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거리에서 짐짓 이방인이 아닌 척, 여유를 가장하고 이리저리 쏘다니는 것, 나는 이것을 여행 최고의 별미로 친다. 너무 쉬운 일 아니냐고? 글쎄, 산보를 자극하는 도시를 찾기가 그리 쉬울까? 하루 종일 아무 계획 없이 산보만 하는 게 말처럼 쉬울까? <베를린의 유년 시절>을 쓴 발터 밴야민이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도시에서 길을 잃으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63p, <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산보를 자극하는 도시를 찾기가 그리 쉬울까? 하루 종일 아무 계획 없이 산보만 하는 게 말처럼 쉬울까?
저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주자주 지난 여행에서 만난 포르투갈의 골목들을 떠올렸다. 아름답고 복잡한 도시의 골목을 걷다 보면, 하기로 계획했던 어떠한 계획도 지금 이 순간 골목을 걷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지 않았다. 산책을 시작하면 늘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기대했던 건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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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많이 벗어나서 걷지는 못했지만 오르락내리락 아무렇게나 아무 곳이나 들쑤시고 다녔다. 낮 시간을 잠깐 머무른 오비두스에서는 관광객을 제외하고는 마주친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도시가 참 조용한 느낌이었다.
이 낡은 거리 어디라도 피어나는 것들, 살아 있는 것들이 많이 있어서 꽤 생명력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다음번에는 이 도시에서 적어도 하룻밤은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오비두스의 아침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비두스에 머무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지금 보다 더 초록이 만발하고, 더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 시기에 꼭 그리해야지.
지나치게 낡은 건물들 사이를 걷는데도 기분이 전혀 칙칙해지지 않았다. 상쾌해 이리 상쾌할 수가.
작은 성당이 보이면 꼬박꼬박 들어가서 나를 위해 기도했다. 그랬다. 여행 초반에는 나를 위한 기도를 자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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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들어가기 전에는 갑자기 비가 왔는데 기도하고 나오니 비가 그치고 이렇게 쨍하니 해가 났다. 맑디 맑은 하늘.
미친년 널을 뛰듯 오락가락한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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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다가온 고양이가 휙 멋지게 돌아 등을 보이더니 내 다리에 문질 문질 몸을 비빈다. 소리를 지르며 멈춰 섰다. 아코 기여워.
그런데 조금 있으니 한 마리 더, 두 마리 더. 어딘가에서 계속 고양이들이 나온다.
어디서 계속 고양이가 나오는가 했더니 그 골목 끝에 오비두스의 캣맘이 있었다.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시는 할머니가 나타나자 뒤도 안 돌아 보고 간다. 안녕, 맛점. 아는 척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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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레이타 거리에는 기념품 상점이 많았다. 딱히 사고 싶은 건 없는데 자꾸 들어가 보게 됐다.
왜냐면 이렇게 예뻐서.
아아, 한 겨울인데 이렇게 꽃이 많다. 꽃이 많은 계절에 오게 된다면 어떨까 또 상상하게 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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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레이타 거리를 따라 계속 걷다 보면 그 끝에는 커다란 서점이 있다. 서점은 서점인데 건물이 예사롭지가 않다.
예사롭지 않다 생각했더니만 오래된 교회를 개조해서 만든 서점이라고 한다. 말로만 듣던 그 광경. 언젠가부터 유럽의 교회에서 사람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교회가 건물을 감당할 여건이 되지 않아 교회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말을 몇 년 전부터 들어왔다. 멋지게 지어진 유럽의 교회들이 술집으로, 카페로, 심한 경우 이슬람 사원으로 변하고 있다고. 여기는 서점이었다.
꽤 많은 책이 보유되어 있는 큰 서점이었다.
서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아주 멋진 건물이 멋지게 책으로 채워져 있으니 좋지 않을 수 없었다.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내부로 들어와 책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오르락내리락, 계단을 거닐고 읽을 수도 없는 제목의 책들을 들춰가며 서점을 구경했다. 고민 고민 끝에 책 두 권을 골랐다. 한 권은 나를 위해, 다른 한 권은 생각나는 사람을 위해.
입구 카운터에 앉아 있는 서점 주인은 매일매일 몰려 들어왔다가 사진만 찍고 몰려 나가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사람답지 않게(!) 무척 친절하고 기분 좋은 미소를 보여줬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로구나.
이렇게, 길의 끝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마을을 내려다보인다.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거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까만 머리의 관광객들이다.
서점을 빠져나와 옆 길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곽을 따라 걸어보려고.
날이 환하게 개임.
오 뭔가 느낌 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성곽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정확히 잘 모르겠다. 일단 계속 걸었다.
성벽 안 풍경, 아 너무 정말이지 너무 느낌 있다.
형광색 페인트칠은 뭐냔 말이다. 어떻게 저런 색감을 생각할 수 있지. 오래된 성벽 안에서 상상도 못한 풍경을 만났다.
아마도 저기가 성벽인가 보다.
