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역시 일찌감치 시작했다. 숙소의 커다란 흑판을 가득 채운 방명록은 온통 행복한 이야기들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떠나 온 사람들이, 있는 힘껏 행복해지고픈 마음으로 만났으니 행복하지 않을 것도 없겠지. 뭐 어쨌든, 모두는 이 곳에서 행복했다고 한다. 크.
완벽한 날들, 정말 근사한 제목이잖아.
무료로 제공되는 조식을 챙겨 먹었다.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 먹으며, 《완벽한 날들》을 펴 들었다.
우리 삶의 양식은 우리를 보여준다. 우리의 습관은 우리를 평가한다. 우리가 습관과 벌이는 싸움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꿈들을 말해준다.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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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의 사람들이 하나 둘 공용 공간으로 나오기 시작해서, 나는 아에 밖으로 나와버렸다. 오늘도 우중충, 비가 오락가락이다. 거의 그친거 같긴 하지만 불안하니 우산을 챙겼다.
완벽한 날들.
보이는 것 만큼 깨끗하고, 분위기가 아늑하다. 서점과 게스트하우스가 같이 있다는 건 얼마나 꿀인지.
화요일은 서점 정기휴일이다. 정기 휴일이 아니었으면 오늘도 내내 서점 근처를 배회했을지 모른는데, 절묘하다. 나갈 수 밖에 없다 오늘은.
골목 골목을 가로질러, 이제는 굳이 지도를 꺼내지 않아도 동아서점은 그냥 찾아갈 수 있다.
마치 아는 길을 걷듯, 시장 방향으로 쭉 걷는다.
시장 초입에서 옥수수를 발견했다. 옥수수 진짜 좋아. 두 개에 삼천원. 강원도 옥수수니 뭐 맛이야 끝내주겠지. 좋다 좋아.
길 옆으로 난 풍경이 예쁘다. 내가 사랑하는 소박한 풍경, 그리고 담장 아래로 누가 가꾸지 않는 꽃들이 한가득.
잎에 맺힌 물방울이 싱그럽다, 참으로 참으로.
예쁜 색의 건물이 나오면 자동으로 반응. 우중충한 날씨 탓에, 쨍한 색이 더욱 선명하니 예쁘다.
사람 다니는 길가까지, 뭘 잔뜩 심은 화분은 내놓은 할머니는 아침상을 위해 상추를 따고 고추를 따신다. 저 아침 밥상 얼마나 맛있을꼬.
말해 무엇하오, 초록은 사랑.
방금 전까지도 한 방울씩 톡톡 떨어지던 빗방울은 완전히 멈췄다. 비가 막 그친 공기는 맑고 신선하고 눅눅하고 상쾌했다.
자연을 만끽하며. 사방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지만, 비 온뒤라 시야가 선명해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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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첫 코스는, 동아서점이다.
오랜만인데도 또 좋다. 언제나 그랬듯 좋다.
반가운 글씨들을 눈으로 훑으며.
집요하게 구석 구석을 훑는다. 몇 개월만에, 여전히 비슷한 듯 어디 달라진 게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가며 살살 돌아다녔다. 여전해서 좋다. 저기 카운터에 멀찌감치 아버지 사장님과 아들 사장님도 여전해서 좋다.
정성들여 그린 그림. 이런걸 소중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랑은, 역시 완전히 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 사랑스러워라.
'말들의 풍경'코너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좀처럼 이 앞을 떠나질 못했다. 어쩜 이렇게 정성껏 자기의 공간을 가꿀까나. 정성이 들어간 장소는, 나도 역시 정성껏 살피고 싶은 법이다.
아침의 고요한 서점을 들러본 사람은 알겠지. 온전히 공간을 독차지 하는 그 행복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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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들른터라 마음껏누리고 읽고 싶었던 책을 한 권 구입하고, 선물하고픈 책을 한 권 더 골라 계산대에 갔다. 감사히도 언젠가부터, 사장님은 일년에 한 두번 갈까 말까하는 손님을 알은체를 해주신다. 안경을 쓰고 와서몰라봤다며, 아이코. 그러고보니 안경을 쓰고 들른 건 처음인가보다. 사장님이 컵을 하나 챙겨주셨다. 감사히 받았다. 작년 도서전에도 그렇고, 뭐라도 챙겨주려 해주시는게 감사하다. 내 마음이 이러니, 상대도 비슷할 것 같다. 언젠가부터 속초에 가면 서점을 잊지 않고 알은체를 하러 들르는 손님이 고마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정성껏 가꾼 공간을 정성껏 누리러 가는 거다. 그건 참 좋은 기분이니까. 여행지에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역시. 들르길 잘했다. 사장님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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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희 작가님의 책에 실린 동아서점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기분 좋다. 기분 좋은 글이라 발췌해본다. 이전에도 했을지 모르지만.
