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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Mar 24. 2023

‘읽는 사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다.

PLATFORM P 교육, <읽는 사람: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후기

1. 나는 왜 이 강연을 듣게 됐는가?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이하 ‘PLATFORM P’)에서 진행하는 <읽는 사람: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이란 교육 프로그램을 3일 연장하여 듣고 왔다. 읻다 출판사와 공동 기획이라고 누차 강조했지만, 우리 같은 노친네들은 무조건 ‘官중심’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PLATFORM P’의 강연 프로그램은 이태 전부터 즐겨 청강하고 있다. 주제는 대체로 흥미롭고, 듣고 나면 두고두고 되짚어 볼 것들도 많아져서 그렇다. 현장에 참여해야 하는 집합 강연인데도 종종 동교동(법정동은 동교동이나 행정동으론 서교동)까지 찾아오곤 한다.     


 이번 주제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최근 나는 ‘독자로서의 나’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최근 3달 동안 나는 30여 권의 책을 읽었다. ‘벽돌책’이라 부를 만한 500페이지 이상의 사철양장제본도 여러 권 섞여 있다 보니, 나의 독서량에 조금 우쭐해지기도 했다. 2년마다 독서문화진흥법에 의해 실시되는 <국민 독서실태 조사>의 최근 버전인 2021년 12월 자료에 따르면, 연간 종합 독서량(종이책+전자책+오디오북)은 성인 전체 평균 4.5권이며 독서자 기준(한 권도 책을 읽지 않는다고 응답한 사람들을 제외한 통계)으로는 9.5권으로 나타났다. 없음 59.3%, 1~2권 8.1%, 3~5권 19.0%, 6~10권 8.7%, 11~15권 2.5%, 16~20권 1.1%, 21권 이상 1.3%으로 응답된 것만 살펴봐도 적잖은 나의 독서량에 살짝 콧대가 들썩였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고 해도 1년이면 겨우 365권이고, 50년을 매일 한 권씩 읽는다고 해도 2만 권이 채 되지 않는다. 1주일에 한 권씩 읽으면 쉰 권이 넘어서 대한민국 독서인구의 ‘상위 1%’에 해당하게 되지만, 그리 많은 수라고 말하긴 어려워진다. 

 출판법에 의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는 반기별로 출판산업동향을 발표하고 있다. 최근자료는 2022년 상반기 자료로 41,107종이 출판됐고, 2021년 한 해에는 77,724종이 출판되었다. 매일 200종이 넘는 책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저 헛웃음만 나오는 숫자다.     


 작은 동네책방을 운영하는 책방지기들이 자주 듣는 질문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파는 책을 다 읽어 보았냐”는 것이고, “평소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게 다른 하나다. 찬찬히 생각만 해봐도 얼마나 ‘병신 같은’ 질문인지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꾸역꾸역 잘도 던지고들 있어서 ‘정말 자주’ 듣는다고 한다.

 동네책방도 소규모 자영업인지라 기본적으로 책방지기 1인의 노동력에 온전히 의지하게 된다. 정말 일이 많다. 책이 저절로 주문되고, 진열되고, 판매되는 건 아니라서, 손님이 없다고 책을 읽을 시간이 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책을 읽을 짬이 날 정도로 손님이 없는 책방들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책방들은 다른 자영업들이 그러한 것처럼 망했거나, 망해가거나, 망할 것이다. 글 쓰는 작업실을 겸해서 책방을 차렸다는 책방지기들도 없지 않은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같이 책방에선 작업을 할 시간이 없으며, 오히려 책방 문을 닫은 후에야 차분히 작업을 하게 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 보니 책방지기들은 상당수 책방을 열기 전보다 독서량이 줄었다고 답하곤 한다. 새롭게 입고해야 할 책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서평이나 발췌독 정도에 그치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터득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방지기들을 우울하게 하는 한 마디, “그 책 되게 유명한데 여기엔 없다구요?”란 말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왕성한 독서가라 자신하며 책방까지 열었건만, 듣도 보도 못한 책들로 자신을 얕잡아 보는 손님들 때문에 자괴감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게는 새로운 화두가 생겼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읽어야 ‘의미있는 독서행위’가 될 수 있는지 말이다. 그 참에 PLATFORM-P가 툭 하고 던져준 강연은 덥석 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강연을 통해 간단히 답에 이르지는 못했고, 심지어는 더 깊은 질문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머리 깨지게 힘든 문제지를 받아 들었다. 막막하다.


