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저/신동준 역. 『완역 사기 열전』. 위즈덤하우스. 2015.
『종의 기원』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동네 도서관까지 찾아가 주니어김영사의 만화책을 들여다 봤었습니다. 그때 다음 책인 『사기 열전』도 함께 들여다 봤었는데요, 아차싶더라고요. 일단 이 책도 원문은 한문일 테고, 그 양이 어마무시하겠다 싶었습니다.
'시내'엘 나간 김에, 서울도서관(옛 경성부청 건물)에 들러보았습니다. 서울시청 신청사를 짓고 나서 옛 건물을 도서관으로 바꾼지라, 장서들의 상태가 꽤 좋은 편입니다. 보존서가에 들어가 있는 <사기 열전>들이 여러 권 있었지만, 제가 관심있는 건 '완역본'이었습니다. 한문 원본이 같이 들어 있는 책을 원했던 거죠. 그렇다 보니, 위즈덤하우스와 연암서가의 책 정도로 좁혀졌습니다.
결국 들고 나온 건 위즈덤하우스였습니다. 연암서가의 대역본은... 권수도 한 권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대역'이라는 쓸데없는 편집이 가독성을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원문을 읽는 만용을 부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읽어서 3주내로 끝낼 수는 없을 정도로 양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저 역문을 읽다가 의아할 때 원문을 확인해볼 수 있는 정도로 한정했습니다.
하루에 세 시간 반씩 일주일 동안 신동준 역의 위즈덤하우스刊 『사기열전 1』을 읽고 나니, 되레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마치 성경의 「창세기」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그리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처럼, 스쳐가는 고유명사들이 너무 많다 보니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심지어 표제인물들까지도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서, 내가 이 책을 읽긴 읽은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머릿속에서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지도 때문에도 어지간히 애를 먹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춘추시대 지도와 전국시대 지도를 찾아보고, 5패와 7웅을 가려가면서 지도 공부를 한 다음에야 비로소 조금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아무래도 고에이 사의 프랜차이즈 게임인 삼국지 시리즈로 단련된 중국 지도를 과신했던 탓이 큽니다. 그나마 춘추전국시대의 9주 체제를 근간으로 한나라 시대의 군현제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싶었습니다.
중국의 오등작 제도의 명칭이 후대에 꽤나 다른 의미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점도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논어』와 『맹자』에서 언급되는 5패와 7웅의 공(公) 호칭과 왕(王) 호칭의 차이를 명확하게 일별 할 수 없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넘쳐나는 왕, 공, 후(侯), 군(君)의 향연에서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일본제국의 오등작에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해, 동양과는 조금 다른 위계의 유럽의 봉건제까지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중국 상고사에서의 용례는 좀체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기열전 1』을 다 읽고 나서야 안개가 걷힌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부분은 ‘나는 중국 고대사를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중등교육과정 6년 동안 세계사를 공부했고, 한문을 공부하면서 고대사를 재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초한지나 삼국지연의와 같은 문학작품들을 통해 고대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했었던 겁니다. 오래된 경험은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그리 큰 힘을 내지 못했습니다. 녹슨 기억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었는데, 결국 이제야 부랴부랴 챙기게 된 꼴이 됐습니다.
아무래도 2권을 계속 읽어 나아가기에는 이런 문제들이 좀 있는 듯해서 중간에 『사기 본기』를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막상 책을 챙기고 보니 세 권의 책만으로 벌써 2500페이지가 됩니다. 하루 세 시간씩 3주일을 꼬박 읽어야만 다 읽을 수 있을 양입니다. 그렇게까진 정말 할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간 금주를 하면서까지 1권을 읽다가 번아웃이 올 지경이었는데요, 이걸 2주나 더 하려니 숨이 다 막힙니다. 이쯤에서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입니다.
