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지 않은 독서를 억지로 하는 법”
고전(古典)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classic
a book, film or song which is well known and considered to be of very high quality, setting standards for other books, etc.
- Oxford Learner's Dictionaries
우리가 왜 고전을 읽는가를 고민해 보기에 앞서, 고전이란 무엇인가부터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사전에서 이미 그 의미를 정리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생활에서 그 기원을 은폐하고 새로이 조작된 나름의 정의를 사용하는 경우가 잦다. 특히나 국어교육의 일환으로 기획되는 독서교육에서 ‘고전’을 선정해서 목록을 제공하는 경우에서 고전의 정의는 유동하게 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어떤 기준으로 해당 저작을 ‘고전’으로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꽤나 폭넓은 정의가 멋대로 적용되기 마련이다. ‘교육’이라는 근대적 기획에 기반한 ‘고전 선정’의 작업은 계몽적 기획에 맞닿은 저작들을 그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고전목록은 아마도 ‘서울대 선정’ 목록일 것이다. 2023년에도 서울대는 목록을 제공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졌다.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SNU 고전 100'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으로 대체된 듯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꽤나 명확해진다. ‘선정위원’들이 생각하기에 ‘읽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한 책들을 ‘마땅히 읽어봐야 하지 않나’ 생각해서이다. 여기에는 지식인의 대열에 끼어든다는 지적 우월성을 얻고자 하는 헛된 욕망이 비루하게 끼어들게 된다. 도서간의 맥락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백과전서 혹은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전 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이 이룩한 계몽적 기획에 충실한 잡학을 습득하기 위해서 말이다.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사고와 활동의 전범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 책들은 지식과 품성의 교양을 갖춘 지성인으로 거듭나게 하고,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도와준다”는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의 선정 이유도 그런 이유에 맞닿아 있다.
네이버 밴드 독서미션에 가입했더니,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이란 목록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첫 번째인 마키아벨리의 『국부론』을 지나고, 2권째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로 넘어가 있었다.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에도 들어 있는 이 책을, 그 목록이 연원한 만화로 읽었다. 김영사에서 출간된 『(NEW)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02 헤로도토스 역사』를 아무 생각 없이 도서관 앱으로 대출신청을 했고, 동네 작은도서관에서 수령했다. 그 순간 책을 건네주는 자원봉사자도, 책을 건네받는 나도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화였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만화로 프리뷰를 했기 때문에, 『코기토 총서 035 역사 (김봉철 역)』을 80%정도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989페이지짜리 벽돌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이 세 권 있었다. 일리아드, 오딧세이아, 성경. 서사의 진행은 지지부진해서 재미없고, 문체의 미학은 생각해볼 수도 없는 번역서였는데,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라틴어는 다시 영어로, 그리하여 영어가 한글로 번역되는 거듭되는 중역이라서 말이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학도라면, 신화와 ‘구라’와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뒤섞일 수 있는가를 고민해볼 수 있는 텍스트로 중요하게 탐색해 볼 수 있을 테다. 마찬가지로 고대서사문학을 연구하는 문학도라면, 인간의 서사에 신화가 끼치는 영향을 고민해 볼 수 있었을 테다. 그런데... 나는 그냥 아재다. 이 역사적 사실이나 박물학적 사실을 어떻게 분리해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비전공자에게 이 텍스트의 완독이 의미 있는 행동이 되겠느냐는 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지식인의 ‘건전한 상식’이라면 백과사전적인 정리 수준이면 족하다 싶어서, 오히려 만화나 평역서 또는 잘 정리된 2차 연구서가 더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싶었다. 도저히 남에게 권할 만한 수준의 책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읽게 된 세 번째 ‘고전’은 노자의 『도덕경』이다. 도덕경의 텍스트는 81문장 5000여 글자로 정리되어 있다. 한문과 대역 텍스트 자체만 보면 A4 용지로 30장 분량으로 끝난다. 대충 한글 번역문만 읽어 보면 그리 오래 걸릴 텍스트는 아니다.
다만 주역,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장자와 같은 한문 텍스트들은 단순히 대역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러 명의 주해가 병기되고, 그 주해에 기초해서 대역도 변하게 된다. 그것이 카논canon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이유였으며, 또한 과거라는 관료선발시험의 교재로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며, 30장짜리 텍스트가 300장으로 늘어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 더욱 파란만장한 이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그리하여 남에게는 뭐라고 말하면서 권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특히나 규범적인 한문 문법을 아득히 벗어나는 이들 고전들은 쉽사리 직역되지도 않기 때문에, 현대 역자가 만들어내는 ‘창조적 오역’의 세계로도 끌려들어갈 수 있다.
‘고전의 전형’이라고 하면 고대 그리스의 문헌들을 일컫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소포클레스의 그리스비극 또는 그리스신화는 서양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그 등장인물들과 내러티브를 모르고서는 서양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성경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텍스트이며,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그 못지 않은 텍스트가 된다. 마치 우리의 언어생활 구석구석에 고사성어로 박혀버린 논어나 맹자의 구문들처럼, 그 텍스트들은 서양의 언어생활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알고 있지 않으면 당최 맥락context을 잡아낼 수 없을 정도다. 어떤 방식으로든 맛을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드시 원전만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은희경의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의 표제작의 제목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구절,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word would smell as sweet.”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반드시 셰익스피어 시대 영어로 쓰인 영문희곡을 통해서 알아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저, “로미오와 줄리엣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나오는 영화 아니야?”라고 반문하는 수준은 벗어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