 

2. 讀者와 ‘읽는 사람’의 사이  

   

 “독서 문화”란 문자를 사용하여 표현된 것을 읽고 쓰는 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정신적인 문화 활동과 그 문화적 소산을 말한다.
- 독서문화진흥법 제2조의 1호     

 나이를 먹고 꼰대가 되어가면서 배우게 된 의외의 사실 중에 하나는 우리의 삶을 규율하는 대부분의 용어들은 ‘법률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법률을 통해 규정해 놓지 않으면 공적인 자금 지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는 영화비디오법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영화진흥위원회를 통해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독립출판이나 독립서점 또는 인디뮤직은 출판법이나 음악산업법에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법률에 의해 지원을 받을 수 없다.

 독서문화를 장려하려면 법적 근거가 필요하고, 그렇다 보니 독서문화진흥법이란 짧고 엉성한 법이 생겼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독서 문화’에 대한 법적 정의다.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법률이 우리의 정서적 편견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점이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독서’라는 한자어에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몹쓸 편견을 가지고 있다. 셀룰로스로 만들어져 종이라 부르는 섬유질을 코덱스라 부르는 형태로 만든 것만을 그 읽기의 대상으로 한정하곤 한다. 그렇다 보니 ‘독자’라는 표현에서는 ‘독서를 하는 자’로 생각하지 ‘읽는 사람’으로 대상과 행위의 외연을 확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읽는다는 행위는 행위가 필연적을 쓰기로 연결된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읽기에서 그치는 것보다 쓰기로 연결될 때가 훨씬 더 생산적인 활동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독서 문화’를 문자로 표현된 것을 읽고 쓰는 활동을 중심으로 규정하는 것은 꽤나 타당해 보인다.   


 그리하여 ‘읽는 사람’이라는 호명은 내게 있어서만큼은 독자란 고정관념을 낯설게하기에 성공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에 누가와 왜까지 다시 고민해 보게 된 것이다. 꽤나 거대해서 몹시 혼돈스러운 주제를 다시 곤란해하며 고민해야만 하게 됐다. 머리가 아프다.       


   

4. 읽는 사람은 ‘누구’인가?     


 첫날부터 잔뜩 소화불량에 걸린 듯한 느낌에 불편했다.

 ‘출퇴근하며 읽기’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찾아갔던 가벼운 마음이 어느샌가 출퇴근하며 읽기란 행위가 누구에게 가능한 것인가란 시원적 문제로까지 환원하면서 머리 속은 복잡해졌다.


 출퇴근을 하는 사람은 하루 일과 중에 12시간을 ‘일’에 매몰해야 한다. 적어도 하루 8시간의 근로시간과 1시간의 점심시간 그리고 출근 준비와 출근과 퇴근에 각각 1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물론 직주근접성이 몹시 높은데다 가사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환경에 놓인 사람이라면, 대략 2시간 이상의 시간을 다른 사람보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런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지극히 적으니 논외로 해도 무방할 테다. 그리고 수면과 휴식에 8시간을 사용하고 식사 준비와 가사노동에 2시간 정도를 사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사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환경에 놓여서 그저 차려진 밥상에서 밥만 먹으면 되는 사람이면 대략 1시간 이상의 시간이 발생한다.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평일 여가시간은 2~3시간과 3~4시간으로 몰린다. 다시 정리하자면, 출퇴근을 하는 보통의 근로자라면 하루에 2시간 정도의 여가시간을 내는 것이 고작이라서, 책이라도 읽을라치면 출퇴근 시간이라도 활용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암울한 이야기다.

