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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바람

여행 중 봄이 찾아왔다.

by C W

여행이 끝났다.


땅만 바라본 채 두꺼운 외투를 꽁꽁 싸매며 힘겹게 이동하는 나에게 비바람은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도 바람 앞에선 싱그러운 향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먹구름을 비추었다.

잿빛이 된 세상에서 바다만 홀로 자신의 푸른 에메랄드 빛을 자랑했다.



소주를 마신 뒤 보드카를 사서 숙소에 다시 돌아온 늦저녁까지도

해는 빛을 비추지 않았다.

날은 어두워졌다. 숙소의 암막커튼이 밤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오렌지 주스를 탄 보드카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다보니 벌써 자정이 되었다.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침대도, 창문도, 내 마음도 모든 게 다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시간이 잠시 멈추었다.

커튼이 쳐지고, 구름이 걷히고, 달이 나타났다. 방이 환해졌다.

하지만 달빛이 비추는 침대에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어둠이 비추는 것을 반복했다.

계속 되는 빛과 어둠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지쳐 잠들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해는 보이지 않았다.

계획했던 것들은 하지 못했고,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계획되지 않았고, 계획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멈췄던 순간부터 나에겐 똑같은 날씨와 늘어지는 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의 실망감은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생기는 설렘들로 채워졌다.



누구나 가는 실내 관광지, 맛없는 아메리카노와 디저트. 남들 다 사는 기념품.

평범한 여행을 이어갔다.

나중에 다시 갈 필요 없는 장소들이지만, 그 순간으로는 되돌아가고 싶은.. 그런 하루하루였다.



마지막 밤, 새로운 보드카를 사들고 숙소 가는 중에 봤던 상현달.

첫날 봤던 달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달은 잘 때까지 내가 누워있던 침대를 따듯하게 비춰주었다.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나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달빛은 비추고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 계속 찾아오던 어둠은 사라졌다.



비행기로 떠나기 전에 봤던 하늘은 맑았다.

고개를 들어 구름 사이에 조심스레 빛을 내는 해를 보았다.

마지막이 돼서야 나타난 해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아쉬운 감정 또한 없었다.

모든 걸 가렸던 회색 구름들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 중인 하늘에 마음이 붕 떴을 뿐이다.



갑자기 나타난 달빛과 어둠으로 시작되어 봄을 알리는 해로 마무리한 짧은 여행이었다.

짙고 진했던 여행이었다.



이제 봄이 온다.

사람들은 찬바람 때문에 꼭 쥐고 있던 외투를 하나씩 벗는다.

여행 마지막 날에 만난 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날 떠나지 않는다. 봄인 걸 알리는 따스한 햇살을 계속 드리운다.

나도 나를 감싸고 있던 외투를 하나씩 벗는다.


KakaoTalk_20240226_183852949.jpg


고요했던 달빛 속에서, 날 정신 못 차리게 했던 어둠은 무엇일까.

다시 그 어둠이 날 찾아올까.

햇살을 가리고 다시 찬바람이 불까.

혹시 그렇게 된다면 이미 벗어버린 외투를 다시 입을 수 있을까.



KakaoTalk_20240226_183938195.jpg 마지막은 귀여운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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