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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에 Apr 12. 2020

끊임없는 생산과 끊임없는 폐기

일을 하긴 했는데요, 뭐가 없어요.

회사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스타트업에서는 작은 회사가 쑥쑥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 별다른 회의실도 없던 자그마한 사무실이 높은 건물의 층수로 이사를 가고, 멤버를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던 과거에서 넓은 사무실에 사람들이 차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빠르게 성장하고 또 변화했구나를 느끼게 된다. 


나는 임원진을 제외하고 입사순서가 아주 빠른 편에 속했던 터라(아마 세 번째였나 그랬을 거다.) 그렇게 성장하는 광경을 직접 체험하며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말도 안 되는 연차에 팀장이란 직책도 경험을 해보았고 좀 더 거시적인 방향으로 회사를 보는 기회도 얻었다. 회사가 하는 것, 내가 하는 것들 모두 새로웠고 우리가 가는 길이 곧 선구자인 분야. IT 스타트업은 그런 면에서 참 매력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어떤 하나의 서비스나 프로덕트에서 출발한다. 대게 창업 멤버들이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해서 시작하고 그것이 사회나 투자자들의 인정을 받고 나아가 소비자들에게 인지되며 커지는 것이다.(또는 반대로 소비자에게 먼저 인지되어 유명해지고 사회나 투자의 인정을 받거나.) 그런데 우리는 조금 달랐다. 어떤 명확한 서비스나 프로덕트가 없었다. 물론 아주 초기에 회사를 설립할 때는 있었으나 사업이 진행되고 여러 사람을 고용하게 되면서 점차 방향을 바꾸게 되었고 그것이 고착화되며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 케이스였다. 그렇다 보니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어쩌면 대부분의 스타트업에서는 겪게 되지 않을 일일지도 모른다. 조금 크게 보면 닮아있긴 하겠지만. 바로 제목에 써두었던 것처럼 끊임없이 만들고 끊임없이 폐기했던 일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다. 물론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꼭 성공을 보장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구성원에겐 위로가 되었다. 투자를 위해서, 아니면 사업을 따내기 위해서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마감일이 정해져 있었고 많은 이들이 그 프로젝트를 위해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개발했다. 큰 주제로는 비슷한 프로젝트였지만 사용처나 클라이언트가 모두 달랐기 때문에 결국 할 때마다 새로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개발해야 했다.


초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연스럽게 우리는 스타트업이었으므로 고정된 프로덕트가 그럴듯하게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입사하는 모두가 '스타트업'인 것을 고려해 입사했고 으쌰 으쌰 하며 열심히 만들어서 대표 프로덕트를 만들어보자! 하는 의지도 있었다. 임원진과 구성원들의 관계는 아주 가까웠으며 비교적 젊은 나이대로 자유롭게 의견을 공유하고 발전시켰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흐르고 1, 2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가 있었는지. 대부분은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되겠지 하는 낙천적인 생각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실패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누군가는 '이번에는 될 거야.' 하는 긍정적인 말로 활기를 불어넣었지만 이미 숱한 실패를 맛본 사람들의 사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진행시키는 것에 상당히 즐거움을 느끼는 편이었지만 점점 걱정이 됐다. 2년이 되어가고 그 사이에 수많은 화면들을 만들고 개발로 넘겼지만 실제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냉혹할진 모르지만 고용시장이나 사회에선 '결과물'을 중요시했다. 과정 역시 중요하지만 결과물이 없으면 반쪽에 불과했다. 내게 결과물로 눈에 보이고 손으로 집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회사소개서나 IR자료, 컨퍼런스 브로셔나 사진 같은 것들 뿐이었다. 내가 UXUI 디자이너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슬퍼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당연히 사업은 마음처럼 되지 않고 타다의 경우처럼 잘 되던 서비스도 외부적 요인으로 덜컥거리기 일쑤다. 막연히 개인의 생각으로 시작한 회사일지라도 어느새 공동체를 이루고 있고, 임원진들에겐 임금을 줘야 하는 책임이 생긴다. 더욱이 내가 좋다고 생각한 아이디어라 할지라도 시장의 반응은 녹록지 않을 수 있고, 여러 상황이 맞물리며 살아남기 위해 방향을 틀어야 하는 상황도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해와 다른 측면으로 나는 아주 극 초기 스타트업으로 취직하거나 이직하려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그 서비스에 대한 확신이 분명한지 생각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스타트업이 가지는 수많은 장점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초기 스타트업에 합류하려거든 운영진뿐만 아니라 합류하는 자신 역시 제공하고 있는 서비스나 프로덕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확신할 수 있는지 반문해야 한다.