 이쯤 되면 시원적인 문제는 불평등과 맞닿게 된다. 여가시간이란 결국 경제적 지위와 궤를 같이 한다. 직주근접성이 높다는 것은 꽤나 높은 부동산 가격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사노동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가족구성원 중에 누군가가 전담할 정도로 가족소득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가 돈 벌러 나가야할 정도로 가난한 집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 육아 등 사회적 재생산과 관련된 돌봄 노동이 개입하게 되면, 8시간의 수면과 휴식 그리고 2시간의 가사노동 시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수면과 휴식 시간은 줄어 들고 가사노동시간은 증가한다. 여가시간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출퇴근 시간은 어떻게 해서라도 ‘휴식과 여가시간’으로 활용해야 한다. 출근길 만원 전철에서 가까스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부족한 잠을 청하던가, 퇴근길 좌석버스에서 골아떨어지지 않고서는 버티기 어렵다. 그러하니 이다혜 기자에게 “버스를 타면 멀미가 심해서 무얼 읽기 힘든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질문은 한다거나, 금정연 작가에게 “2013년부터 2021년에 이르는 드라마틱한 성인 독서율 감소는 인구구조의 변화와도 연관이 있을 수 있으니 합계출산율 하락 그래프로 억지논리를 만드는 건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질문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강연을 듣고 앉아 있으려니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강연을 듣고 있는지 그 목적이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강연은 대체로 강연자 개개인이 독자로서의 자기 경험을 토대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 보니 명시적인 대상으로서의 ‘읽는 사람’은 수강자들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읽고 쓰기가 업인 사람들이 읽고 쓰기가 업인 사람들을 모아 놓고, ‘노동으로서의 읽기’를 이야기하거나 ‘효율적인 읽기의 방식’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강연자의 독자 층위와 수강자의 독자 층위만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강연자와 수강자 각자가 생산해 낸 콘텐츠를 읽어줄 ‘일반 독자’들의 독자 층위까지 유기적이지 않게 섞여버렸다. 그게 위화감의 정체였으리라. 생산자의 입장에서 소비자의 읽는 행위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소비방식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몹시 생산자 중심적인 강연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 어느새 강연자들의 간증에 호응하는 소비자들의 모임이 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했고, 그렇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이 따위로 자세로 접근할 주제가 아니었구나’란 낭패감이 꽤나 큰 자괴감으로 돌아왔으리라.     


     

5. 읽는 사람은 ‘언제’ 읽을 수 있을까?


 읽기란 정신활동은 문자 그 자체를 해독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문자들이 만들어내는 상호적 맥락(context)을 파악하는 것이 되레 읽기의 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아이들이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간판들을 열심히 읽어 외치는 것처럼, 그냥 그 표음문자의 음을 확인하는 행위로 읽기가 끝나는 경우는 대체로 없다. 심지어 그 아이들조차도 떠듬떠듬 읽은 그 간판들이 의미하는 바를 가끔 되묻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표 너머의 기의가 만들어내는 의미의 구조들을 파악하는 것이 읽기의 목적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읽기는 꽤나 진지한 자세를 요구하게 된다. 그냥 대충 훑는 것으로는 내용이 파악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작정하고 앉아서 들여다 보아야만 읽기는 가능해질 테다. 그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은 이른바 여가시간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면 대체로 구하기 어렵다. 퇴근길은 그리 적당하지 않다. 첫날 강연을 듣고 돌아오는 길, 합정역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나는 600페이지짜리 사철양장제본의 『피렌체 서점 이야기』를 펼쳐 들었지만, 문래역쯤에서부터 꾸벅거리며 졸다가 신림역에서 화들짝 놀라 뛰어내리기도 했다. 다른 날보다 과로했거나 회식과 같은 술자리라도 있었다라고 하면 언감생심이 될 테다.