그런데 날이 또 심상치 않더니만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비를 피하다가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오늘 날씨 정말 대박이다. 우산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몸이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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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다 보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오비두스에 와서 처음으로 구글맵을 켜고 음식점을 찾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 내려다보이는 마을.
아름답다.
예쁜 풍경들을 지나 식당에 도착했다.
구글맵을 보고 찾아간 곳,
<A Nova Casa De Ramiro>
좀 추웠나 보다. 따뜻한 게먹고 싶어서 수프를 하나 시키고.
Cob에 담긴 생선 요리를 시켰다. 생선과 각종 야채가 가득 들은.
핸섬한 식당 직원이 내가 덜어줄까? 물어보길래 부탁했더니 먹음직스럽게 덜어주셨다.
자극적이지 않고 간간하니 먹을만했다. 야채와 생선이 신선했다.
완전 맛있어요, 진짜 맛있어요 대박이에요. 구글맵에 달린 리뷰에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건 추천 메뉴가 아닌 내 멋대로 메뉴를 시켰기 때문일지도.
식사를 거의 다 해가는데 한국인 가족이 들어왔다. 가족 여행자들을 만날 때마다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얼마나 좋아하실까, 유럽에 와보시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실 때, 그러니 이제 더는 미루면 안 되는데. 괜히 미안한 마음에 가족 채팅방에 카톡을 남겼다.
깔끔한 식사. 매우 젠틀한 서빙을 해주신다. 와인 없이 소프트 워터와 수프 메인 디시 까지 딱 30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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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나오니 또 비가 그쳐 있었다. 완전히 개인 듯한 하늘에 우산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계속 좀 더 멀리 걸어볼까 했는데 몸이 조금 노곤했다. 비도 맞았고 바람도 꽤 불었으니 감기에 걸렸대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였다. 거기에 따끈한 음식을 먹었더니 몸이 풀어졌나 보다. 슬슬 돌아가자 싶어서 새로운 길을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또 다른 서점.
여기도 공간이 꽤 멋지다.
여긴 주로 헌책들을 판매하는 서점인 것 같았다.
어느 서점을 가든 어린이들을 위한 책 코너가 꽤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여기서도 사고 싶은 책들이 있었지만, 앞의 서점에서 이미 책을 2권 구매하는 바람에 여기서는 구경만 했다.
간단한 기념품이나 잡화도 판매하고 있다.
오비두스는 문학과 책의 도시이기도 하다. 매년 문학 축제가 열리고, 이 작은 마을에 커다란 서점이 두 개나 있다. (...) 포르투갈어를 모르더라도 책을 사랑하는 도시의 서점을 들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 192p
서점에 가는 걸 원래 좋아하는 편인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서점 구경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어떻게 진열해 두었는지, 책의 표지들은 어떤지. 그리고 포르투갈의 어떤 서점도 나의 이런 기대를 실망시킨 곳은 없었다. 정말이지 각자의 매력을 힘껏 뽐내고 있었다. 두 곳을 꼭 다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닌데 걷다 보면 만날 수밖에 없을 만한 곳에 위치해 있다.
벽과 문과 계단의 색감, 문 위에 피어나고 있는 꽃. 아마도 저녁이 되면 불도 들어오는가 보다.
그나저나 계단의 모양을 좀 보라지. 오르막 내리막길이 많은 지형 특성상 맞춤형 계단인가 보다. 예뻐라.
고아라. 아직 못 본 골목 못 본 꽃 못 본 색감이 너무 많았다.
한바탕 관광객들이 빠져나갔는지 거리가 조금 조용해져있다.
하마터면 놓칠 뻔. 오비두스의 특산품 진자를 마셔보기로 했다. 1유로. 디레이타 거리 초입에 진자를 파는 가게가 몇 개 있다. 놓쳤다고 다시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 안쪽으로 들어와도 가판에서 진자를 파는 집들이 꽤 있었다. 균일가인 듯, 모두 1유로. 체리주를 초콜릿 잔에 담아 준다. 다크 초코, 화이트 초코 둘 중 하나를 고르고, 고개를 젖혀 진자를 입속에 털어 넣고 초콜릿 잔을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으면 된다. 정말 딱 한 모금 밖에 되지 않는 양이지만 알코올에 익숙하지 않은 몸에 후끈한 기운이 확 퍼지는 걸 느꼈다.
마을 초입의 진자 가게.
굳이 안 마시기가 더 쉽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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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15분 버스를 타고 리스본으로 왔다. 11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으니 4시간 정도 오비두스의 골목을 헤맨 것.
오는 길에는 뒷자리에 앉아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푹 자고 일어나니 종점 리스본에 도착해 있었다.
리스본에서 딱 1시간 거리의 오비두스. 여행에서 돌아와 생각해보니 이번 포르투갈 여행에서 산보를 가장 자극했던 도시는 뭐니 뭐니 해도 오비두스였다. 그러니 이 곳은 다녀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