열전의 내용이 재밌지도 않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새롭게 읽히는 것도 있지만, 기려지신(羈旅之臣)들의 욕망이 점증하는 모습이나 그로 인해 실각하고 숙청되는 모습은 너무나 똑같게 반복됩니다. 이 사람이 그 사람 같고, 그 사람이 저 사람 같아집니다. 한국사를 포함해서, 비슷한 인생궤적을 그린 이들이 많다 보니 더더욱 헛갈립니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었나 싶어지는 이상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마저 읽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습니다. 각 권마다 권두해설을 빼놓지 않는 신동준의 평가가 권말의 ‘태사공왈’로 시작하는 사마천의 평가와 어우러지면서 대별점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더 힘든 독서가 됐을 듯합니다. 이미 알고 있던 인명이나 에피소드, 사자성어(『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열전』 같은 책이 나올 정도입니다.)들마저 없었다면 일찌감치 책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와중에 『사기 본기』를 읽으면서, 좀 차분해진 느낌입니다. 일단 지식의 간극이 메우지고 있다 보니, 그 효능감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상고사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절감하던 차에 꽤나 좋은 기회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자신의 지식을 과신했던 지식 착각(illusion of knowledge)을 뼈저리게 반성하게 됩니다.
올해에만 역사서만 7권, 역사적 고찰을 다룬 인문서 5권을 읽었습니다. 통시적 고찰이 부족하다 싶었던 차에 읽게 된 책들이 대부분인데요, 그때마다 제대로 다시 세계사와 국사를 공부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이 단순 암기였던 학창시절을 보냈던 터라, 이제서야 통섭적 사고가 가능해졌고 그것을 기반으로 나름의 사관(史觀)도 형성되는 듯해서 그렇습니다.
동양의 역사 기술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뉩니다. 편년체로 뭉뚱그릴 수 있는 공시적 고찰 방법과 기전체로 갈무리해 볼 수 있는 주제 접근식 통시적 고찰 방법이 그 둘입니다. 앞엣것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형태가 대표적이고, 뒤엣것은 사마천의 사기나 김부식의 삼국사기 같은 것이 있습니다.
공무원시험 한국사 과목의 바이블과도 같았던, 2002년 3월 1일에 초판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는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로 나누어 각각을 통시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국사를 암기과목으로 확정하고 맥락과 상관없이 외우기만 했던 90년대에도 같은 구성의 교과서로 공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인지 정치적 변혁으로 인한 경제적 변화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화적 변동 그리고 그 문화적 토대 위에서 바뀌는 사회 현상과 같은 것들을 함께 고찰하지 못했었습니다. 이를테면 새롭게 생긴 왕국에서는 왕권 강화에 힘을 씁니다. 그렇다 보니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를 위해 법령을 정비하게 되고, 그 법령의 정비과정에서 경제자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편들이 확립됩니다. 지방 세력이나 상인 세력에게 넘어갔던 수세권을 재정비한다던가, 경제권력의 남용으로 얻어낸 노예들을 해방하는 방식이 흔합니다. 그렇게 되면 깨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신분제도의 변화가 생깁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과는 차별화하고 싶은 일반 계층은 지식을 독점하던 귀족 계층의 빈틈을 노리게 됩니다. 이때 왕권강화에 욕심을 내던 집권세력은 관료 임용 제도에 능력주의를 도입하게 됩니다. 출판사업을 장려해서 지식 보급의 확대도 꾀하게 됩니다. 전국시대 오기와 상앙의 변법이나, 진시황의 시책 그리고 한문제와 한경제 사이의 '문경지치'가 그렇습니다. 한국사에서도 고려 초기와 조선 초기에 똑같은 일들이 반복됐습니다. 그런데 교과서가 저런 식으로 기술되면, 종합적으로 사고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편년체 사서의 경우에는 주제중심성의 결여, 그러니까 줄거리를 엮어낼 수 있는 중심 스토리 라인이 없다 보니 꽤나 지루하고 분절적입니다. 그런데 기전체의 경우에는 그 반대로 동시대적 맥락의 결여, 그러니까 같은 시대의 상호 연관성이 부족해져서 시야가 좁아집니다. 그래서 공시적 서술의 역사서를 읽다 보면 주제중심적 서술의 역사서를 읽어보고 싶어지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청개구리짓을 하고 싶어집니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을 읽다가 본기나 표를 좀 봐야 할 것 같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연유로 『사기 본기』를 펼치고 보니, 『사기 세가』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겠다는 낭패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러다가 잔꾀를 떠올렸습니다.
학창시절에 우리는 사회과부도나 역사부도라는 학습교재를 사용했었습니다. 10년전쯤에는 『아틀라스 세계사』라는 책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지도와 연표가 정리된 책이 한 권쯤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있었습니다. 몹시 다행스럽게도, 연표와 춘추전국시대 제후의 계보까지 정리되어 있었기에 한 방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