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육아휴직 200일차

똑똑한 딸을 키운다는 것에 대하여

by 블루엔진
딸바보


나에게는 감정적으로 그렇게 가까운 단어는 아니다. 너무나도 험난한 세상에 내가 과연 내 기준대로 나의 아이를 지켜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결혼을 한 이후에 아이를 가질 때부터 나는 언제나 아들을 원했다. 어릴 때 꿈꿔왔던 첫째는 오빠, 둘째는 여동생이라는 내 마음대로 달성할 수 없는 꿈이 지금은 실현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딸바보" 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 역시 그렇게 오래됐다고 체감되지 않는다.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10년? 이제야 성비가 역전되거나 균등하게 맞춰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오래되지 않았다.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2013년까지는 최소한 아들을 가지기 위해 계속 출산하는 경향이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8년도의 셋째아의 출생성비 비중 차이를 보면 정말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생서비.png 2018년 통계청 기준 출생성비 자료

통계치로 보더라도 남아선호 사상은 이제 이 사회에 분명히 자리 잡기 어렵게 됐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똑똑한 여자 아이들을 보면 클리셰처럼 하시던 아래와 같은 말씀들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 아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더 큰 일을 했을 텐데...


세대의 변화는 최소 50년, 100년 단위의 장기적인 축을 가지고 변화하기 때문에 사회의 기득권층은 여전히 남성들이 많이 포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때로는 역차별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시대의 자율성에 맡기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양성 평등을 기반으로 여성들에게 포지션을 강제 할당하는 것 제도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고, 이는 개인적으로 좋은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둘째가 사회에 진출할 만큼 장성한 시점이 되면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기회의 차별" 을 받는 것은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이 되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되는 방향에 딸을 가진 아빠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적극 동참할 것이다.


그러나 딸을 키우다 보면, 특히 잠재된 가능성들이 많이 보이는 딸의 모습을 보다 보면 여전히 아빠의 마음에서는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되는 다른 고민이 생겨난다.


저 아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조금 더 쉽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앞으로의 대한민국 사회는 한 끗만 삐끗해도 지금의 양극화보다 더욱 극심한 양극화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양극화의 본질은 기득권이 강화되는 세상이라는 것이고, 어떠한 기득권이 강화된 세상 속에서 약자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평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또한 눈을 돌려 지금 내전으로 고통받는 중동, 아프리카 지역을 보더라도 시스템이 무너지거나 특정한 세력이 군림하는 세상이 되면 언제나 약자는 더 많이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여성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한계를 느끼는 지점도 많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지만 초경 이후부터 폐경까지 매월 일정 기간은 참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생리통이 없거나 월경 증후군 같은 것이 없어서 심리적인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앞으로 계속 제도적으로 진일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임신을 하게 되면 생물학적으로 당연히 아이를 위해여 자기 몸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자기 배 아파하며 출산하고, 또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 소비해야 되는 시간들이 생길 것이고, 그것이 한창 나의 딸이 꿈을 향해 달려갈 때 행여나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닐지...


아무리 사회가 성별에 대한 차별이 문화적으로 없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순간순간 직면하는 상황에서의 차별적 상황들에 직면할 때... 권력의 위계 관계에 의한 범죄의 폭로인 미투에서도 그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권력자의 별장 성접대 사건에 여전히 관대한 판결을 내리는 우리 사회에서,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에서 피해자가 여성이면 여전히 그 피해의 책임을 여성에게도 돌리면서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이 사회에서, 소라넷에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으나 N번방으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왜곡된 현실 속에서... 내가 나의 아이를 아무리 보호한다고 해도 대세의 흐름에서 고쳐지는 것이 없다면 여전히 나의 딸이 사는 세상에서 "너는 여성이기 때문에 이 모든 문제를 더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야" 라고 무력하게 말하게 되는 아빠가 되는 것이 나는 너무 두렵다.


이 걱정은 온전히 딸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나의 아이를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그런 변화를 위한 아무 힘이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일 나를 위한 너무 먼 미래를 걱정하는, 어떤 면에서는 온전히 나를 위한 항변이기도 하다.


그저 내가 지켜가고자 하는 원칙은 이번 육아휴직 기간을 통해서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다. 무언가 합의가 필요한 문제에 대하서는 나의 입장을 중심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입장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을 때 상대방의 이야기는 오히려 그 이해관계가 적은 쪽에서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는 것이다.


해당 이해관계를 직접 경험하는 사람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이야기해도 우리는 그 주장에 항상 최소한의 삐딱선을 탈 수밖에 없다. 바로 아래와 같은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장이 달성되기 위해 나의 희생이 조금이라도 수반돼야 한다면 말이다.


어차피 너를 위해서 그러는 것뿐이잖아? 내가 왜 그걸 위해 희생해야 해?


그래서 남성이 느끼는 차별적 문제는 여성들이, 여성이 느끼는 차별적 문제는 남성들이 상호 보완적으로 서로 얘기해줘야 한다. 장애인이 느끼는 차별적 문제는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차별적 문제는 장애인들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얘기해줘야 한다. 노동자가 느끼는 차별적 문제는 경영자가, 경영자가 느끼는 차별적 문제는 노동자가 오히려 대변하고 얘기해야만 우리는 더 나은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확실히 우리 집은 딸이 첫째와 부모의 의도와 관계없이 생물학적으로 본인들끼리 심각하게 경쟁하는 20개월 차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것이 빠르다. 뒤집기도, 일어서는 것도, 운동능력도, 무언가를 배우는 것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오빠가 하는 것을 다 따라 하다 보니 무언가를 시켜보면 상대적으로 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는 눈치도 둘째가 빠르다... (이노무 첫째...)


그럴수록 아빠의 마음속에서는 걱정 인형이 더 커진다. 그저 아빠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민으로서 주어진 권리에 최선을 다하고,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며, 아이들이 조금 더 성장하여 조금 더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을 때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더 나은 공동체란 무엇인지,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인지, 또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불행이 닥쳐왔을 때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사람들은 생각보다 행복한 미래를 그릴뿐, 불행한 미래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기 때문...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다)를 미리부터 고민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 정도 아닐까.


오늘도 그렇게 딸의 성장을 바라보며 걱정 인형만 커지는 아빠의 하루가 흘러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아빠육아휴직 190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