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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Feb 07. 2023

필사를 한다는 것

동네책방에서 필사모임을 여는 것에 대하여

 1. 『공산당선언』 영문판을 필사하다.

     

 백산서당의 『공산당선언』을 처음 만난 건 1994년 겨울이었다. 당시 청량리역 근처에는 성바오로병원이 있었는데,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만날 수 있는 조그만 서점이 있었다.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신기해서 사들고 올 정도였으니, 아마도 평대에 떡하니 놓여 있었을 테다. 그때 사들고 왔던 것이 백산서당에서 1989년에 출판한 남상일 역 『공산당선언』이었다. 영한대역이라서 꽤나 인기가 많았다. 다만 그 책과의 인연은 길지 않았다. 교도관이었던 아버지가 책장에 꽂혀 있던 걸 발견하시고는 갈기갈기 찢어서 분서(焚書)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앵겔스 지음. 남상일 옮김. 『공산당선언』. 서울: 백산서당. 1989.  

 작년 12월 7일부터 이 책의 영문 부분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지금 들고 있는 책은 대학 시절에 ‘훔친’ 책이다. 책배에는 ‘언론사 준비반’이라고 적혀 있으니, 아마도 졸업반 때 대출해서는 반납하지 않고 들고 있었던 것이리라.       


 굳이 필사를 시작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손글씨’의 문제였다.

 언제부턴가 노트북의 자판으로만 글을 쓰다 보니,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없어졌다. 기껏해야 막 갈겨쓰는 메모 정도밖에 남질 않아, 손글씨는 점점 괴상해졌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손글씨를 위해 몰스킨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곤 했었는데, 그걸 들추어본 여자친구가 “어른 글씨 같아서 멋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때 꽤나 으쓱했다, 막 써 내려가는 글씨는 언제나 괴발개발이기 마련이지만, 10년이 지나 평상시의 손글씨를 들여다보니 몹시 엉망이었다. 교정할 필요가 있다 싶을 지경이었다.

 오늘 필사 마지막 페이지의 글씨도 그리 깔끔하진 않다. 정성을 다해 글씨를 써 내려가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필사를 하는 어느 순간부터는 글씨가 조급함을 드러내게 된다. 본말이 전도되는 것이다.

A4 용지 두 장씩 해서 46페이지로 끝냈으니, 대략 23일 치. 베껴 쓰기 바빠서 여전히 글씨가 예뻐지진 않았다.

 둘째는 이 문헌을 좀 더 차근히 이해해 보자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이 저작에서 기억하는 문장은 딱 두 개밖에 없다.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the air, all that holy is profaned, and man is at last compelled to face with sober senses, his real conditions of real life, and his relations with his kind.”가 첫 번째고, 두 번째가 마지막 문장인 “Working Men of All Contries, Unite!”다. 앞엣것은 마샬 버만 Marshall Berman의 책 제목으로도 언급될 정도로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고, 뒤엣것은 “만국의 00이여, 단결하라!”는 문구로 곧잘 활용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이 둘 이외에도 충분히 기억해 둘 만한 좋은 문장들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막상 필사를 하다 보니, 영어 문장들이 참 간결하고 깔끔하구나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끝 페이지를 만나고 말았다.          



2. 왜 필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20여 년 전 학부생 시절에는 문학동아리에서 자주 놀았다. 남들은 하나같이 단편소설이나 시집을 필사했지만, 나는 결단코 거부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표절이 내재화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고, 무엇보다 손 아프게 베껴 쓰는 것 자체가 미련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많이 읽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입 밖으로 내뱉고 다녔으나, 그렇다고 대단히 부지런하 독서가였던 것도 아니라서 돼먹지 않은 공염불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필사를 하고 있다. 심지어 네이버 밴드의 미션까지 참여하고 있다. 2000년의 내가 이러고 있는 2023년의 나를 보았다면, “하... 저 꼰대 쓸데없는 짓 하고 자빠졌다”라고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필사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필사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번에 나는 한 번 할 때마다 A4 용지 두 장씩 해서 46페이지로 끝냈으니, 대략 23일 치가 된다. 글씨를 쓰는 손이 조금은 유연해진 느낌이 들지만, 여전히 빠르게 흘려 쓰는 글씨는 악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한 편이긴 하지만, 딱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대체 이 짓들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베껴 적는 행위가 의미가 있던 시기는 ‘필사본’으로밖에 책을 만들 수 없는 지식환경의 시기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필경사들이 정성스레 양피지에 필사본을 만들던 시기나 규방에서 언문서적을 교양행위로 필사하던 그 시기 말이다. 그 혼이 담긴 필치에는 옮겨 쓰며 내용을 이해하는 여유 같은 게 있을 수가 없고, 오로지 쓰기 바쁘다.      