 그리 쉽게 허락되지 않는 그 시간이지만 출근시간이라면 좀 가능할 수는 있겠다. 그래도 집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으니 몸의 피로도는 낮은 편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외부와 소리벽을 치고 나면, 그럭저럭 집중해서 무언가를 들여다 볼 만한 시간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공간의 문제, 그러니까 교통수단의 문제가 발생한다. 금정연 작가의 지인이 출퇴근 길 운전대에 책을 펴놓고 읽었다는 정신나간 이야기에 경악했다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최 책을 펼쳐 볼 수가 없는 생활인들의 출퇴근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이 전부 ‘전철’이나 ‘노선버스’로 출퇴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퇴근하지 않는 이상, 언제 읽느냐의 문제는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도 동반하게 된다.   

  

 이래저래 작정하고 읽기에 매진하려면 확실히 외적 활동과 차단된 나만의 시간이 필요해진다. 그런데 1인 가구가 아니라면 집으로 돌아온 그 시간도 역시나 읽기의 시간이 되지 못한다. 저녁을 먹고 일상의 유지를 위한 가사활동도 해야 하며, 육아까지 이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출퇴근 시간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시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6. 읽는 사람은 ‘어디서’ 읽을 수 있을까?     


 시간의 문제 때문에 한껏 제약이 걸리긴 했지만, 앞에서 말한 것 같이 읽기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외부 작업과 차단된 나만의 공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해진다.     

 그런 점에서 아침 출근길 전철 안은 제법 괜찮은 읽기의 공간이 된다. 손잡고 함께 출근할 친구가 옆집에 사는 경우도 거의 없으니, 대부분의 출근길은 혼자이기 마련이다. 이어폰을 꽂고 나면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되곤 한다. 물론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구간이나 9호선 급행처럼 욕 나오게 붐비는 경우는 예외다. 아침 대중교통 상황이 어디인들 붐비지 않겠냐만, 그 둘은 지옥철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서 말이다. 스마트폰의 시대가 된 것이 참 다행이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가 아니거나, 버스를 타면 멀미 때문에 아무 것도 읽지 못하는 사람(내가 그렇다)이라면, 출근시간은 읽기의 시간이 되기 어렵다. 오로지 ‘듣기’의 시간이 되어야만 할 테다. 금정연 작가의 지인처럼 운전대에 책을 펼쳐 놓고 읽으면서 운전하는 기행이 가능하다면 또 모르겠으나, 스마트폰을 쓰다가 사고를 내는 경우가 워낙 많다 보니 그런 재주꾼은 그리 없다고 봐도 무방할 테다. 

    

 이미 제약이 주어진 시간을 차치하고서라도, 집이란 공간은 집중하기 쉽지 않은 공간이 되기도 한다. 웬만한 소득 수준을 갖추지 않고서는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재를 꾸리기 어렵다. 집에 서재는 없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라서, 작정하고 책을 읽으려거든 집 근처 카페라도 가게 된다. 그런데 그냥 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가장 싼 아메리카노라도 한 잔 시키고 앉아 있을라치면 한두 시간만으론 본전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다시금 시간과 비용의 문제가 공간의 선택을 제약하고, 공간의 부재는 읽기로 이어지지 못하게 된다. “됐어 씨발~ 그냥 자빠져서 드라마나 봐”가 될 공산이 크다.          



7. 읽는 사람은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읽기에 있어서 무엇은 대부분 왜 읽는가와 어떻게 읽는가로 곧 연결되는 문제인 듯하다.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공부로서 읽거나, 읽은 콘텐츠의 내용을 통해 즐거움을 얻기 위한 유희로서 읽거나, 지시사항을 이해하기 위해 전달 사항을 읽거나 하는 것이 읽기의 목적이 되곤 한다. 그래서 그 목적에 맞는 대상을 골라 미디어를 선택해서 읽기 마련이라, 무엇을 읽느냐는 읽기 그 자체의 문제에서는 한 발 더 들어가는 문제인 듯도 하다.     


