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베트남 라이딩
라이딩 두 번째 날이다. 새벽에 눈을 떴다. 온몸이 쑤신다. 어제 무리한 탓이다. 속옷과 양말이 없어서 빨래를 하고 널었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강하게 틀어 놓은 탓인지 옷가지들이 대충 말랐다. 에어컨을 끄고 다시 잠들려고 했는데 뒤척이다 늦은 아침에 일어났다.
아내와 영상통화를 했다. 화면으로 본 내 얼굴이 많이 부어 보인다 했다. 햇볕에 드러난 팔이 화끈거린다. 선크림을 없이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닌 탓이다. 햇볕과 관련한 얘기를 못 들은 터라 꼼짝없이 미듀움(반쯤 구워진)채로 다니게 생겼다. 오늘 저녁엔 마사지라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메뉴로 베트남 샌드위치인 반미를 주문해놓고, 호텔 앞 호숫가에서 코끼리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다. 코끼리 두 마리가 호수 가운데 있는 작은 수초까지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우보천리라 했던가? 코끼리의 걸음은 그보다 더 조심스럽다. 코끼리가 코로 물을 끼얹으며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것까지 보았다. 모든 게 느려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멀리서 몰이꾼의 회초리가 슬쩍 보인 것만 빼면 말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코끼리가 있는 호수가에는 어제 본 돼지가 먹이를 찾아 나왔다. 돼지가 코로 먹이를 헤집을 동안 개 한 마리가 혀를 빼 물고 지나갔다. 이곳에서라면 일주일도 있을 수 있겠다.
아침밥으로 나온 반미는 계란 프라이와 오이 몇 조각, 토마토 몇 조각이 전부였다. 바게트 빵을 가르고 사이에 내용물을 끼워 먹는데 계란 노른자가 터져서 손가락 새로 흘렀다. 정말 간단한 아침식사다. 후식으로 베트남식 커피를 마시고 한가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 테이블에는 기념품 가게 아저씨가 3살 된 아이를 안고 있었고 주변에 아이의 할머니인듯한 여자가 어르고 있었다. 집에 있는 아이 생각이 나서 아이 손에 1 달러를 쥐어주었다. 순간 분위기가 아주 화목해졌다.
그리고 숙소 주인에게는 들고 다니던 <양반김>을 권해서 같이 먹어치웠다. 숙소 주인은 예의상 하나 먹어보더니 맛있다고 했다. 내가 계속 권하자 끝까지 다 먹었다. 아마도 손님에 대한 예의인 거 같다. 다음엔 내 담배를 권했다. 주인은 한 모금 피워 보고는 좋다고 했다. 나는 가방에서 한 갑을 꺼내서 선물로 줬다. 헤어질 때 그가 베트남어로 뭐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숙소 팁은 안 놓고 가면서 어먼 옆집 애에게 쓸데없는 돈을 주냐'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의 여행도 나름 즐겁다.
여기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이 거의 되지 않는다 관광객들이 오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마음은 통한다 우리가 출발하려고 하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내 손을 붙잡고 뭐라고 뭐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내 여행의 안정을 기원하는 말이라고 추측했다. 물론 세 살짜리 아이에게 1 달러를 주자 나에게 인사하던 할아버지의 손녀뻘 되는 아이 2명이 와서 나를 자꾸 바라보던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어쨌거나 한 가족 같은 베트남 사람들을 축복을 받으면서 출발했다
그리고 길가에서 해맑게 손을 흔들던 아이들과 끝없이 이어지는 신작로, 소 떼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린 소는 어미소 옆에 어미소는 수소 옆에 붙어서 소가족들끼리 행진한다. 또 큰 무리의 소떼를 데리고 개천을 건너는 소몰이꾼들을 보았다.
나도 작은 배에 탔다. 카우보이들도 소치는 막대기를 들고 같이 탔다. 카우보이들은 배에서 소리를 질러가며 소들을 배와 함께 건너 가게 하느라 야단이었다. 누렁개가 소를 몰고 강을 건너는데 부산했다. 그 와중에 암소에게 덤비는 발정 난 수컷도 있었다. 어디 가나 철없는 것들이 있다. 소몰이꾼들의 도하가 쉽지 않다.
길 양 옆으로 수수대와 벼가 익어 가고 있는 우리네 농촌 같은 길을 한참 달렸다. 가이드는 길가에 심어진 과실수와 다양한 식물들을 직접 보여주고 맛을 보여 주면서 생태 체험을 시켰다. 우리네 농촌과 비슷해서 생태체험으로 벤치마킹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가나 직업병이 도진다.
가이드 덕에 잔뜩 성난 치질처럼 생긴 캐슈너트 나무 열매와 코코넛 열매 그리고 후추나무를 알게 됐다 그리고 나비 떼가 도로에 환상적으로 날아다니는 마을을 지났다. 그리고 코코아 숲에서 달콤한.....
코코아 나무를 만져 보고 열매를 맛보았다. 흰 과육이 정말 달콤했다.
나는 자유롭게 라이딩을 하며 이런 생태 관광을 하는 것이 좋다. 내게 이런 체험을 시켜주는 가이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젊은 가이드는 결혼 한지 다섯 달밖에 안 됐다고 했다.
