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 서해문집. 2005. "고전 읽기 또는 과하게 트집 잡기"
주니어김영사의 학습만화 시리즈인 <서울대선정인문고전 60선>을 목록으로 정해서 고전을 읽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건너뛰고, 헤로도토스와 노자 그리고 플라톤을 지나 토마스 모어에 이르렀다. 그 어느 하나에서도 짜증을 멈춘 적이 없고, 과하게 트집 잡기를 그만둔 적이 없다. 스스로도 꽤 이해하기 어려운 독서 태도다.
처음 고전 읽기를 시작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그저 “읽어는 보고 떠드냐”는 공격에 “읽어는 봤다”며 젠 체하고 싶었던 게 다다. 피에르 바야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정리한 방식 그대로, 지금까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떠들어댔던 것에 좀 부끄러워진 면이 없지 않은 터였다. 제법 책을 많이 읽은 독서가란 자부심도 대략 지금까지의 독서량을 헤아려 보고 나선 풀이 죽어 버리기도 한 터였다. 그러니 그저 읽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싶었다.
그렇다 보니 읽기만 해도 의미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뭘 그렇게 열심히 지적질을 하느라고 쓸데없이 진땀을 빼고 있다. 암만 봐도 과하게 트집을 자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좀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꽤나 우스운 꼴이 아닐 수 없는데, 막상 또 책을 들여다보면 짜증이 폭발한다. 21세기를 사는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고전’이나 읽고 있는 게 맞나 싶어서 말이다. 2500년의 세월을 통해 수백만 명 이상이 같은 고민을 정제해 왔고, 그리하여 ‘애초의 이 생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태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현대인’처럼 굴고 있었다.
우리에겐 지식 착각(illusion of knowledge)이란 것이 있는데, 실제로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화장실 변기에서 물이 빠져나가고 채워지는 원리는 몰라도, 변기를 사용할 수 있으면 우리는 변기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인데, 한 발짝 물러나서 살펴보면, 창피하기 그지없는 행태다. 지금 내가 그러고 있다. 부끄러움에 ‘현자 타임’에 빠지게 된다.
2.
과하게 트집 잡기는 제법 사소한 일에서도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서양 고전들은 라틴어로 기술된다. 고대 그리스의 문헌들이야 고대 그리스어로 기술되었지만, 막상 15세기 이후 유럽 사회에서 유행하며 다시 읽힐 수 있었던 것은 라틴어 번역본이 유통되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와 플라톤의 책을 고대 그리스어 번역본을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면, 토머스 모어 역시 자신의 저술을 라틴어로 기록했고, 그 라틴어본이 자국어로 번역된 것은 그 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도 ‘라틴어 역본’을 찾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리하여 우선 라틴어로 된 pdf를 찾다가 영라대역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잉글랜드 인문주의자 중에서 최고로 치는 토머스 모어인데, 그 자존심 강한 영국인들이 자국어로 번역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말이다. 16세기 지구 반대편 조선에서도 2000년 전 공자님 말씀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작업(논어언해)을 했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다. 라틴어는 1518년 판본을 영역은 1551년 랠프 로빈슨(Ralph Robinson)의 판본으로 구성되었고, 주석과 편집은 럽튼(J.H. Lupton)에 의해 이루어진 1895년 옥스퍼드대학 클래런던출판부의 버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중세 영어 번역본이라서 대략 난감하기는 했지만, 국역본의 번역 충실성을 검증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래서 라틴어역본이 아닌 1995년 출간된 영역본을 대본으로 한 책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헛웃음이 나긴 했지만, 이 작업은 앞으로의 독서에서 의외로 큰 도움이 되었다.
번역서를 읽을 때마다 경험하게 되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점 중에 하나가 ‘근대적 역어 선택’의 문제다. 19세기 후반 폭풍처럼 몰아쳐서 이루어진 근대적 역어들의 선택에서는 꽤나 동떨어진 개념들이 매칭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신분이나 계급을 나타내는 용어나 관직에 대한 용어들이 그렇다. 아주 다른 제도 속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역어로 매칭되면서, 역어로는 원어의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under-sheriff에 대한 역어로서의 사정장관보나 lord chancellor에 대한 역어로서의 상서경과 같은 용어는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다른 적당한 역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제도 자체가 현대에는 시행되지 않고, 시행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제도가 됐기 때문이다. 잉글랜드가 지방통치제도를 샤이어(shire)로 정리한 뒤로 ‘~셔’로 끝나는 지역명이 생기기도 했다. 이 샤이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임명하는 관직이 셰리프(이 셰리프에서 변용된 미국의 형사제도가 보안관이다.)였는데, 규문주의 시대 경찰과 검찰과 법원의 역할을 죄다 이행했다. 현재 독일에선 수상직을 일컫지만, 당대 영국의 로드 챈슬러는 왕의 법정(curia regis)에서 셰리프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을 이른다. 이 정도의 역할을 하다 보면 왕의 자문관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고, 국정을 총괄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추기경인 토머스 울지가 토머스 모어의 전임 로드 챈슬러였고, 로드 챈슬러가 된 토머스 모어가 울지 추기경을 사형에 처했던 것처럼, 실각한 토머스 모어도 다음 로드 챈슬러에게 사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번역된 역어만으로는 그들의 직책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주변 정보를 찾아보느라 꽤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그것이 고전을 읽으며 과하게 트집 잡게 되는 또 한 가지가 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de magistratibus’라는 챕터를 영어로 번역한다고 하면 ‘of magistrates’로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걸 우리말로 옮기려고 영어사전을 검색하면 ‘치안 판사(=Justice of the Peace)’가 결과로 나온다. 이 정도면 땀을 삐질삐질 흘리게 된다. 내용을 살펴보면, 그저 선출직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기서 치안판사가 튀어나오면 답이 안 나온다. 심지어 치안판사가 뭔지 알 수도 없다. 우리나라 같은 대륙법계 형사법 체계에는 성립하지 않는 직책이라서 그렇다. 이 책에서는 “공무원에 대해”로 번역했는데, 라틴어 magistratus는 높은 벼슬이나 관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처음 책을 살펴봤을 때만 해도 양이 많지 않아 금방 읽고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번에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가장 큰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들과 같다. 좀 더 복잡해진 16세기 영국 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과 다른 제도의 정합성을 검증해 가며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청소년 교양도서로 기획된 책이라서 그런 주석들이 제법 풍부한 편이었다는 것이 귀찮음을 많이 덜어주기도 했다.
