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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Feb 21. 2023

[북리뷰] 유이 쇼이치_『재즈의 역사』

서울:삼호출판사. 1995. "오래 묵힌 책을 읽다"

1. 26년만에 '냄비 받침'을 펼치다.


 '오늘 사면 언젠가 읽는다'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1년 이내에 읽지 않으면 평생 읽지 않을 확률이 50%, 2년 이내에 읽지 않으면 평생 읽지 않을 확률이 90%, 3년 이내에 읽지 않으면 평생 읽지 않을 확률이 99.9%가 된다. 물론... 과학적인 통계치는 아니다. 그냥 내 개인적인 어림치일 뿐이다.

 그런데 1997년에 사놓고 지금껏 꽂아만 두었던, 유이 쇼이치(油井正一)의 책 『재즈의 역사』를 26년만에 들춰봤다. 냄비 받침으로나 쓰였던 오래된 책이 드디어 품고 있던 활자를 내보인 것이다.

둥그런 물체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저건 분명히 냄비가 올려졌던 흔적임에 틀림없다.

 이 드문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지난 토요일 멜론에 적당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재즈에 대한 소박한 지식이 밑천을 드러냈고, 퍼뜩 뮤지션을 떠올리지 못한 나는 그냥 전날 선곡해 두었던 마일스 데이비스를 그냥 재생하고야 말았다. 

 나는 최근 루틴을 몇 가지 만들어 가고 있는데, 2월 1일부터 '오늘의 BGM'이라며 매일매일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는 걸 추가했다. 공교롭게도 첫날의 선택이 스탠 게츠였고, 즐겨 들었던 주앙 지우베르트우, 찰리 파커, 빌 에반스와의 협업 앨범을 하나씩 선곡했다. 어쩌다 보니 빌 에반스 트리오의 사운드가 귓가에 맴돌아 그 다음날에는 빌 에반스를 들었고, 또 그 다음날엔 쳇 베이커를, 그 이튿날은 냇 킹 콜을 듣다 보니... 재즈 보컬리스트나 재즈 세션이 플레이리스트의 손님이 됐다. 그렇게 흐름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에 그런 사달이 난 것이다.

 빈약한 지식을 좀 메울 필요가 있었는데, 우리같은 꼰대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라곤 책부터 들춰보는 것이라서, 이번에도 여지없이 책을 선택한 것이다. 마침 '언젠간 읽고 말 거야'라며 버리지도 못하고 쟁여두었던 이 책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2. 1997년의 도전과 실패


 "재즈는 뉴올리스언스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라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로 시작하는 이 책의 첫문장을 읽는 순간, 26년전의 낭패스러움이 꽤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1997년 나는 부산에서 의경으로 복무하고 있었고, 워크맨으로 <Getz/Gilberto>과 <City Jazz>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을 즐겨 듣고 있었으며, 사람 좋은 고참들이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졸병인 내게도 독서를 권할 때였다. 그래서 재즈를 좀 공부해 보자며, 부산 서면의 영광도서에서 이 책을 사들고 왔던 것이었다.

 꼰대는 젊었을 때부터 꼰대였나보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997년의 우리나라 인터넷 환경은 정말 거지같았다. 웹브라우저는 넷스케이프를 써야 했고, 검색엔진이라곤 알타비스타나 야후 같은 영문엔진을 쓰던 시절이었다. 그마저도 대학 전산실쯤을 찾아가 봐야 이용 가능한 수준이었다. 물론 1998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인터넷 환경은 꽤나 활기차게 변화했고, 도서관 같은 곳에서는 공용PC 몇 대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질 좋은 콘텐츠들을 웹환경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한글 콘텐츠는 부족했고, 검색엔진은 형편없었고, 무엇보다 나의 컴퓨터 활용 능력은 워드프로세서에 멈춰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공부하자면, 어쩔 수 없이 책을 찾아 보는 것이 유일하고도 최선인 방법이었다.

책에 붙혀 있는 영광도서의 인지. 1968년부터 서면에서 영업을 시작한 이래로,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그때 나는 이 책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이미 첫 장에서부터 무슨 이야기인지 당최 알 수 없는 말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1920년대 뉴올리스언스에서 태동한 재즈라는 음악씬에 대한 정보를 들어본 적조차 없는 문외한에겐 문턱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시작부터 언급되는 <Flee as A Bird>, <Oh, Didn't he Ramble> 같은 스코어(지금은 멜론으로 책에서 언급된 인터뷰 앨범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는 듣도 보도 못했으니 말이다.  젤리 롤 모튼을 언급하기 시작한 19페이지에 이르자 책장을 더 넘길 수가 없었다. 한 번 덮힌 책의 운명은 대부분 비슷하다. 한동안은 파출소 의경생활실 안에서 냄비받침으로 쓰이게 됐던 것이다.



3. 오래된 책을 좋아하는 이유


 1986년 5월 5일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이 경이롭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그 경이는 외가댁 다락 계단을 올라간 순간 시작됐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재'라는 공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큰 형과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작은 형에겐 이제 볼 일 없는 오래된 아동도서들이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손자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외할아버지의 애정이 지나치게 담겼던 거라며 어머니는 나중에 볼멘소리로 설명해주셨었다. 1960년대 후반에 출판된 책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출간된 책들을 꺼내보면서, '이런 세상이 존재했구나'라며 꽤나 행복해 했었다. 그때와 비슷한 행복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던 건 고향 동네의 공공 도서관이 개가식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1990년이 되어서였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나 보다. 오래된 책에 대한 동경같은 게 야릇하게 남아 있는 게 말이다. 책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때의 기억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오래된 책은 1995년에 개정1판이 발행된 것으로 서지 정보가 적혀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니, 초판은 1988년에 출간된 모양이었다. 더 재밌는 사실은 일본에서 원서인 <ジャズの歷史物語>가 출간된 건 1973년이었던 모양이다. 찾는 김에 내 책장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언제적 책인가를 살펴 보았다. 미래사에서 출간한 한국대표시인 100선집의 몇 권이 가장 오래된 책들이었다. 1991년에 출간된 책들이었다. 두어 권에는 큰 누나의 필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20년 전 누나에게서 빌려 와서 돌려주지 않은 듯하다. 



4. 오래된 정보는 가치가 하락한다


 26년 전과는 다르게, 이 책에서 언급된 재즈 뮤지션들의 절반 이상을 이미 들어본 나는 재즈에 대한 지식이 꽤나 진일보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책을 읽는 게 막히지는 않았다. 다만 이 오래되고 다소 잡다한 책이 지금 읽기에 그리 적절하진 않다는 아쉬움이 생겼을 뿐이다.

 원제에서 들어나듯이, 1970년대 초반에 미국 잡지를 통해 취재했을 정보들을 '역사'라고 칭할 수준으로 정리하진 못했다. 그래서 원서는 '모노가타리物語'라는 모양 빠지는 말을 덧붙였을 테다. 지금이야 위키피디아에 빼곡히 정리됐을 정보들이나, 인터넷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아카이브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정보들이라서 꽤 잡다한 이야기들이 눈에 차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이 쓰여졌을 50년전만 해도, 유이 쇼이치가 끌어 모은 정보는 일본의 재즈팬들에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고급 정보'였을 테다.  그리하여 격세지감을 느낀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DTP가 꽤나 일반화되고 있었다. 다만 시대가 맥과 쿼크익스프레스의 시대였기 때문에 한글2.5로 편집해서 필름 출력했다는 저 안내도 제법 눈길을 끌었다. 1997년 부대 행정반에서 사용하던 한글의 버전이 3.0 도스였기에, 한글 버전도 쉽사리 지나치질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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