나는 여행 마지막 날,
수고료에 얹어서 신혼의 가이드 아내에게 편지를 써 보낼까도 생각했다.
그가 자주 휴대폰으로 뭔가를 하는 걸 보면,
집에 혼자 있을 아내를 위로하는 사랑의 메시지를 날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친밀감이 생기니 라이딩 도중에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별로 돈을 못 벌어서 각시가 투정을 부린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그의 결혼 생활이 원만히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베로니카'라는 세례명을 가진 그의 아내에게 줄 편지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휴게실에 들릴 때마다 한 문장씩, 나는 만난 적도 없는 베트남 신부에게 보낼 편지를 조금씩 써 내려갔다.
친애하는 베로니카
나는 박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남편과 나는 3일 동안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친절하고 배려가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 남편 덕분에 나는 베트남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실감 나게 느꼈고 착하고 친절한 그들의 모습에 감동받았습니다
또 다양한 종류의 나무 열매를 직접 맛볼 수 있던 것도 당신 남편 덕입니다.
당신의 남편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겠지요?
그에게 잘해주세요. 그 사람은 당신을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사람과 결혼한 당신은 행운아입니다.
또 이 사람과 같이 여행할 수 있었던 나도 행운아입니다
신혼기간 동안 이 좋은 남자를 내가 뺏어 가서 미안합니다.
당신은 남편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요?
당신의 세례명과 이름이 같은 나의 아내도 당신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작은 성의를 봉투에 담았습니다.
당신 덕분에 나는 휴식을 즐겼고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미스터 박으로부터
영작이 안 되는 내가 이렇게 까지 긴 문장을 쓰는 것은 노력이 필요했다. 한 문장씩 써 내려 가기 위해선 '장인의 정성'이 필요했다. 종종, 인터넷으로 사전을 찾아 보고, 번역기로 확인해가면서... 드디어 편지 글이 완성되자 어떤 성취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이제 편지지를 구해서 옮겨 적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라이딩이 끝나는 날, 그에게 이 편지를 전해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바이크를 타는 족족 우린 길가의 휴게실에서 쉬었다.
휴게실이라 해봤자 길가에 해먹 몇 개 쳐 놓을 뿐이다. 베트남식 휴게실에는 사탕수수를 압착기로 짜내는 기계와 콜라 등이 들어있는 냉장고가 있다.
해먹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마시는 사탕수수 주스는 정말 맛있었다.
우린 해먹에 누워 쉴 때마다 휴대폰을 꺼냈다. 테이블 건너편의 가이드도 열심히 아내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 같았다. 나도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위의 편지 글을 조금씩 썼다. 그가 핸드폰을 하며 가끔 미소를 지을 때마다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숲에서 따 먹었던 달콤한 코코아 맛이 생각났다.
휴게소 화장실을 가면서 우연히 그가 하는 걸 보았다. 그런데 뭔가에 열심히 하는 게 신혼의 아내에게 메신저를 보내는 게 아니었다.
'그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순간, 그에 대한 신뢰가 엄청 떨어졌다. 그러고 보면 쉴 때마다 그가 짬짬이 했던 것들이 모두 게임이었나 보다. 어제 숙소에서 일찍 헤어진 것도 게임하려고 그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가이드의 아내가 내가 쓴 편지를 보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또, 가이드는 얼마나 으쓱할 것인가? 생각하며,
나 혼자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다.
바로 출발하자고 하니, 그는 게임이 안 끝났는지 조금 기다리라고 한다.
나는 서두르라고 했다.
흥! 내 맘도 몰라주고... 이제부터는 너와 난, 고용주와 가이드다
점심은 길가의 허름한 식당에서 먹었다.
볶음밥과 닭튀김 몇 개 올려 놓은 것이 전부다. 구석에서 낡은 대형 선풍기가 더운 바람을 보내서 간신히 파리를 쫓고 있었다.
나는 부실한 점심식사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묵묵히 꺼끌한 밥을 먹고 있는데, 바이크 세 대가 주차하더니 독일인 모녀가 가이드 한 명을 대동하고 왔다. 이지라이더들이 즐겨 들리는 식당인가 보다.
가이드 끼리 아는 체한다. 그런데 독일팀은 여기서 밥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닭 튀김 볶음밥' 먹는 것을 구경하더니, 닭 튀김 몇개를 포장 하고선 바이크에 시동을 걸어서 출발했다. 나는 독일인 모녀는 분명 괜찮은 곳에서 식사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나의 계약 조건이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점점 기분이 심란해진다. 이게 다 게임 때문이다.
오후 라이딩은 힘들었다. 햇볕도 강렬하고 길도 안 좋아서 엉덩이가 아플 지경이다. 주변에 쓰레기매립장이 있는 곳을 지났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 나는 어젯밤에 잠도 못 자서 피곤한 데다가 기분도 안 좋아서 점점 짜증이 나려고 했다. 이게 다 가이드의 게임중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신혼을 혼자 보내는 가이드의 아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문득 살림에 지쳐 십 수년을 살아버린 주부로 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짜증이 나고 그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어 졌다.
