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과 관련된 논쟁은 사실 오랜 시간 진행되어 왔습니다. MBC100분 토론에 참여하신 제레미 리프킨 교수님은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 이미 약 20년도 전에 기본소득의 개념을 제시했고, 이러한 논의들은 조금씩 발전했습니다. 실제 유럽의 특정 국가에서는 특정 지역에서 주민투표를 진행하기도 하고(결과는 아직은 시기상조다), 무작위로 선발한 일부 대상으로 약 2년간의 실험 이후 제한적 실험의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죠.
최근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하여 전국민 재난지원금을 4인 가족 기준 100만원 현금 지급을 하며 촉발된 국내 기본소득 논의는 여전히 활발하며, 지금은 레이스에서 내려왔지만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주자였던 앤드루 양의 생각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그 불씨를 살려 계속되고 있고, 실리콘밸리의 일부 테크 기반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 역시 이러한 생각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이미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던 19세기 초반 촉발되었던 러다이트 운동 역시 현재와 유사한 위기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기계에 의한 자동화가 발달하면 노동자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공포때문이죠.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됩니다. 노동자에 대한 권리보호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지속가능성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한 자본가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이를 인정하고 양보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러다이트 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의 구조적 요인이 사람들, 특히 대중의 대다수로 구성된 노동자들이 금방 변화에 적응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얘기한 노동자의 일자리가 사라짐으로 인한 공포보다 해당 시기의 피부로 체감된 변화는 "산업 기득권의 전환" 이며, 이 과정에서도 기계가 자동화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기에 내가 일하는 산업이 변화될 뿐 노동자의 숫자는 생각보다 줄어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줄어들었다고 해도 오히려 단체협약이나, 단체교섭권과 같은 현재 조금씩 발전하며 정착한 노동3권 역시 해당 시기에 기존에는 없었던 노동자들의 이익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느꼈던 공포는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졌다는 것이 개인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지금 체감되는 공포는 그 상황이 매우 다릅니다.
바로 인공지능(AI)와 로봇이라는 2가지의 기술의 발달과 결합으로 인한 변화는 19세기 초반에 기계로 인하여 대체된 상황과는 질적/양적으로 그 상황이 다릅니다. 특정 자본가 그룹 또는 국가가 해당 기술의 독점을 통한 초격차를 만들어냈을 때 이에 대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즉 선의로 발전시키고 있다는 기술이 그 결과에서는 특정 자본가 그룹이나 특정 국가의 의사결정에 따라 특정 시민의 삶을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에도 그 변화 자체가 비가역성을 가진다는 것이 현재 우리가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조금씩 피부로 체감하는 변화입니다.
이런 식의 개념적인 얘기들은 제가 아니라도 수많은 전문가들이 하고 계시기 때문에 조금 더 피부에 와닿을 예시적 개념을 통해서 생각해보고, 앞으로 이러한 아젠다를 이끌어갈 사회지도층의 행동에서 어떤 점을 정확히 짚어봐야 하는지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개념적으로 현재까지 정의된 기본소득의 5대 요건부터 한번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원칙은 기존의 "선별적 복지" 로 지급되는 것과 차별성을 둘 것이냐, 기존의 선별적 복지 재원을 통합하여 하나로 운영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의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을 같이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1) 개별성 : 개인에게 지급한다
2) 보편성 : 모든 사람에게 지급한다.
3) 무조건성 : 자산수준, 노동 의사 조사없이 지급한다
4) 정기성 : 정기적으로 지급한다
5) 현금지급 : 사용 방식의 제한이 없는 현금을 지급한다.
제가 이 토론을 본 이후 이 글을 정리하게 된 이유는 이재명 지사님과 원희룡 지사님이 논의하신 기본 생각의 틀이 우리가 질문하기 좋은 구조의 상호 논쟁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분들의 생각 자체에서 디테일하게 발전하지 못하고 현실과 괴리되거나 본인들의 주장하시는 것과 스스로 상충하는 지점을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 좋기 때문입니다.
기본소득제까지 도착하기 위한 논쟁의 핵심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복지제도가 발전되는 개념의 논의 과정에서 선별적 복지를 강화할 것이냐, 이것을 뛰어넘고 바로 기본소득제로 갈 것이냐의 선택적 논쟁입니다.
선별적 복지강화 - 생략할 것인거, 그렇지 않을 것인가
아주 크게 분리해서 단순하게 정리하면 양측의 입장은 이렇게 정리되고, 양측 입장이 모두 틀린 점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그들이 정말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정치적 기득권을 얻기 위한 아젠다로서만 활용할 뿐이지를 깊이있게 질문해야할 뿐입니다.