 그렇다고 필사를 그만둘 것은 아니다. 이번엔 논어로 넘어갈 작정이다.   

      


3. 동네책방에서 필사모임을 여는 것에 대하여     


 팔로하고 있는 동네책방들에서 필사모임을 갖곤 한다.

 네이버 밴드를 이용해 각자 미션을 인증하는 방식도 있고, 함께 모여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타나면 필사노트에 옮겨 적어 공유하는 방식도 있고, ‘무식하게’ 모여 앉아(또는 줌으로 모여 앉아) 대놓고 베껴 쓰는 원형적인 방식도 있다.     


 나처럼 손글씨를 다시 써보는 습관을 좀 늘여보겠다는 단순하고 1차적인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네이버 밴드의 미션과 같은 방식으로 살짝 ‘과시’하는 정도로도 충분할 수 있다. 다만 매일 반복되는 습관을 소위 ‘리추얼’로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에는 더 다양한 욕망들이 녹아있기 때문에, 단순히 1회성 과시로만 끝내고 싶지 않기 마련이다. 이 다양한 층위의 욕망wants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소구needs로 전환해서 해결책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동네책방이 단순한 독서모임의 장소가 아니라 커뮤니티가 되어야 한다는 컨설팅의 대요가 거기에 맞닿는다. “읽지 않은 책에 관해 말하는 책모임”의 다양한 층위를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 모여 앉아서(또는 줌을 켜놓고), 각자의 책을 읽고 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떠들거나, 필사노트에 적어 놓고 돌려 본다는 행위를 고민해 볼 수 있다. 대교문화재단의 ‘빡독’ 프로그램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한 번 참여해 보고는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어서 다시는 거들떠보고 있지 않지만, 다들 나와 같을 리는 없다. 오히려 나 같은 꼰대들이 더 희귀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이 되건, 필사모임은 “읽고 쓰고 말하고 듣기”의 언어생활의 모든 기능이 녹아들어 간다.

 필사 대상인 텍스트를 옮겨 적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보는’ 행위가 선행해야 한다. 맥락을 이해하는 독해 과정이 아니라 단순히 문자를 확인하는 행위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개인적 체험으로는 그렇다.), 일단 ‘읽는다는 행위’로 간주하는 경우가 잦다. 독서량이 점점 감소하고 있는 요즈음에 이런 것들도 ‘독서 행위’라며 ‘푸시’해줄 필요가 있다. 좋은 건 좋은 거라서, ‘슬쩍 옆구리를 찔러줄 필요’가 있다.

 쓰는 행위도 두 가지 층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보통은 ‘자기 생각을 글로 정리한다’는 의미의 쓰기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캘리그래피처럼, 쓰는 행위 자체가 미학적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자기 손글씨 폰트로 만들면 대박이겠다'란 말이 나올 정도로 예쁜 손글씨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 이거 살살 추켜세워주는 방식의 모임 운영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모임에 나오는 이유는 '자기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라면 훨씬 질이 좋은 '강의'들이 많다. 굳이 모임에 나와서 남 이야기가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자, 이제 당신 이야기를 좀 해보세요'라며 자리를 깔아주는 것도 필요하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프로그램이 너무 과해 부담스러워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단순해서 재미가 없어도 안 되며, 너무 자유스러워서 자꾸 “째게” 해도 안 된다. 적당한 '넛지nudge'가 필요한데, 세상 어려운 게 바로 그 ‘적당’이라서 문제다.

 가장 자주 쓰이는 넛지는 참여비를 거둔 다음 미션에 성공할 경우 돌려주는 방식인데, 현금으로 받아 쿠폰으로 돌려주는 방식이 동네책방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될 듯하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단순한 칭찬 시스템에서부터, 합평을 통한 시상과 같은 물질적 보상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다만, 칭찬과 시상에서 번번이 좌절되는 ‘야망가’들의 분노는 눈치채기도 어렵고 해결하기도 어렵다는 게 가장 큰 함정이다. 우리는 인간이라서, 말짱한 얼굴로 속내를 감추는 거짓말을 숨 쉬듯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여 있다가 폭발해서 분출되는 분노는 상상 이상으로 파괴력을 갖는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갑작스럽기도 하거니와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라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한 선빵은 늘 KO 펀치가 되곤 한다. 대응방법이라면 부지런히 맷집을 키우는 수밖에 없는데, '개복치 수준의 쿠크다스 멘털'인 경우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룩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난감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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