 다만 읽기 대상의 유용성과 같은 가치 문제는 고민해볼 대상이 된다. “쓸데없이 그딴 책이나 붙잡고” 있다는 핀잔을 듣지 않으려면, 무엇을 읽을지 사전에 충분히 고민해 봐야 한다.

 금정연 작가의 말처럼, “좋은 책이라서 나중에 찬찬히 읽겠다며 재껴두는 경우”가 있고, “내용이 불만스러워서 책장을 덮어버리는 책”이 있는데, 그렇다 보니 역설적으로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형편없는 책을 공격하기 위해 억지로 읽어내는 경우도 종종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책에 대한 서평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으로서의 읽기’가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한데, 이때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는 고민조차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은 목적을 확정하는 과정에 대한 의문사이다. 다시 말하면 선택을 수반하는 과정이란 것이고, 선택을 위해서는 규준measure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끔 책을 판단하는 평가적 어휘로 “책이 좋은가 나쁜가” 또는 “책이 재미있는가 재미없는가” 아니면 “책이 쉽고 편하게 읽히는가 어렵고 불편하게 읽히는가”를 가져오곤 한다. 흥미로운 것은 긍정적인 어휘들끼리만 묶이는 것도 아니고, 부정적인 어휘의 평가라고 해서 그 평가가 부정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우선 책의 내용에 대한 가치 평가, 그러니까 ‘좋은가 나쁜가’를 평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가치체계에 달려 있다. 소위 철학이라고도 부르는 개인의 가치체계에 부합할 경우에 ‘좋다’는 평가를 내리곤 한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입장에 근거해, 나의 가치체계에 부합하면 좋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쁘다고 말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좋다/나쁘다’는 객관적인 규준으로서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재미있다’던가 ‘쉽고 편하다’는 건 어느 정도 객관화가 가능하다. 물론 교육 수준에 따른 문해력과 배경지식의 유무로 개인차는 발생하기에 아주 객관적이라 할 순 없으나, 그래도 ‘대체로 그런 편’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규준 아래에서 읽기의 대상이 선택되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규준에 부합하느냐의 판단이 전적으로 개인의 실증적 경험에 근거하는 건 아니다. 타인의 비평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곤 한다.   


       

8. 읽는 사람은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책의 죽음에 몸서리치는 것은 10년 전의 독서율 하락 소동만큼이나 헛다리 짚는 꼴이다. 미국 국립예술기금위원회에서 당시 발표한 연구 보고서 「위기의 독서」에서는 독자 수가 1982년부터 2002년까지 10퍼센트포인트 하락했‘다고 지적하면서 독서율 하락을 개탄했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로 밝혀졌다. 우리는 덜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읽을 뿐이다. 인간이 언어와 또한 글과 교류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휴대용 독서 수단이 필요하다. 책이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 12쪽. 애머런스 보서크/노승영 옮김.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서울:마티. 2019년.


 2021년말에 이 브런치 블로그에 처음으로 쓴 글의 제목은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였다. 위에 쓴 애머런스 보서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읽기 대상은 이미 책에 한정되지 않게 됐으며, 굳이 책이 아니어도 높은 정보집약력을 갖춘 멀티미디어를 통해 정신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여러 종류의 시각 미디어와 청각 미디어, 심지어는 시청각이 공유되는 미디어가 손에 잡히는 하나의 디바이스에서 재생될 수 있는 시대에 ’종이로 된 코덱스‘에 집착하는 것이 그리 영리한 행동은 아닐 테니 말이다.  

