽는 법을 배우고 곧장 강제 수용소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는 대목입니다. 한나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이해하려고 한 노력으로 읽혔습니다.      



한나의 재판과정을 보면서 아이히만의 재판이 떠올랐어요. 미하엘이 한나의 행동부터 발언을 하나하나 관찰자 시점으로 보듯이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에 참석한 한나 아렌트도 아이히만의 행동부터 말투, 모든 발언을 치열하게 지켜본다는 점에서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잡혀 이스라엘로 압송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1906-62)에 대한 재판 기록입니다.           




한나(아렌트)가 한나(슈미츠)의 재판을 지켜본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한나가 감독관으로서 수감자들을 지켜야 했다고,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하는 장면은 아이히만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에 그 ‘해야 할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몰랐다는 점에서도요.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은 순전한 무사유, 생각할 수 없는 능력에서 기인한다고 말합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세 가지 무능성은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입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무능성을 판단한 근거는 그의 언어였습니다. ‘언어는 사유의 집’이라고 말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입에서 나오는 상투적인 말에서 아이히만의 무사유를 발견했습니다.      



아렌트는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그가 상투어가 아니고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아이히만이 상투어만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상투어의 의미를 일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그러한 상투어들을 일관성 있게, 단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반복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법정에서 이러한 상투어들을 동일하게, 즉 같은 표현과 같은 단어로 반복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말에 대한 무능성이고, 곧 사유의 무능성과 연결된다. (405쪽, 『한나 아렌트와 차 한잔』, 김선욱)     





아이히만의 상투어가 판사들에게 공허감을 일으켰다면, 한나의 말은 판사들에게 당혹감을 안깁니다. 자신의 죄를 은폐하거나 축소하려는 태도나 말이 아닌 순수한 무지에서 비롯한 말에 대한 순수한 당황스러움, 당혹감이요.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간단하게 도망치도록 둘 수는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우리는 그들을 수용소 안에서건 행군할 때건 줄곧 감시해왔습니다. 그게 우리가 그들을 수용소 안에서건 행군할 때건 줄곧 감시해왔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그들을 감시해야 하고 또 도망치도록 두어서는 안 되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상황은 그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에 다시 재판장을 향해서 물었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책을 읽어주는 남자』, 164쪽)   



영화 <더 리더>에서



한나의 무지는 유대인 여성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고 수백 명의 죽음을 화재사고로 방조한 혐의를 받게 하지만 아이히만의 무사유와는 다릅니다. 차이는 법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법은 태생부터 문자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쐐기문자로 새겨진 함무라비 법전,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십계명 역시 돌판에 새겨진 문자였습니다. 그러니 문자를 읽을 수 없었던 한나는 법 바깥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어떠한 사정에서 한나가 문맹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토록 책임감 있고 무자비하게 성실한, 다른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성정(그랬기에 거리에서 토하는 미하엘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었겠지요)을 지닌 한나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면 그토록 과중한 처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었지만 묵살했던 아이히만과 달리 한나의 무지는 그 출발부터 달랐습니다. 법 이전에 법에 쓰인 글을 읽을 줄 몰라서 발생한 무지였습니다.           



아이히만의 무사유는 현대인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 정치적 행위의 바탕이 되는 사유와 판단의 작용 없이도 사회 내에서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또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흉악한 일이 누구를 통해서도 가능한 일이라는 것, 그러한 일이나 책임을 조직이나 사회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생각을 멈추고 기계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었다. ‘악’이 란 말이 지칭하는 나쁨의 크기가 우리의 평범한 삶의 일상성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어가 ‘악의 평범성’이다. (399쪽, 『한나아렌트와 차 한잔』)     



한나는 여러 번 거주지를 옮깁니다. 성실하게 일했기에 주어진 승진이었지만 사무직으로 올라가면 글을 읽고 써야 하기에 자신의 문맹을 노출 시키지 않기 위해 미리 피한 것입니다. 죄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히만이 독일 패망과 더불어 아르헨티나로 도망가서 잠적한 것은 그가 전범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했기에, 법을 알았기 때문에 도주한 것과는 다릅니다. 글을 모르는 한나가 새로운 거주지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적응했을 노력을 생각하면 한나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한나는 늦게라도 글을 배우지 않았을까? 이 부분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글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도 마땅하지 않고 한 몸을 건사하기도 고단한 일상을 살고 있어서, 라고 이해하기에는 미하엘과 나누었던 시간이 걸립니다. 한나는 여러모로 능숙한 생활인이었습니다. 가족이나 어떤 연고 없이 어떻게든 스스로 생존해야 했으니까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생활에 단련된 한나지만 문자에 관해서 미성년이라는 것. 무언가를 배우려면 자신의 무지를 먼저 인정해야 하는데 문맹을 인정하기에는 생활인으로서의 노련함과 격차가 너무나 커서 문맹이라는 정체성이 인정이 안 되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맹이라는 몽매. 문자에 대해 여전히 어린아이라는 사실과 생활에 대한 노련함과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어려웠기에 한나는 오래도록 글을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그녀에게 자신의 이미지가 감옥에서 보낼 세월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책을 읽어주는 남자』, 175쪽) 그만큼 문맹에 대한 수치심은 종신형이라는 처벌을 받아들일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한나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미하엘이 지닌 딜레마였습니다. 이해와 유죄판결. 한나를 이해하면 유죄판결을 하려는 손가락의 힘이 약해집니다. 하지만 법을 다루는 법 연구자로서 미하엘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하만의 재판에 참관하며 아이히만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아이히만의 유죄 이유 사형의 합당성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이해와 유죄판결이 같이   있는 이유는 감정이 개입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미하엘의 경우, 한나는 자신의 인생을 지배한 사랑의 대상이었기에 이해와 유죄판결이 같이 어렵습니다. 전범자를 사랑한 .  어려움은 동시에 독자의 몫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나(아렌트)가 한나(슈미츠)의 재판을 지켜본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면 한나(아렌트)는 한나(슈미츠)에게서 ‘말과 사고를 허락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한나와 아이히만은 다릅니다. 대응방식에서 완전히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법정에서도 그는 조용하고 평범하게 감압정유회사의 외판원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보다는 퇴역 상급대대 지휘관으로서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88쪽) 따라서 아이히만의 사형은 아이히만에게 만족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아렌트는 판단합니다. 반면, 글을 깨우치면서 강제 수용소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자신이 한 일의 의미를 알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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