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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니 Jun 05. 2022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이 얘기는 해주고 싶었어. 내가 언니 팬이라는 거.”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의 L이 갑자기 고백을 해왔다. ‘뭐야 갑자기’하고 웃다가 그만 왈칵 눈물이 나버렸다.   


L과는 첫 번째 책을 함께 만든 사이다. 내가 글을 쓰고 그녀가 그림을 그렸다. 상주에 오게 되면서 특별히 신경을 썼던 게 있다. 기록이었다. 일자리가 부족한 서울의 청년들이 6개월 동안 청년이 없는 상주에서 일해보는 프로젝트로 상주에 왔다, ‘한국의 워홀(워킹홀리데이는 노동력이 부족한 나라에서 외국 젊은이들에게 1년간의 특별비자를 발급, 입국을 허락하고 취업 자격을 주는 제도를 말한다)’이라는 타이틀을 보고 덜컥 지원했다. 서울시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일주일에 1번씩 보고서를 적어 냈다.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눈으로 보는 풍경, 만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 그 속에서의 깨달음이 매일매일 샘솟았다. 놓칠세라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을 해두고 밤이 되면 쉴 새 없이 기록해서 일주일 치를 모아 보고서로 내곤 했다. 매주 마감 아닌 마감이 있으니 미루지 않고 나의 6개월을 기록했다.     


나는 그저 내가 좋아 기록했을 뿐인데 기록이 쌓였다. 내 SNS에는 여자 혼자 지역에 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응원한다”는 댓글을 달기 시작했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매니저님들은 내 얼굴을 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잘 읽고 있다”는 말을 했다. 꾸준히 올린 기록에 독자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약속된 6개월이 마무리되어가는 시기가 되자 스멀스멀 걱정이 생겼다. 마감도 독자도 없이 과연 내가 계속 기록할 것인가. 꾸준한 기록에 자신감이 붙었을 때라 도전해보기로 했다. ‘상주 매일, 생주 메일‘이라는 타이틀의 구독 메일 서비스를 오픈했다.     


[소심하고 걱정 많은 청년의 지역 살이가 궁금하신 분들은 신청해주세요. 1주일에 2번 또는 3번, 메일이 발송될 예정입니다. 늘 글 구독을 시도해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연했는데 2020년이 시작된 뒤로 이제 어설프더라도 시작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은 상주에서의 일상, 상주 풍경, 지역 살이의 고민, 상주에서 만나 사람들의 이야기 등등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개인 SNS에 모집 공지를 오픈하고 50여 명의 독자가 생겼다.     


꾸준히 쓰는 것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3개월 동안 채 10번도 보내지 못하고 황급히 마무리해야 했다. 그나마도 마지막 메일은 사과의 말을 써서 보냈다. 마치 실패 같은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동료 L을 알게 됐다. ‘상주 매일, 상주 메일’의 구독을 신청한 L은 나보다 반년 정도 일찍 상주에 내려온 서울 청년이라고 했다. 상주의 풍경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그녀만의 시선으로 그려낸 상주를 구경했다. 중간중간 내가 아는 풍경이 나오면 반가워서 댓글을 달았다. “오 저 여기 알아요!” 그녀도 내게 답장을 보내왔다. “이 글 속의 풍경을 알 것 같아요.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어요”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떤 용기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L에 연락해서 제안했다. “우리 같이 책 만들어 볼래요?” 그렇게 우리의 첫 번째 책 《서울아가씨 화이팅》이 만들어졌다. 그녀에겐 그동안 그려 놓은 그림이 잔뜩 있었고 나에겐 그동안 써놓은 글이 잔뜩 있었으니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그녀와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여전히 상주를 그리고 기록하면서.
    

지난주부터 우리는 다시 구독 메일 서비스를 오픈했다. 자연과 가까이 살면서 느끼는 ‘제철의 낭만’을 잘 전달해보자는 마음으로 계절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때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점은 써놓은 글이 없다는 것. 한 주 한주 새로운 글을 쓰면서 시작부터 자신이 없어졌다. 동료들에 비해 나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부족한 것 같았다. 책을 한 권 썼으니 작가다? 계속 뭐라도 쓰고 있으니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서점 주인인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도움이 못 될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을 L에게 내비쳤다. 세상엔 너무 많은 글이 있고 나는 계속 쓰고 싶지만 때때로 부끄럽다고.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L이 그런다. "이 얘기는 해주고 싶었어. 동료이기 이전에 내가 언니 팬이라는 거." 저렇게 진지한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는 사이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녀가 말을 잇는다. “이번에 언니 글 진짜 오랜만에 읽는데 ‘아, 이거 《서울 아가씨 화이팅 2》구나 싶은 거야.’ 내가 그때 왜 언니랑 책을 같이 만들어 본다고 했더라?’ 하고 떠올려 보니까, 다른 이유들 다 있지만 그래도 제일 큰 이유는 언니 글이 좋아서였더라고” 그 얘기를 하는 L의 눈이 글썽했다. “아 뭐야 갑자기”하고 웃다가 와락 눈물이 나서 얼굴을 가렸다.     

L이 한마디 더 덧붙인다. 우리는 결국 우리끼리, 서로 응원해주면서 계속 가야 한다고. 계속 쓰고 그려야 한다고. 이 말엔 참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 와앙- 울어버렸다. 우리는 서로의 동료이자 팬이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작가라는 말에 괜히 겁이 나서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라는 말로 눙쳐버린다. 매일의 기록이 무엇이 될지 몰랐지만, 그저 꾸준히 했다. 그리고 그게 책이 되었고, 동료를 만들어 줬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흐릿하지만 나는 여전히 기록하고 있다. 뭐가 될지 알 수 없는 글을, 여전히 스스로 독자를 찾아가면서. 그리고 이제는 알고 있다. 꾸준히 계속하다 보면, 뭔가 되지 못할 수는 있지만 더 잘하게 되기는 할 거라고. 잔뜩 힘이 들어간 손가락에 힘을 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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