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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Nov 29. 2021

세탁

  오래 쓴 통돌이 세탁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셀프 세탁소에 자주 오고 있다. 자취를 오래 한 탓에 뭐든 아껴 쓰자는 마음으로 가사노동을 직접 부담해왔는데, 세탁기와 빨랫줄이 해주는 일을 만원이나 주고 하려니 처음엔 돈이 아까웠다. 

  하지만 시간에 맞춰 세제나 섬유유연제를 따로 넣지 않아도 세탁기가 알아서 해결해주는 부분이나 건조까지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투자하는 한 시간 남짓이 아깝지 않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건조기 없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이 된달까. 

  개인적으로는 해가 쨍쨍한 날 옥상에 널어 둔 빨래가 바삭하게 마른 걸 좋아하지만, 빨래를 개다 보면 건조기에서 건조된 부들부들한 빨래의 촉감도 마음에 든다. 옥상에서 마른빨래는 햇볕의 냄새가 나고 건조기에서 마른빨래는 섬유유연제의 향이 난다. 여름에는 햇볕의 냄새가 나는 게 좋고 겨울에는 섬유유연제의 향이 좋다. 이런 것도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국내에서는 아직 코인 세탁소가 유행하지 않을 때, 미국 여행 중 폭설이 내려 셀프 세탁소로 피신을 한 적이 있다. 잠시 추위를 녹이려고 들어간 곳이었지만 고요하고 아늑한 것이 느낌이 좋아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그때만 해도 누가 매번 돈을 내고 여기까지 와서 빨래를 돌리고 다시 들어가는 수고를 하냐고 구시렁대었지만, 주거 형태가 변하고 집의 면적이 점점 줄어들면서 살 때는 비싸고 처분할 때는 골칫덩어리인 가전이나 가구를 많이 들이기보다 개인의 취미나 스타일을 살리는 물건을 집에 들이고 삶의 방식에 따라 필요한 것을 취사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집은 냉장고도 없다고 하는데 나같이 요리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꿈도 못 꿀 이야기지만, 꼭두새벽에 일어나 출근하고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귀가하는 사람이라면 집에서 잠이나 겨우 잘 뿐 요리할 체력이 없으니 시켜 먹거나 밖에서 먹고 오는 것도 이해가 된다. 요리할 시간에 일 분이라도 더 쉬고 싶을 테니. 

  다음 주 이사를 준비하면서 전에 쓰던 모든 가구를 버리고 간다. 벌써 십 년도 넘게 쓴 물건들부터 중고시장에서 사 온 것도 있고 길에 버려진 가구를 주워오기도 했다. 생활고에 시달려 새 가구를 사는 것은 사치라고 여기며 살아온 인생이기에 그렇게 아름아름 모은 물건들이 나름 보물 같이 느껴졌다. 

  사람마다 어떤 것은 꼭 새 걸 구입해야 하고, 어떤 것은 누가 쓰던 것이어도 상관없다는 나름의 판단 기준이 있지 않은가. 나는 새 것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어 남이 입던 옷도 잘 받아 입고 가구도 잘 받아 쓰며 열심히 절약해왔다.

  방방곡곡에서 모인 물건들은 한 사람의 감성과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한다. 누군가의 집에 가보면 가구의 배치나 크기 등으로도 어떤 일을 우선시하는지, 집에서 주로 무슨 일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집이 성격을 대변하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대형견이 집에 함께 있고 리트리버의 갈색 털이 자주 빠지기 때문에 검은색 가구나 침구류를 사용하지 않는다. 옷도 베이지나 브라운 계열이 많다. 숙면을 위해 침실에서는 잠만 자고 TV 같은 것을 두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부족한 수면시간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이 많아 책장으로 벽 한 면을 가득 채웠고 필기를 좋아해 곳곳에 필기류가 흩어져 있다. 모든 사물에 추억과 이야깃거리를 붙이는 탓에 쓰지도 않으면서 쌓여 있는 무용의 물건들이 많지만 그것이 곧 내 성격이고 살아온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정든 가구들을 만지며 '이 정도면 아직 쓸만하지 않나'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이제 보내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추억도 좋지만 삶의 효율과 새로운 시작을 위해 변화해야 하는 시간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건조기의 완료 알림이 울릴 때쯤이면 하나의 글이 완성된다. 육십 분이라는 시간이 이리도 짧았나. 아직 글 쓰는 속도가 더뎌 마감에 맞춰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엔 역시나 아직 무리다. 살다 살다 건조기가 나의 글쓰기 실력을 판단해주는구나. 그래도 고맙지. 셀프 세탁소에 있는 한 시간 동안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타자를 두드릴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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