■ 적극적 기본소득제 도입 입장
1인당 돌아가는 실질적 체감 가치가 적더라도 일단 시작을 해야한다
■ 소극적 기본소득제 도입 입장
선별적 복지를 강화해서 기본소득제 도입보다 적은 예산으로 실질적으로 여려운 계층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1. 기본소득을 복지로 바라보는가? 선별적 복지를 치환시키고자 하는가? 실제로 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는가? 라는 관점의 깊이 있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이건 소극적 기본 소득제 도입 입장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중점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들입니다. (물론, 적극적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분들에게도 깊이가 들어가면서는 동일하게 해당되는 지점입니다) 해당 입장에서는 해당 재원을 선택적으로 집중하면 진정으로 필요한 도움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학등록금 전체 무상지급이 1인당 월 4만원을 주는 재원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꼭 대학을 가야합니까? 안가는 사람은 그럼 복지 대상에서 제외되나요?"
논외의 이야기지만 이건 실제로 기업의 대학 학자금 복지제도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비혼족이나, 아이를 포기하는 부부가 늘어나면서 해당 제도가 인재를 잡아놓기에는 전혀 매력이 없는 방식이 되고 있기 때문이죠.
이렇듯 선별적 복지제도는 언제나 굉장히 잘 설계를 하더라도 또 다른 차별적 논쟁을 가져옵니다. 이를 선별하기 위한 행정 및 관리비용이 별도로 발생하게 되구요.
또한, 선별적 복지제도를 설계할때는 미래의 수혜자 규모 변화 추이를 당연히 고려해서 계산하게 되는데 그 예측이 맞는다는 어떤 보장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초고령화 사회의 속도 및 의학기술의 발전 속도를 예측하지 못해서 기초노령연금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도 그 예시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이렇게 증가하는 선별적 복지재원의 증가는 예산의 증가를 야기시켜 기본소득제 도입에 필요한 재원을 계속 부족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해야 하는 핵심 포인트는 아래와 같은 유형의 질문을 해봐야합니다.
"여건이 되면 기본소득제 도입에 확실하게 찬성하십니까?"
"현재 GDP 규모나 재원 수준으로는 안된다고 하니까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치 기준으로 우리의 GDP 와 세수 기준을 중심으로 정확한 수치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본소득제를 논의하는 오늘, 현재를 기준으로 앞으로 생기는 선별적 복지재원들은 지속적으로 도입을 늦추고, 선별적 복지제도가 확대, 또는 신규로 늘어날 때마다 지속적인 논쟁을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확실한 수치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면 즉시 도입을 지금부터 합의하는 것에는 동의하십니까?"
"선별적 복지제도의 지속적 확장을 주장하시는 이유가, 어느 시점에 재원을 핑계로 결국 추가적인 재원없이 기존의 복지재원들을 통합해서 통쨰로 전환함으로써 실제로 기득권층의 세금 부담을 최소화하고 실제로 수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나눠줄테니 나머지는 개별 시민들이 다 알아서 하고 국가 책임까지 최소화하려는 것은 아니시겠죠? 기본적으로 기본소득은 현재 구성되어 있는 최소한의 선별적 복지에서 추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기본소득 논의는 복지의 개념이 아닙니다. 기본소득은 IT 기술의 급진적인 발전과 AI & 로봇으로 인하여 산업의 플랫폼화를 통해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며 종속된 노동을 하거나, 아예 사라질 일자리를 대체하기 위한 노동소득에 대한 치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기본소득을 복지의 개념으로 생각하시는건가요?"
최소한 해당 질문들 수준까지 깊이가 도달했을 때 선별적 복지 중심으로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진심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인간에게 노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기본소득제가 되면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한 더욱 가치있는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하시는데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나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는 무엇으로 정해질까요?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하는 노동의 가치는 부여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결국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정받는 가치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평등한 사회에 산다고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대다수의 현실입니다.
심지어 이동 중에도 고급차의 뒷자리에 앉아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과 그를 수행하는 운전기사, 그 차가 호텔 등으로 진입할 때 보행자와 차가 사고 나지 않도록 유도해주는 주차보조원이 있습니다. 이미 사회는 그들의 가치에 "임금" 이라는 가격을 설정해두었고, 그 기준에 따라 우리는 마이바흐의 뒷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그를 수행하는 운전기사나 주차보조원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 정도의 임금 차이를 인정해야할만큼 그들이 사회적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가치의 차이가 있는걸까요? 잘못된 의사결정을 해도 천문학적인 임금을 받는 사람은 수행 운전기사나 주차보조원을 비용으로 치부하고 정규직으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현실은 별도로 보더라도, 주차보조원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게 하며 수많은 생명의 안전을 보호하고 도로의 흐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전체 도로 흐름에 개선을 했다면, 특정 그룹의 이해관계 중심으로 결정하는 고급차 뒷자리에 앉아있는 의사 결정자보다 공동체의 가치에는 어떤 관점에서는 더욱 가치있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생각해봅시다. 기본소득제가 되면 가치있는 노동에 종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시는데, 가치있는 노동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행동?