"거리의 서점이 그 거리에 얼마나 따뜻하고 멋진 색채를 더해주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서점이 사라지면 이 거리가 얼마나 삭막해질지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서점에 들를 때면 사진을 찍는 대신 책을 산다. 다행히 이 서점은 애써 책을 사야만 하는 곳은 아니다. 이 서점에 들어가면, 반드시 책을 사고 싶어진다. (...) 나는 언제나 동아서점에서 나를 위한 한 권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한 권, 그렇게 두 권의 책을 산다. 내 돈을 내고 내가 책을 사는데도 고맙다는 기분이 절로 든다."
p241, <속초- 적금통장의 낭만적인 규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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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똑같이 그리 해봤다. 나를 위한 한 권,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한 권. 그리고 공감한다. 동아서점이 있어 속초가 나에겐 얼마나 그리운 곳이 되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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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좀 사서 버스를 타러 갔다. 눈 앞에서 타야할 버스를 놓쳤다. 여긴 서울이 아니라구. 서둘러 다음 버스를 검색해보니 도착 예정 버스가 뜨질 않는다. 그러면 그렇지. 택시를 탈까 하다가 호방한 마음을 품는다. 뚜벅이의 지방 여행이 잦아질수록 버스 배차 시간에 관대해진다. 실제로 급할 것도 없고, 어차피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가서도 책을 읽을 예정. 여기 앉아 책 좀 읽으며 기다리지 뭐. 옥수수 반개를 물고 책장을 넘기며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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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버스 기다리기 좋은 날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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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이 빨갛고 주근깨가 잔뜩 난 여학생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누가봐도 시골 햇빛에 탄 얼굴, 자연 그대로다. 투명하게 하얀 얼굴 위로 하얗게 더더 하얗게 분칠을 하고. 안그래도 예쁜 입술 위에 더더 붉은색으로 덧칠을 하고, 안그래도 까맣게 반짝이는 눈에 아이라인을 선명하게 그린 아이들에 익숙하던 눈이 개운해진다. 그냥 난 이쪽이 내 취향. 아이 예뻐라. 아이가 너무 예뻐서 말 걸고 싶어 혼났네.
삼십분 쯤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넉넉히 기다리니 되레 금방 차가 도착한 기분.
거참 여행하기 조오은 날씨네.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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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착한 곳은, 바로 바로. 책을 실컷 읽을 수 있는 곳, 되겠다.
일단 따듯한 커피 한 잔.
서점에서 산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내내 읽고 싶었던 책을 속초에서 집어 들었다. 《나의 두 사람》, 김달님 작가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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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엄마 아빠와 어린 내가, 그리고 지금의 늙고 약해진 엄마 아빠와 장성한 내가. 수시로 오버랩됐다. 내가 어떻게, 한 때라도 그들을 미워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용서 못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나의 두 사람을.
단 한 챕터도 허투루 넘길 기록이 없었다. 좋은 글이다 정말. 커피 쟁반에 놓여 있던 세 장의 냅킨을 앞 뒤 옆, 모두를 빈틈 없이 사용해 눈물을 찍어내고도 모자라, 한참 모자라. 혹시 땀 날까 챙겼던 손수건을 꺼내 눈물 콧물을 정신없이 닦아냈다. 감정이 너무 격해져 끅끅 소리내 울게 될까, 책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내려뒀다. 창 밖의 황홀한 풍경에 시선을 던지며, 숨을 훅훅 내쉬어 감정을 가라 앉혔다가 다시 책을 펼치기를 몇 번.
누구라고 몰입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구든, 세상에 혼자 나와, 혼자 자라난 사람은 없으니. 소중한 시절을 공유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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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 주일 저녁, 좁은 쇼파와 거실 바닥에 엉켜 누워서 드라마를 보던 우리 셋의 모습이 생각났다. 내가 집을 비운 며칠동안 드라마 제목이 생각나질 않아 못 봤다며, 우리 같이 보던 걸 틀어달라신다. '비밀의 숲' 꽤 몰입도깊은 드라마를 두 편 연달아 다시보기로 돌려보면서, 너 속초가면 또 같이 못 보니 같이 두 편은 봐둬야 한다던 엄마, 그리고 언젠가부터 엄마와 늘 함께 드라마를 보는 아빠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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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선을 다해 너를 키울거야.", 1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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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엄마 아빠의 최선으로, 나를 키워내신걸 안다. 잘 안다. 책을 읽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 한 번에 바로 "여보세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전화를 받으신다. 아니, 어쩌면 정말 늘 기다리고 있으신지도 모르겠다.
사랑 없는 내게서 누군가 조금이라도 온기를 느꼈다면, 그건 엄마 아빠 그리고 나를 지으신 분으로부터 받은 댓가 없는 사랑 덕일 것이다. 달님 작가님과 꼭 닮은 고백을 나도 해봤다.
세상에 책 읽기 이렇게 환상적인 공간이 어딨답니까.
책장이 좀처럼 쉬이 닫히질 않아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바로 옆에서 순두부 한 그릇. 뚝딱.
멋진 공간에 좋은 책들이 꽤 많다. 마음껏 읽을 수 있다. 욕심부려 여러 권 뽑아와서는, 당연한 얘기지만 한 권 밖에 못 읽었다.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 읽으면 읽을 수록, 잘 지은 제목이다.
가볍게, 술술 읽고 덮었는데, 입사하고 나서 나에게 꽤 필요한 책 같아서 아에 구입해서 다시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다.
문을 닫을 시간이 될 때까지 책을 읽고, 나왔다. 기분 째져.
바깥이 어둑어둑해졌다. 돌아가는 길은 한 시간이나 버스를 기다려 타고 왔다.
비가 그쳤으니 발코니에 앉아 끄적끄적 글을 썼다. '웨스턴 카잇'을 들으며.
솔직히 너무 좋다, 웨스턴 카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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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잔뜩 읽은 뒤라 그런지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뭐라도 좀.
점심에 사두고 못 먹은 빵을 대강 저녁으로 떼우며,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또 꿈 같은 밤을 보냈다. 누우면 바로 꿈나라로 갈 것 같아서 최대한 최대한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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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포근한 잠자리에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깊이 골아 떨어졌다.
서울은 꽤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던데, 운이 좋게도 비가 죽 내린터라 몸도 마음도 선선했다. 좋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