1권에서 가장 먼저 딴짓을 불러일으킨 것은 “지나친 형벌”에 대한 지적으로 시작하는 당대의 형사법체계와 형사정책에 대한 비판이었다.
재산범죄에서 발생되는 민사 채권을 노역형이라는 자유형을 부과함으로써 함께 해결하는 가상의 민족을 이야기하면서, 그 감시체계에 대한 기술한 것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며 실현불가능해 보였다. 특히나 ‘잘린 귀’와 같은 감시체계는 부작용이 예견될 정도니 말이다. 다만 당시 인클로저로 인해 촉발된 경제의 공황 상황에 대해 ‘뉴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만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딴짓은 필수가 된다. 16세기 잉글랜드의 법률제도의 근간과 사법체계, 그리하여 행형절차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경찰과 검찰이 없으니 왕의 군사들이 체포를 하고, 판사 역할을 하는 셰리프가 재판을 주관하고 형벌을 부과한다. 그런데 교정시설이 없으니 자유형이 부과될 수는 없고, 재산이 없으니 재산형도 불가능해진다. 이러니 그냥 죽여서 없애버리고 말았을 테다.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는 ‘징역형의 다른 이름인 노예형’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행형관리제도가 부재한 16세기 잉글랜드에선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된다.
토머스 모어나 헨리 7세에 한 세기 앞선 정도전과 이성계의 조선을 떠올려 보면, 법치나 인문주의 통치가 실현되지 말란 법도 없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하지만 건국되자마자 태종이나 세종 그리고 세조로 이어지는 강력한 왕권의 실재는 이상주의적인 분권 정치를 불가능하게 했다. 역사적 선례를 살펴봐도, 헨리 8세가 집권 초기에는 ‘인문주의 왕’을 표방했다고 해도 종국에는 강력한 왕권 하에서의 안정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정도전과 다를 바 없는 루트를 타게 된 토마스 모어의 인생 역로는 예정되어 있던 수순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딴짓은 2권을 시작하면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진다. 유토피아의 인구구조는 가구당 성인남녀 40명 이상으로 구성되며, 그 가구는 대표부부에 의해 이끌어진다. 이렇게 30 가구마다 1인의 마기스트라투스(관리)인 필라르쿠스가 선출된다. 300 가구 당, 그러니까 10 필라르쿠스 당 1인의 프로토필라르쿠스가 선출된다. 대략 1만 2천 명 수준에서 프로토필라르쿠스가 선출되는 것인데, 16세기 초반 유럽의 도시 인구가 대략 그와 같은 수준이었다. 책에서는 다소 배치되는 기술이 있기도 한데, 도시당 6천 가구 이하로 유지하며, 가구 인구는 10명 이상에서 16명 이하로 유지한다는 설명인데, 당시 유럽 최대 도시인 파리의 인구는 5만이 되지 않았고, 런던의 인구는 2만 명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최고통치자인 1인의 프린켑스는 총 200명의 프로토필라르쿠스가 참여하는 집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렇게 인구 비율로 유토피아의 인구를 추산해 보면 240만 정도가 된다. 딱 당대의 잉글랜드 인구 250만에 육박한다.
‘유토피아인의 여행에 관해(de peregrinatione utopiensium)’이란 장에 이르면, 금욕적 생활 태도의 근간이 되는 도덕철학이 등장하게 된다. 어디서 많이 본 철학이다 싶어서, 얼마 전에 읽어 본 『철학의 역사』를 뒤적거려 본다. 역시나 교부철학의 근간을 이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시작해,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과 고통 개념을 관통한 다음, 스토아학파의 관점으로 자리 잡는다. 여기서 인문주의자로서의 태도가 확장되면서 제러미 벤덤이나 피터 싱어의 철학적 기반에 이른다. 그리하여 영국인의 도덕철학의 어떤 계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짧은 책을 한 권 읽었지만, 그렇게 딴짓을 많이 하다 보니 꽤나 오랜 독서시간이 필요했다. 또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다.
보통 책을 읽고 나서 하나의 문장을 꼽거나 하진 않는데, 책이 될 수밖에 없는 거대한 생각 덩어리를 단 한 문장으로 축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장 수집’과 같은 말을 정말 싫어하는데, 이번에는 좀 다른 이유로 문장 하나를 따로 떼게 됐다.
haec non suis commodis prosperitatem, sed ex alienis metitur imcommodis.
(오만superbia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부를 측정하지 않고, 남이 가지지 못한 것으로 측정한다.)
DE RELIGIONIBVS VTOPOENSIVM(유토피아인의 종교에 관해) 장 중에서
얼마 전에 전혜원이 쓴 책에서 꽤나 인상적인 문구를 만났었다. “성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들이 패배해야 한다.” 미국의 작가, 고어 비달의 발언을 조성주가 인용했고, 그것을 전혜원이 자신의 책에 기록했는데, 그걸 내가 재인용하고 있는 이 복잡한 상황을 이제는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토머스 모어를 인용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