그럼 그 행동의 기준은 누가 정하게 되는걸까요? 공동체와 세상에 가치있는 활동이라는 것이 말은 좋지만 결국 어떤 일자리의 가치라는 것은 해당 일자리가 만들어내는 생산성의 가치에 따라 해당 산업의 근로자에게 어느 정도의 임금과 권리가 주어지냐를 결정하고, 이것은 결국 다시 특정 업종의 노동의 기본 수요를 결정하게 됩니다. 어차피 지속가능한 생산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일자리는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이라면 망하거나, 국가 역시도 어느 순간까지 버티다가 종국에 부도를 내겠죠.
본인께서 생각하시는 진짜 가치있음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얘기하시는 노동의 디테일한 사례를 하나만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노동은 별도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임금이 지급되어야 적합하다고 보시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기본소득이 일정하게 가치있는 삶의 기본을 유지하는데 충분하면 모든 사람이 별도의 임금이 없거나 거의 활동비 수준만 지급되더라도 공동체에 유의미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시는건가요?"
사실 가치있는 생존에 충분한 수준의 돈이나 필요한 재화가 지급되면 누가 노동을 할까요? AI & 로봇이 단계적으로 대체하면서 생산에 인간이 어떤 개입도 할 필요가 없어지면 그걸 소유한 특정 기득권들을 제외하면 이것을 소유하지 못하면서 기본소득재원만 가져가는 사람들을 생산자본을 소유한 기득권들이 바라보기에 대체 어떤 존재가 될까요? 자신들의 더 오랜 생존을 위해 유한한 자원을 낭비하는 존재라고 바라보게 될 개연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이런 순차적인 질문을 해본다면, 그렇다고 전략적 의사결정을 하는 그룹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발생할 혼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기에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쉽게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도 1번보다는 2번으로 움직일 개연성이 역사의 흐름에서 이해해도 더 타당해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해당 기득권에 속하지 않는 입장에서 저 역시 이런 글을 정리하며 발버둥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번의 길을 과연 갈 수 있을까?
또한, 기본소득과 더불어 분명히 단계적으로 흡수통합을 통해서 기본화시켜야 하는 선별적 복지들이 있다는 것, 반대로 오히려 강화해야하는 선별적 복지도 있다는 것의 지점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물론, 표를 의식해 이런 것을 용감하게 추진하는 정치 세력은 국내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권력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테마만 다르게 주장하는 수준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지만...)
예를 들어, 공공의료보험처럼 세대와 관계없이 인간이 건강이라는 보편타당한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복지제도는 당연히 유지가 되어야합니다. 산재보험 역시 기본소득제 이후에도 위험한 일은 차등적으로 존재할 것이지만 고용의 개념이 달라질 것이고, 고용보험은 실업의 개념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유지하는 것이 합당하나 그 방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국민연금이나 기초노령연금과 같은 공공연금의 형태는 소득을 보전해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통합해서 기본소득제로 통합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1)무상급식, 무상교육과 같이 사회 공동체의 올바른 구성원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영역이나 2)장애인, 노약자와 같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일반인 보다 삶의 비용이 더 많이 소요되는 사람들을 위한 지원은 선별적으로 강화해야하며 3) 천재지변과 같이 예측 불가능한 재난에 의한 구호와 같은 지원 역시 여전히 존재해야합니다.
이런 개념을 망실해버리면 기본소득줬는데 왜 자꾸 무언가를 국가 공동체에 요구하고, 생산자본의 이익을 뺏으려고 하느냐는 이상한 논리가 자리잡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년이 되면 1회에 자립할 수 있는 사회정착금을 크게 주자는 (현재 기준 3억 단위) 발상 역시 그걸 줬는데 실패하면 더 큰 낙인을 찍어버릴 수 있기에 개인적으로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타당성에 대하여 모두가 생각하는 디테일한 방식은 다르겠지만, 결국 우리가 이것을 논의하는 것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단순히 눈 앞에서 당근만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근이 썩은 당근은 아닌지 깊이 있게 고민하고 질문하고, 그 결과로 더 좋은 정치 권력을 선택하는 시민들이 많아질 때 우리는 조금 더 살아갈만한 세상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 의견 역시 그저 하나의 의견일 뿐 실제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조금 더 깊이있게 고민하고 논의의 주체가 우리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에 이런 글을 정리해봅니다.
2020년 9월의 기본소득논쟁을 바라보는 일개 시민으로서 많은 생각이 들었던 그런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