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면접

by 노니

드라마 '라이브' 1화를 봤다. 재밌다는 반응이 많길래 보기 시작했는데, 사는 게 녹록지 않아 그런가, 사는 게 녹록지 못한 넘의 이야기도 보기 좀 힘들었다. 취업을 위해, 코피를 흘릴 만큼 일하고 걷지 않고 뛰어다녀야 할 정도로 열심히 살지만 그럼에도 출구 가 보이지 않는 취준생들이 결국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경찰 공무원이 되는 이야기가 1회를 가득 채웠다. 극심한 취업난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아 드라마 보면서 스트레스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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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에 기분이 업될 만도. 이런 기분일 줄 몰랐는데, 마냥 설렜다. 구직 활동이랄 것도 없지만 몇 개의 이력서를 내고 나서 온 첫 번째 연락이었다.

설립된 지 56년, 고서 미술품 등 관리 운영하는 회사였다. 아니나 다를까 인사동에 위치해 있었다. 어쩜, 인사동이랑 잘 어울리기도 하지. 내가 지원한 분야는 <장서 관리>였다. 관심 있었던 분야도, 경력이 있던 일도 아니었지만 공고에서 자격요건을 확인하고 나니 안 넣을라야 안 넣을 수가 없었다.

자격 요건

-한문 능숙자 우대

-경력자 우대

-사이트 관리 가능자 우대

이럴 수가. 이 구인 공고 한문교육과를 나와, 한문 선생님을 하다가 쇼핑몰에서 사이트 관리를 했던 나를 위한 게 분명했다. 가기만 하면 안 될 수가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 되면 어떡하지, 바로 일하게 되는 건가? 아직 좀 덜 쉰 것 같은데. 흐. 웃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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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너무 오랫동안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가 없었던 터라 면접에 입고 갈 만한 옷이 없어 아쉬웠지만, 진한 그레이 컬러의 니트에 검정 모직 바지를 받쳐 입었다. 검정 스타킹에 낮은 굽의 옥스퍼드화를 신고, 카라가 얇은 네이비 컬러의 기장이 긴 외투를 걸쳤다. 뿌리 염색을 좀 해둘걸. 한눈에 보기에도 관리 안 된 머리를 대강 묶었다. 일찌감치 집에서 나섰다. 헤맬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일찍 나갔던 건데 인사동 메인 거리에서 바로 찾을 수 있는 곳이라 전혀 헤매지 않고 면접 시간보다 20분도 넘게 빨리 도착해버렸다.

5분쯤,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사무실에 들어갔다. 뭔가 생기라고는 1%도 없는 메마른 얼굴의 여직원이 나를 맞는다. 면접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바로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안내해 준 면접실 안으로 들어가니 아주아주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코가 아릴 정도의 강력한 향이었다. 남자들의, 아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이 든' 남자의 화장품 냄새. 그때 면접실 안으로 아주 정정해 보이는, 그러나 아주 많이 나이가 든 할아버지가 들어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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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벅 인사를 하고 면접실을 나왔다. 다시 꾸벅, 여전히 생기가 없는 여직원을 향해 또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익숙한 인사동 길을 터벅터벅 걸어 종로 경찰서 앞에서 272번 버스를 타고 대학로로 향했다. 비어 있는 맨 뒷자리에 올라가 앉은 뒤,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 하나 둘, 면접의 순간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니 불쾌한 감정이 스민다. "여보세요."

"이전 회사를 왜 그만두었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을 했더니 그 할아버지가 뭐라는 줄 알아? 내가 너무 기세 등등해져서 그만두게 된 것 아니냐던데. 난 순간 이해를 못 하고 무슨 말인가 싶어, '네?' 하고 다시 물어봤다니까." 언니에게 마구 쏟아냈다. 아마 그 버스 안의 사람들 거의가 내가 방금 뭘 하다가 버스를 탔는지 알게 되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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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력서를 들여다보다가 대뜸, 여자가 기가 너무 센 거 아니 냔다. 전의 회사가 성장하는 동안 나도 참 열심히 일했다는 말을 구구절절 써 놓은, 자랑스러운 내 이력서였다. 사업하는 사람 밑에서 사업 잘 되는 거 보면서 아마 분명 사업 바람이 들었을 것 같단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런 일, 그러니까 가치를 좇는 고귀한 일, 같은 의미로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만, 아 돈을 많이 못 버는 일이라는 말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내가 아주 얌전히 앉아 고분고분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 있자니 한술 더 떠서 묻는다. 아버지가 뭐 하시나, 아버지는 어느 학교 나오셨나.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말을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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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꼭 입사하고 싶은 회사가 아니면서도 나는 끝까지 상대방이 원하는 '직원상'에 맞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심지어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라는 되도 않는 질문에, 아빠 사고 전 건강하셨을 때 하셨던 직업을 말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이 나왔다. 지금 아빠가 하는 일을 무시한 거다. 하.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부끄럽고 미안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학로에서 내려서 가고 싶었던 커리집에 갔다. 아기자기 예쁜 인테리어의, 딱 인스타그램에서 인기가 있을 법한 커리집이었다. 9,000원짜리 시금치 커리를 먹고 구석구석 인테리어 사진을 찍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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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보러 가던 버스 안이 생각났다. 곧 내가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봤는데 꽤 기분이 좋았다. 상상은 끝없이 이어져 결국에는 '곧 다시 일을 하게 될 테니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의 백수 시절을 감사히 누리자'까지 도달했었다. 그때의 내 머릿속에는 멀미 날 것 같은 스킨 향이 나는 할아버지도, 그 무례한 질문들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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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한바탕 쏟아내고, 눈으로 먹는 예쁜 커리를 먹고, 좋아하는 카페까지 다녀오니 그제야 면접에서의 불쾌감이 가셨다. 코 끝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스킨 냄새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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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면접이 잡히면 준다던 연락은, 다행히 오지 않았다. 면접 말미에 할아버지가 그랬다. 내 앞에 면접 본 이는 서울대생이었고, 그 앞에 면접 본 이는 고전번역원에서 일했던 엘리트라고. 둘 다 너무 훌륭한데, 사이트 운영이 어렵다고 해서 나까지 면접을 봤다고. 알게 뭐람. 아마도 사이트 운영이 조금 어려운, 그러나 훌륭한 서울대생이나, 사이트 운영이 조금 어려운, 그러나 역시 훌륭한 고전번역원 경력자를 뽑았으려니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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