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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디브라운 Sep 08. 2018

주말엔 강릉으로 : 쉬어가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

새 직장에 입사한 지 2주 째, 하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어지간히 피곤이 누적된 듯 몸이 무거웠다. 일상에서 벗어나니 긴장이 풀렸는지 낮잠이 몰려왔다. 물리칠 이유가 없지. 물론 숙소에는 이제 막 도착했지만.

헛웃음이 나올 만큼 더웠던 여름이 지나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불지옥, 2018년 여름이 드디어 드디어. 정신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일 만큼 숨 막히고 괴로운 여름이었다.


그 와중에도 강릉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숨가쁜 일상을 보내면서, 생각만 하다가 조금 짬이 생겨서 주말을 강릉에서 보내기로 했다.

평소처럼 상봉역에 도착했는데, 풍경이 평소와 다르다. 그러게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이미 시간이 좀 흘러버렸지만, 때는 바야흐로 휴가철이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KTX에 오르니, 이건 더 낯선 풍경이다. '나 오늘 바다 가요' 온몸으로 말하는 차림들. 심지어 입석으로 가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텐션이 높았다. 그 와중에, 나만 지나치게 일상복 차림이다. 여기에 노트북까지 옆구리에 끼고 있으니 더 센티해진다. 아- 선글라스라도 끼고 올 걸 그랬어.



강릉역에 도착하니 이런 진풍경이 있나. 휴가철의 강릉역은 이런 분위기구나. 어른이고 아이고, 북적북적 사람이 넘쳐난다. 서둘러 역을 빠져나왔다. 이번 강릉도 포남동에 머물기로 했다. 숙소에 가기 전 뭐라도 사 가고 싶어서 검색창에 강릉 마카롱을 검색했다. 밖으로 나온 지 몇 분밖에 안됐는데 벌써 이마에 땀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강릉까지 와서 마카롱이라니, 분명 더 괜찮은 게 있을 거란 걸 알지만 적극적으로 뭔가를 찾기엔 역부족이다. 이미 머리가 멍하다. 더워서 그래. 이놈의 더위, 더위가 문제야. 시내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교보생명 앞에서 내렸다. 본격적으로 위치를 검색하려고 핸드폰을 켜는데, 그만 툭-하고 꺼진다. 강릉 오면서 핸드폰 충전도 안 해오는 사람, 나야 나. 이것도 더워서 그래, 다 더위 탓이다.


낯선 곳에서 핸드폰이 꺼져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어! 더위에 절어 좀처럼 집중되지 않는 마음을 추스르며 주변을 둘러보니, 세상에나 아는 길이다. 오 저기 맥도널드 보이고, 그렇다면 맞은편은 신영 극장!



몇 번와봤다고, 강릉은 더 이상 내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또 금세, 땀이 솟기 시작했다. 노트북에 짐 가방에 어깨도 아프고, 핸드폰은 꺼졌고, 마카롱 집은 어느 쪽인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겠으니 일단 아는 곳으로 가자 싶어 극장으로 올라갔다.

시끌시끌한 강릉역, 버글버글 사람 많은 강릉 시내, 모두 낯설었다. 휴가철의 강릉은 처음이라.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길에서 벗어나 신영 극장으로 들어왔다. 영화를 보려는 계획은 전혀 없었다. 핸드폰 충전이나 좀 하고, 땀도 좀 식히고.


영화관에 들어섰는데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여긴 여전하네. 매표소에 앉아계신 분과 눈이 마주쳤다. 그냥 나가긴 틀린 것 같다. 그대로 매표소로 걸어갔다. "지금 몇 시예요?" 상영표를 봤더니, 1분 후에 영화가 시작한다. 들어본 적도 없는 영화지만 상관없다. 쉬어가자. 물론 강릉에는 지금 방금 도착했지만.



<너와 극장에서> 서울독립영화제 2017년 개막작이란다. 이런 타이틀이 붙어 있지 않았대도 좀비가 나오는 공포영화만 아니면 괜찮았다. 상영관 역시, 영화관 로비처럼 아무도 없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대강 눌러 닦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푹 눌러 기댔다. 몸이 의자 속으로 깊이 파묻힌다. 아, 쉬어가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지루할 틈 없이 3편의 단편 영화가 이어졌다. '짧은 걸로 딱 한 편만 더 봤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 만큼 영화는 순식간에 끝이 났고 앉은 의자는 편안했고, 또 극장 안은 시원했다. 내가 유일한 손님이니 더 밍기적거리기도 어려워 짐을 챙기고 <너와 극장에서>의 팸플릿을 집어 들고 영화관을 나왔다. 팸플릿에 적힌 한 줄,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당신에게 극장은 어떤 곳인가요?"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닌데, 신기하게도 강릉에 오면 거의 영화관에 들르게 된다. 질문을 바꿔봐야겠다.

"나에게 강릉의 극장은 어떤 곳인가요?"



극장에서 잘 쉬어간 덕에, 무사히 마카롱을 사서 포남동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호스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늘은 뭘 할 거냐는 물음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뭘 할지 아무 것도 생각한 것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왔다. 짐을 대강 풀고, 시원하게 씻고,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새 직장에 입사한 지 2주 째, 하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어지간히 피곤이 누적된 듯 몸이 무거웠다. 일상에서 벗어나니 긴장이 풀렸는지 낮잠이 몰려왔다. 물리칠 이유가 없지. 물론 숙소에는 이제 막 도착했지만.



눈을 떠보니 3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씻고 눕자마자 몸이 침대 속으로 풍덩 빠진 듯, 허우적허우적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아, 쉬어가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휘휘 감아 이불 안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이 짜릿함이 얼마 만이던가. 더 자라고 하면, 다음 날 아침까지 잘 수 있겠지만 저녁을 먹어야 하니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카페에 가서 커피도 한잔 마시고 다시 숙소로 들어왔다. 이제는 또, 잘 일만 남았다. 



내내 강릉에 오고 싶었던 것 같다.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고, 반가운 사람들을 잠시 만나면 그만인 하루를 보낼 참이었다. 피곤한 일상 사이의, 강릉에서 보내는 주말이 꿈같이 달큰해서 자주 자주 마음을 내려놓고 쉬어 갔다.




질문을 또 바꿔봐야겠다. "나에게 강릉은 어떤 곳인가요?"

이번에는 대답까지. '아, 쉬어가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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