오후에 열심히 달려서 간 곳은 이 근처에서 유명한 폭포다. 그런데 크기만 컸을 뿐이지 어제 본 것보다는 못 했다. 어제 폭포는 규모는 작았지만 뭔가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있었다.
가이드는 나 혼자 폭포로 보내고 자기는 입구 카페에 앉아서 기다린다고 했다. 나의 심통을 눈치챘나 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예상이 되었다. 분명 아까 나 때문에 못한 게임을 마저 하려는 게지....
나 혼자 폭포로 찾아 갔다.
폭포 근처엔 앉아 있을 만한 곳도 없고 해서 폭포 아래 나무다리 아래서 쉬기로 했다. 그런데 나무다리를 건널수록 아슬아슬한 것이 장난이 아니다. 심지어 나무판자가 몇 개는 큰 구멍이 나 있거나 훼손되어 있었다. 흔들림마저 있어서 짜릿했다.
다리 주변에는 중학생 또래의 아이들이 와서 놀고 있었다 벌써 맥주를 먹는 남자아이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베로니카와 통화를 했는데 오늘 부모님 댁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 목소리 듣고 싶었는데 나와 대화를 하기 싫어하는지 별 말 없이 끝는다.
나는 딸아이가 클수록 내 곁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서 우울해졌다
폭포 근처는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고기를 굽고 즐겁게 놀고 있었다. 평범한 이 작은 유원지의 평화로운 오후를 나는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쓸쓸해졌다.
폭포 아래 바위에 걸터 앉아 탁족을 하며 필리핀 형이 쓴 메일을 읽었다.
'건강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격려다. 그러나 나는 피곤해서 건강도 자신할 수 없었다. 시간이 갑자기 너무 느리게 간다.
탁족을 끝내고 가이드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예상대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와 별 말 없이 쉬지 않고 달렸다. 갑자기 미사를 드리고 싶어졌다. 가이드는 내 기분을 살피고는 내 말대로 하기로 했다. 계획을 수정해서 성당이 있는 인근 도시로 왔다. 오늘 밤은 도시의 호텔에서 잘 것이다.
호텔에 들어가 보니 베트남에서, 아니 내가 지금까지 봤던 최악이다. 호텔이 아니라 숙소라고 불러야겠다. 심지어 호찌민에서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가 더 낫다.
점심부터 시작된 가이드에 대한 짜증이 폭발 직전이다. 먹는 거나 자는 것이 다 이런 식이다.
아마도 '이지라이딩'은 오토바이를 가진 개인업자들의 연합 형태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계약금으로 낸 돈은 클럽이 갖고, 출발하면서 지불한 금액은 그에게 돌아가는 형태....
그래서 경비에서 남은 금액이 그의 몫이다 보니 먹는 것과 자는 비용을 최대한 아끼려는 것이다. 가성비가 엄청 떨어진다. 물론 현지인과의 삶을 맛볼 수 있지 몰라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코끼리 목욕 풍경에서 보았던 평화가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우울하다..
호텔 체크인이 끝나자 그가 미사 시간을 보여 주었다. 나는 바로 4시 미사를 드리고 쉬고 싶었는데, 그는 피곤하다며 7시 미사를 드리자고 한다. 수압이 형편없는 샤워기 아래서 간단히 몸을 씻고 근처 마사지샵을 찾기로 했다. 카운터에서 주인에게 물어보니 잘 모른다고 했다. 구글링 해서 인근의 스파를 찾아갔는데 문을 닫았다. 그래서 숙소 반대쪽으로 다시 걸어가서 물어보니 베트남에서 스파는 여성 미용 전문이란다.
나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구글맵을 의지해서 마사지 원정길에 오르기로 했다. 가다 보니 반가운 글자가 보인다. 이름은 '마사지 호텔'. '아 마사지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해서 1층 로비로 들어가니 안내원이 5층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어라? 그때부터 뭔가 좀 이상했다.
5층에 올라가니 가격표가 있었는데 250동 자리는 없고 350동과 550동짜리만 한다고 했다. 이건 좀 이상하다 호찌민보다 더 비싸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괜찮다며 나오려고 하자 대기실 의자에 있던 건장한 청년 두 명이 덩달아 일어난다. 좀 무서워졌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급하게 눌렀다.
미스터리 호텔에서 나와서 다른 곳을 찾아다녔다. '스파'라고 쓰여 있는 곳은 모두 여성 얼굴 마사지만 하는 곳이다. 1시간 동안 거리를 걸었는데 아무 소득 없이 호텔, 아니 숙소로 돌아왔다
호텔 로비에는 가이드가 앉아서 예의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야 너 피곤해서 저녁 미사 가자고 했잖아' 하는 말이 튀어나오려 했다.
'아~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미워하다니... 저녁에 성당 가서 참회해야겠다.'
황량한 침대에 누워서 오전에 갔던 코코아 숲을 생각했다. 바짝 마른 코코아 낙엽 위에 코코아 열매 하나가 툭, 떨어지듯 잠이 들었다.
그가 곧 깨울 텐데.....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잠이 왔다. 너무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