완벽하게 익히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비스 카테고리나 프로덕트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쉽게 휘둘리게 된다.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은 시시때때로 바뀌고 일은 하고 중간 결과물도 나온 것 같은데 실제로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루에 8~9시간을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어떤 걸 만드셨어요?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게 되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특히 개발과 긴밀하게 물려있는 디지털 프로덕트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끊임없이 만들고 끊임없이 폐기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스타트업에서 아주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구성원들의 사기저하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보아온 입장에서 미리 알려주고 싶었다. 마냥 자유로운 분위기와 수평적인 조직원들에 덜컥 반하기보다 내가 얼마나 그 프로덕트에 자신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UXUI디자이너가 이직하는 데에 있어서도 실제 프로덕트를 출시해보았냐 그렇지 않냐의 차이는 꽤 크다. 아무리 사용성과 시나리오를 잘 고려해 디자인했다 하더라도 실제 출시 이후 터지는 문제나 이후 관리하는 측면에서 배우는 것도 크고, 화면이 디자인대로 나오지 않았을 때 개발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것도 다르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 사용자들이 한 명이라도 있어 UX 측면을 확인하고 개선시킬 수 있냐 없냐 하는 부분도 프로덕트 출시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출시하지 않으면 알아볼 사용자가 0명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생각하고 무언가를 만들 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이지만 시간은 한정적이다. 열정은 무한하지 않다. 시간도 열정도 고갈되었을 때 완벽하지 않아도, 어찌 되었든 세상 밖으로 빛을 본 결과물 하나라도 있으면 내가 들인 노력과 열정을 증명받을 수 있다.


이렇게 프로덕트가 실제로 나오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혹여나 그 과정 중이라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 놓여있는 분이라면 회사와 자신을 조금 분리해두라 말해주고 싶다. 결과물이 나오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수많은 이해관계와 상황들 틈에 엎어진 것일 뿐이다. 나는 비교적 회사와 나를 잘 분리하는 타입이라 스트레스가 덜했지만 구성원 중 몇몇은 회사와 본인을 긴밀하게 느끼는 성향 탓에 크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봤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말은 했지만 그 무기력에서 바로 꺼내 줄 만큼의 큰 위로가 되지는 않은 듯했다.


낭만적인 조언은 그렇고, 현실적인 조언으로는 스터디나 외부활동을 하면서 다른 프로덕트도 만들고 출시해보라고 해주고 싶다. 회사에서 모든 것을 찾고 충족시킬 필요는 없다. 회사 역시 내가 일하는 곳이라는 일부분이고 그 안에서 채울 수 없는 것들은 밖에서 채우면 그만이다.


스타트업이라는 각박한 환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쉽사리 뛰어들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운 좋게도 큰 문제없이 지내왔지만 누군가에게 스타트업 환경은 굉장히 치명적일 수 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되 내가 목표하는 것은 분명해야 한다. 


회사 속의 내가 아니라 나의 일부가 속해있는 회사로 생각하고 지내시라 권하고 싶다. 나의 일부가 속해있으므로 어찌 되었든 스트레스나 타격은 입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해있는 크기와 방향이 어떤지에 따라 회복 속도에도 차이를 보이고 후에 더 나은 환경으로 도약하는 것도 쉬워진다.


스타트업의 장점이 정말 많이 조명받는 시대인 것 같다. 각박하고 숨 막히는 규율보다 워라밸을 중시하고 설령 돈을 조금 덜 벌더라도 내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정말 좋은 일이지만 내가 스타트업 환경으로 뛰어드는 순간이라면 그 토대가 굉장히 불안정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알아주셨으면 한다. 어느 것에나 장단점이 있고 사람에 따라 그 크기는 달라질 수 있으므로.





표지 사진 Photo by Kate Trysh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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