   

 이번 강연에서 스스로가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은 이다혜 기자의 강연에 나온 발언을 접했을 때였다. “좁아터진 원룸에 책 쌓아놓을 공간이 어디 있겠나, 그러니 전자책으로 보관하고 읽는 게 훨씬 낫다는 게 요즘 세대인 것”이란 발언이었다. 2만 권의 책으로 구성된 정재승 박사의 대전 서재집을 부러워하던 꼰내에겐 찬물을 끼얹은 것과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읽느냐는 곧 읽은 것을 어떻게 보관하느냐의 문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꽤나 가볍게 여긴 것이다. 지난해 여름에 한 차례 헌책을 정리해서 버린 사람 입장에서도 간과할 문제는 아니었다.     


 독서 문화의 개념이 그러하고, 우리가 다르게 읽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점토판에 쓰여진 문자이든, 파피루스(Cyperus papyrus) 아니면 리넨과 목화라던가 혹은 닥나무로 만든 종이에 쓰여진 문자이든, 송아지 아니면 염소라던가 또는 양에서 얻어낸 피지에 쓰여진 문자이든, 하다못해 박막트랜지스터 액정 디스플레이에 띄워진 문자이든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오디오북의 경우는 좀 다를 듯하다. 시각언어인 문자와는 사뭇 다른 청각언어의 차원이니 ’읽기‘의 영역에서 고민해볼 문제는 아닐 테다. 다만 독서 문화의 범주에서까지 제외해야 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어차피 오디오북을 만들기 위해 낭독하는 대본은 문자이고 그 낭독 자체는 ’소리내어 읽기‘라는 부정할 수 없는 읽기 행위이니 말이다.      



9. 결론: 그래서 읽는 사람은 무엇을 트레이드 오프하게 되나?


 직업을 가지고 사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하루 2시간 남짓한 시간만을 오롯이 자기에게 투자할 수 있게 된다. 그마저도 사람들을 만나거나 하는 사회적 활동을 하게 되면 쉽게 확보되지 못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죄다 읽기에 투자할 수가 있을까? 언감생심이다.

 신문이란 근대적 제도가 확립된 이후로, 우리는 시사current affairs를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실질적으로든 그저 명목상일지든 민주주의는 꽤나 많은 사회에서 그 기본적인 작동원리로 적용되고 있고, 그 원활한 작동을 위한 시사의 인식은 제법 중요함을 갖게 됐다. 해당 사회의 어느 부분에서 무슨 일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 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같이 꼼꼼하게 뉴스를 시청하고 신문을 들여다 보는 것은 민주 시민의 덕목이라고 할 만하다. 풍부한 시사 지식을 갖추기 위한 '독서 활동'에 전념하다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2시간 남짓의 여가는 후딱 지나간다. 그래도 모자라서 출근 시간에 부지런히 포털사이트를 검색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뉴스레터 스킴을 벤치마킹한 뉴닉 같은 서비스를 이용해가면서 그 끈을 놓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테다. 

 그렇다 보니 전통적인 범주의 문학 독자가 되건, 대중성이 높은 웹소설의 독자가 되건, '여편네들이나 보는 연속극'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뉴미디어 시대의 총아로 거듭난 '오리지널 드라마'의 오타쿠가 되건, 건강이 최고라며 '오하운'에 올인하는 사람이 되건,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무관심한 '물색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정도로 시간은 항상 부족하다. 한정된 자원인 시간을 자기효능감 높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트레이드 오프의 상황에 놓일 수 밖에 없다.

 책에 대한 물신화 수준의 경배가 체화된 사람들에게는 며칠이면 휘발되는 '그깟 신문기사' 따위에 비해, 책에 녹아들어간 '지성의 정수'가 더 높은 가치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어두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안에 보다 근원적인 이치'를 깨우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강변하며 독서를 위한 시간을 트레이드 오프 할 테다. 

 욕심 사납게 죄다 하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선택과 집중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읽기라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목적이 되는 경우는 좀체 없다 보니, 읽는 사람은 무엇에 집중해야 하나를 먼저 고민해 봐야 한다. 그렇다 보니 결국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 던질 수밖에 없게 됐다. 골치가 지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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