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첫날 오후 일정으로 남베트남 대통령 궁이었던 통일궁과 전쟁 유물 기념관을 선택했다. 시작은 좋았다. 숙소가 있는 게스트하우스 골목의 인도식 식당에서 달과 난을 먹었다. 결혼 전 인도 여행에서 주야장천 먹었던 인도식 백반이다. 손님 중에 인도인들이 많아서 그들처럼 나도 손을 사용했다. 따라 하기!
인도인들은 반주를 곁들인 밥을 먹으면서 담배를 태웠다. 예전 인도 여행 시절이 생각났다. 추억의 음식은 나를 20년 전으로 되돌려 놓는다. 나도 애피타이저로 나온 당근과 양파 썰어 놓은 것에 곁들여 밥을 먹으며 담배를 태웠다.
그런데 잠시 후 인도인 가족이 들어왔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대가족이다. 해외여행을 할 정도면 인도에서 넉넉한 가정일 것이다. 여자는 주인을 불러 실내 흡연에 항의했고, 주인은 흡연자들에게 당부했다. 새로 들어온 여자는 아이들에게 휴대폰을 보여주는 대신 이야기를 해 줬다. 인도식 교육은 이야기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떠 올리게 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숙소 앞 골목을 나와 통일궁으로 가기 위해서 오토바이 택시를 탔다.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니 우리 돈 2천5백 원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오토바이 택시 기사와 흥정을 했고 합의한 금액대로 가기로 했다.
스쿠터 운전사는 장인어른쯤 되는 나이에 배가 볼록 나왔다. 그의 등 뒤에 매미처럼 붙어 있으니 땀 냄새가 물씬 났다. 나는 그의 불룩 나온 배를 잡느라, 여권과 지갑이 든 내 손가방을 보호하느라 애썼다. 여행 와서 사람의 땀 냄새를 맡으니 괜히 이 거리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거리의 오토바이는 많았고 운전자는 자주 급정거를 했다. 무심코 앞쪽 자가용과 접촉사고가 났다. 여자운전사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오토바이 기사와 운전자는 아무 일 없듯이 제 갈 길을 갔다. 이국에서의 실랑이를 걱정했던 게 좀 무안해졌다.
통일궁은 베트남 통일 전까지 남베트남 대통령 등으로 쓰였다. 공군 장교가 폭격기를 몰고 와서 자신의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할 정도로 당시 베트남은 부패가 만연했다. 통일궁의 넓은 정원에는 북베트남 탱크 두 대와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건물 앞에는 기념행사 준비를 위해 무대 설치로 바빴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서 회담장으로 쓰인 몇 개의 넓은 방 보았으나 별 다른 감흥은 없었다.
통일궁을 나와 인근에 있는 전쟁 유물 전시관까지 걸어갔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사진 패널과 전쟁 도구들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이것을 박물관 전시 콘셉트와 연관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추진위원으로 떠오른 사람도 몇 있었다. 상해에서 처럼 아직도 나는 회사에서 출장나 온 것처럼 여행하고 있었다.
전쟁유물박물관에 왔다. 호찌민에 왔다면 꼭 찾아가야 할 곳이다.
베트남전의 기록과 희생의 역사를 전시해놓았다..
시신들이 무슨 고깃덩이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베트남전에 참여한 국가의 여권을 가진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없다.
신문에 난 유명한 사진도 보았다. 어린아이가 자신보다 더 어린 자신의 동생을 안고 길에 엎드려 있는 사진...
코로나가 다시 유행이 된 것도 인간의 욕망이듯이... 이 비극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베트남 아이들이 그린 그림도 보았다. 전쟁의 참상을 이겨내려는 평화의 그림들 앞에서 한참 머물렀다.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 어쩌면 나의 실업이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위협하는 수도 있다.
내 아이들은 커서 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실업이란 때로 전쟁보다 더 큰 충격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세상의 폭력에 맞서지 못하고 이렇게 먼 타향에 쫓겨와서 먹고살 궁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건 아니다. 나는 이번 여행을 잘 못 시작하고 있다. 전쟁 유물박물관에서 타인의 고통을 애도하기보다 나 사는 방법만 궁리하는 나의 속물근성을 발견했다 어쩌면 내가 아내와 떨어져서 이 먼 곳에 있는 것도 내가 속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상에 공감하기보다 내 생각에만 빠져 있는 이런 그런 생각 가지고 진짜가 될 리 없다 진짜가 나올 리 없다
전쟁유물박물관에서 나와 호찌민시 박물관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갔으나 구글 정보와 달리 문을 닫아서 벤탄시장까지 갔다.
벤탄시장 입구에서 다리 마사지를 했다. 가격은 22만 동. 나를 담당한 청년은 한국어를 떠듬떠듬했다. 손길이 서툴다. 마사지 초보다. 나는 한국에서 한국어 선생이었다는 말을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와 간단한 대화를 하고 가족들에게 보이스톡으로 전화했다. 양가 부모님들은 모두 건강하게 있으라는 얘기뿐이다.
어설픈 마사지가 끝나고 계산을 하는데 역시 헷갈렸다. 캐셔가 나머지를 팁으로 주라 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러자 청년이 너무 고마워하며 휴대폰으로 번역한 문자를 찍어 보여 주었다. 그가 보여준 것은 ''나는 네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미투'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시장으로 들어가 슬리퍼를 샀다. 20만 동. 한국 돈 만원이다. 현지화의 시작이다.
집까지 걸어오면서 저녁을 먹을 곳을 찾았다. 벤탄시장은 방콕의 짜뚜짝 시장처럼 안에는 기념품 가게들이 있고, 바깥쪽은 로컬 식당이 있다. 식당 종업원들이 '오빠. 오빠'하면서 나를 잡았지만 새로 산 슬리퍼를 신고 나는 쉽게 지나쳤다. 아직 배고프지 않았고. 무엇보다 답답한 시장 안에서 먹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BBQ 프로모션 한다는 광고를 보고 들어갔다. 가격도 비싼 편이고 혼자서 숯불구이를 먹는다는 게 내키지 않는다. 좀 더 공원 쪽으로 걸어가자 일본 식당이 나왔다. 늙은 일본인 주방장이 반겨했다.
일식에서 주로 먹는 초밥과 가츠동을 시켰다.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 메뉴인 인도식과 일식은 예전 인도 여행할 때 먹었던 콘셉트이다. 취향을 따라가는 걸까? 인도 여행을 했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이 비슷하다. 그때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갈 곳 없던 시절. 연애도 잘 안되고 해서 무작정 떠난 곳이 인도였다. 이번 베트남 여행도 마찬가지. 계획도 없이 왔다.
일본 식당에서는 일 때문에 오는 일본 손님들이 많았다. 처음엔 나를 일본인으로 알고 친절히 '이랏샤이 마세' 하며 인사했다. 저녁을 먹고 나자 하루의 일정이 끝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샤워젤을 사고, 붕어싸만코가 있길래 사 먹었다. 길은 어두워지고 통행량이 많아졌다. 숙소로 가는 길을 잘 못 들어서 길에서 좀 헤맸다. 땀이 흘렀고 나는 오토바이 무대가 해일처럼 몰려오는 거리를 몇 번이나 잘못 건너며 빨리 나의 숙소가 나타나길 바랐다. 도중에 집에게 전화가 왔고 주위가 시끄러워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한국 시간으로는 밤 10시. 숙소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샤워를 했다. 물이 미지근했다. 페이스 톡을 했는데 화면으로 본 아내가 예뻤다.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