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에게 화풀이는 하는 못난 사람
적당히 노력해서 큰 결실을 맺으려는 내 심보가 문제다. 이렇게 현실을 직시하며 집으로 와서 그럭저럭 오후를 보냈다. 오늘은 몸이 많이 무겁고 피곤하다. 그래도 내가 안 하면 집안일, 아이들 챙기는 일을 누가 하겠나. 남편은 장기 출장 중이다.
아이들 학원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간식을 챙겨주고 은행업무를 보고 집안을 정리하고 밥을 차리로 치우고
미뤄놨던 내 할 일들을 좀 하고 첫째를 데리러 밤 9시쯤에 나갔다. 들어오면 9시 30분이다.
첫째 학원이 늦게 끝나서 데리고 집에 들어오면 피곤하다. 바로 씻고 자야지 이것저것 또 집안일을 하게 되면 너무 늦어지고 그러면 또 피곤하다. 남아 있는 일들을 최대한 빨리 해치우고 10시 30분 전에는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오늘은 첫째를 데리러 가면서 주식 관련 유튜브를 들었다. 유튜브 진행자는 최근에 책을 냈는데 그 책에 대한 구상을 하와이에서 한 달 지내는 동안 했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한 달을 보내다니... 그 유튜브 진행자, 정확히 말하면 투자회사 대표는 결혼은 했고 아이는 없다. 하와이에 한 달 있을 만큼 돈이 있고 시간이 있다. 나는 돈도 없으면서 아이를 셋이나 낳고 매일 아이들한테 화를 내는데 저 사람은 어쩌면 나랑 이렇게 다를까. 게다가 '책'을 냈다. 첫 번째 책도 아니다. 또 질투가 막 솟아오르는데 책 소개를 들어보니 너무 재밌을 것 같다. 읽고 싶어 진다.
첫째를 데리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둘째, 셋째 놈들이 하얀 벽에 까만 크레파스를 묻혀 놓은 것이 보인다. 신발은 엉망이고 바닥에 물건들이 흩어져있다. '소피루비'가 보고 싶다고 해서 어질러진 것들 정리한 후에 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리를 착착하고 평화롭게 '소피루비'를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화가 빠르게 올라온다.
애기들은(둘째, 셋째) 나름대로 치웠다고 치운 거다. 그리고 그 둘은 '비교적' 자기 할 일을 잘하고 둘이 사이좋게 잘 놀아서 나에게 '비교적' 많은 자유시간을 준다. 그런데 오늘은 신세한탄과 짜증을 섞어 쏟아내고 말았다.
나도 피곤하다고, 하루종일 너네 뒤치다꺼리하느라 피곤한데 이 밤까지 내가 이래야 하냐고, 내 시간, 내가 번 돈 너희들이 다 가져가면서 너희는 나한테 이 정도도 못하냐고, 내가 분명히 다 치우고 '소피루비' 보라고 했는데 이게 뭐냐고, 나 좀 그만 부려먹으라고, 빨래는 소파에 쌓여있는데 너희는 왜 안 개냐고, 누구 빨래 개는 사람이 정해져 있냐고, 나는 기어 다니면서 바닥 닦고, 하기 싫어도 밥하고 부엌정리 다 해놨는데 너희는 이 시간까지 뭘 먹고 흘려놓냐고, 줄줄줄 짜증을 이어갔다.
내가 한 말은 사실 다 맞는 말이다. 내가 고생 많이 했다. 그런데 내가 말하면서도 내가 듣기 싫다. 아이들은 얼마나 듣기 싫었을까.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생리하기 전에 몸이 많이 피곤하고 감정 조절이 좀 잘 안되는데 오늘이 그즈음인 것 같다. 오늘 오전에는 예비 작가와 나를 비교했고 오후에는 전혀 원금 복구가 안 될 것 같은 주식계좌를 열어보았다. 그 스트레스가 쌓여 결국 약하고 만만한 아이들에게 터진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가장 소중하고 약한 존재한테 화풀이나 하는 못난 사람이라며 자책을 한다. 최악의 피날레다.
차라리 완전히 우울함에 침잠해 버리면 좋을 텐데 나는 그렇지도 못하다. 그래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내가 가진 게 많잖아. 감사할 일이 많잖아. 하면서 감사한 일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쓴다.
-식기세척기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설거지까지 하면 정말 쓰러질 것 같아요
-건조기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시간을 많이 줄여주고 빨래가 뽀송하게 잘 마릅니다. 요즘엔 비도 많이 오는데.
-나와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해서 감사합니다. 가장 감사한 일이다.
-부자가 아니라고 불평하지만 그래도 막상 까보면 재테크 안 한 사람보다 나을 거예요(추정입니다).
-휴직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오늘처럼 잠 못 드는 밤에 내일 자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2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