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속. 너는 어디에서 어떤 속도로 가고 있는가.
학교 동기가 있었다. 말을 어눌하게 하고 행동이 굼떴다. 주변에서 놀리면 헤헤하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나는 틈만 나면 그 친구를 가르쳤다. "이렇게 행동해라. 저렇게 말해라." 인간관계뿐만 아니었다. 음악, 패션, 취미 모든 분야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항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기를 다시 만날 일이 생겼다. 10년 만이다. 오랜만에 보니 사뭇 다르다. 눈빛에 총기가 돈다. 행동이 절도 있다. 말이 진중하다. 말투와 몸가짐을 똘똘하게 바꾸려고 고생 좀 했다고 한다. 나는 ‘칭찬’했다.
카페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가정을 꾸리면서 힘든 건 없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는 주제마다 일장 연설했다. “(지금은 바뀌었다고 하지만) 너는 이런 성격이었으니까 이렇게 행동해야 하고, 저렇게 살아야 하고..” 말하는 내내 그 친구는 입을 다물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둘 이상 만나면 보이지 않는 높낮이가 생긴다. 위에 올라서면 말이 많아진다. 아래로 내려가면 말이 없어진다. 건강한 관계는 시소를 타듯 위아래를 교차한다. 대화의 지분이 공평하다. 말 한 만큼 들을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높거나 낮은 자리가 지속될 때 발생한다.
높은 곳에 오래 있으면 조언이 설교가 된다. 농담은 놀림으로 바뀐다. 쉽게 가르치려 든다. 상대를 파악했다는 자신이 생긴다. 반대로 낮은 위치가 굳어지면 경청이 딴청이 된다. 반박 거리가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말을 끊고 반문하기 어렵다. 듣기만 하게 된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관성이다. 운동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 태도에는 관성이 있다. 이 관성은 사람마다 다르게 작용한다. 혼자 있을 땐 인간은 공평하다는 거룩한 생각을 해도 누구 앞에 서면 고압적으로 되고 누구 앞에선 약자가 된다. 경험상 이런 차이는 오래 만난 사이나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에게 선명히 나타났다.
관성의 크기는 질량에 비례한다. 위에 올라서려는 태도, 넙죽 엎드리는 태도는 쌓이고 쌓여 무거워진다. 위나 아래 한쪽을 차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자리가 정말 내 자리가 된다. "상대를 무시하지 말자." "내 얘기도 할 줄 알아야 해" 이런 생각도 막상 만나면 스르륵 사라진다. 나다움이 없어진다.
나와 그 동기도 그랬다. 몇 년을 함께하며 서로의 위치를 확립해 나갔다. 충고를 당연히 여기는 나. 듣고 반응만 하는 친구. 어느샌가 그렇게 돼버렸다. 그를 만날 때면 위를 차지하는 걸 느꼈다. 하지만 내려갈 생각은 없었다.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 좋으니까. 걔도 싫어하지 않아 보였으니까. 이런 이기적인 마음을 ‘우린 오랜 친구다.’라는 문장으로 덮어놓고 모르는 체했다.
대화하며 우리는 웃기도 하고 속내를 터놓기도 했다. 누가 보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사이다. 우리 둘만 느끼고 있었을까. 말의 비중이 달랐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비스듬한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 이게 불편한지도 몰랐으리라. 자유낙하를 하는 물체는 자신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이런 못된 연결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관성을 멈추는 요소는 외부의 힘이다.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아가거나 멈추거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아래에 눌어붙은 사람은 액셀을 밟아야 한다. 용기를 내어 자기 존재를 피력하며 빠져나와야 한다. 위에 있는 사람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판단을 멈춰야 한다.
사람들을 만난 뒤 가끔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화장실에 간다. 거울을 본다. 누군가에겐 위를, 누군가에겐 아래를 차지하고 있을 나에게 계속 외친다.
"얼마나 잘났길래 남을 쉽게 판단하냐." "뭘 알길래 남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냐." "얼마나 경험하고 배웠다고 이게 기준이라고 하냐."
이런 물음으로 마음을 다잡아도 관성을 한꺼번에 깰 수 없다. 운동을 멈출 큰 힘이 없다면 작은 힘이라도 계속 보태는 게 최선이다. 꾸준히 반성할 점을 살펴야 한다. 다짐한 대로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운동에너지를 내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 관성에 휩쓸리지 말자.
내가 생각한 건강한 관계는 같은 방향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템포를 맞추며 가는 사이다. 그러기 위해선 위치를 알아야 한다. 물어보자. 너는 어디에서 어떤 속도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