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18
나이를 먹었으니 이전에 비해 어느 정도는 사람 볼 줄 아는 눈이 생겼겠지만 그게 외국인에게도 적용된다는 건 새삼 신기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웃는 눈을 보면서도 뭔가 이상하게 석연찮은 기분이었는데, 며칠 살면서 이런 저런 상황을 겪어보니 사람이 별루다. 여기 온지 벌써 6일짼데 아직도 와이파이가 안된다. 도착하자마자 고쳐달라고 말했는데 상황에 대해 가타부타 말도 없고 고쳐지지도 않고. 어젯밤에 대체 얼마나 걸리는건지 다시 물어봤는더니 이제야 답장이 온다. 아마도 오늘 중으로는 해결이 될 예정이라는 내용.
영어를 잘 못하니, 언어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를 정확히 알 수 없고. 또 이 곳의 고장 수리 기간도 알 수 없으니 오해는 말아야지, 참았다. 성질 급한 내가 평소처럼 할까(?)하다가도 괜히 소심한 마음이 발동되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니 괜히 문제 만들지 말고 조심해야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식도 안 나오고(이게 가장 화가났던건가). 그냥 잘 지내다 가자. 대강 씻고 나왔는데 아파트 엘레베이터가 고장나있었다. 갑자기 쏴아 한기가 몰려왔다. 내가 탔을 때 엘레베이터가 멈추기라도 했었더라면. 다행이다 감사하다. 아무 사고 없이 지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갑자기 감사해진 마음으로 집 앞의 카페에 왔다.
기분 좋게 모오닝 라테 한 잔. 어김없이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SNS를 하고 오전을 빈둥대며 보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씩 들어와 책상에 공부할 것들을 펼치고 정신 없이 이것 저것 뭔가를 하고 있었다.
_
슬슬 나갈 준비를 하는데 어쩐지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딱히 없었다. 이럴 땐 갔던 곳 중에 좋았던 곳을 가는 걸로.
골목길 풍경.
어제 온 비로 생긴 물 웅덩이. 물에 비치는 하늘이 예쁘다.
극락조에 빠졌다. 나중에 집이 생긴다면 담벼락에 쪼르르 심어 두고 싶다. 평생 못 이룰수도 있는 꿈.
그러고보니 여기 와서 길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을 많이 못 봤던 것 같은데, 이렇게 동네 골목 깊숙이 들어오니 개구진 아이들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너무 큰 길로만 다녔던걸까.
_
뜬금 없는 곳에 쏙 숨겨져 있는 레스토랑, 동마담.
다섯 테이블 정도밖에 없는 소담한 레스토랑의 슬라이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과하지 않게 향긋한 꽃향기가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싱싱한 꽃으로 흠뻑 장식된 내부, 며칠전 노랗고 하얀 국화 장식은 다 걷어내고 오늘은 무려 극락조(꺅)와 플로메리안과 이름 모를 꽃들로 채워져 있다. 정말 아낌 없이 꽃이 한가득.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정말. 일부러 오픈 시간에 맞춰 갔던건 아닌데 첫 손님이라서 내부 곳곳을 마음 놓고 찍었다.
치킨 스테이크, 오늘의 메뉴도 맛있다. 여기서 디저트류는 먹어 본 적 없는데, 다른 사람들 먹는 걸 보니 디저트 장식이 또 끝내주는 비쥬얼이었다. 서울에 이런 가게 오픈 하고 싶다.
아이스티도 주문했는데 그건 내 입맛에 안 맞아서 몇 모금 못 마셨다.
손질 안된 듯 흐트러진, 그러나 역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작은 정원에도 꽃이 잔뜩이다.
택시를 기다리며 만난 청초한 꽃망울.
_
좋았던 곳으로 가자. 편안해질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도서관 들르기 전에 커피 한잔 하고 가야지 하고 들른 카페.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리는 믹스 카페였다. 뭔가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지는 사장님과 그 느낌 그대로 연륜이 뭍어나는 카페 내부, 이제야 와 본게 아쉬울 만큼 분위기 좋은 곳이었다.
완전 다른 맛의 원두도 마셔보라며 또 한 잔, 커피는 좋아하지만 혀가 예민하지 못해 굳이 그 맛의 깊음과 풍성함은 못 누리더라도 맛있는 커피라는 건 알겠더라.
내부가 정말 좁아서, 손님들 모두 카페 주인을 보고 빙 둘러 앉을 수 밖에 없는 구조라, 옆 사람과 자연스럽게 말을 섞을 수 있었다. 오른쪽의 태국 가족이 말을 걸었다. 한국에도 이런 스타일의 카페가 있느냐고. 단골 카페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투와 표정과 질문이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물론 이런 타입의 카페가 있을 거다,라고 대답하면서 새삼 내 단골 카페가 그리워졌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군.
맞은 편 가족 중 오빠가 여동생을 찌르며 말해봐 물어봐 뭔가 이런 분위기, 눈치로 상황을 감지하고 내가 왜? 하고 묻자 여동생은 여전히 수줍고 오빠가 못 참고 말한다. 얘 완전 케이팝 팬이라고. 완~전 팬이라고. 수줍은 여학생은 단지 코리아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보는 눈에도 하트가 뿅뿅이다. 누굴 제일 좋아하냐고 물어보니 빅뱅, 오 아직도 빅뱅 먹어주는구만.
_
그러고보니 누군가 태국 사람이랑 말을 하게 되었을 때 번번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참 좋아해줬다. 한국에 와본 적 있는지 물어보면 아직이지만 꼭 와보고 싶다고 했다. 감사히도 그 눈에서 비치는 다정한 온도가 참 좋았다. 어떻게 좋은 사람만 있겠는가마는 감사히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카페가 있는 골목도 너무 좋았다. 오후 3시까지만 문을 여는 카페, 아 우리 동네 도서관 앞에 있었으면 좋겠네. 헤헤.
길 건너편 풍경이 좋아서 몇 장 사진도 찍어보고.
_
오늘도 테이블 중간에 어제의 아이들과 스승님이 열정적으로 수업 중이었다. 어제 찍은 사진과 영상을 sns에 올렸더니 빠이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댓글에 학생들이 연주하는 것이 태국의 전통 악기라고 말해줬다. 역시. 조용히 구석으로 책을 가져와 앉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을 다 사랑하게 되버렸다.
오늘도 질질 짜며 열심히 책장을 넘겼지만 다 못 읽고 또 곰방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안 될 것을 알지만 혹시나 해서 사서분께 물어봤다. 혹시 여행자들도 책을 빌려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요, 여권을 맡긴다던지 해서. 대답은 역시 노. 엉뚱한 질문을 한 어리바리 여행자에게 엄마처럼 따뜻하게 웃어주셨다. 갑자기 뭔가에 확 꽂힐 때가 있다. 참나 서울 가서 읽으면 될 걸 뭘 또 이렇게 간절하게. 크크.
_
어제랑 똑같은 시간, 똑같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 곳에 와서 내가 제일 좋아하게 된 길이다. 도서관에서 나와서 걷는 이 짧은 길, 옆에 물이 흐르고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차들은 나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달리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은 한국의 가을이랑 아주 조금 닮아 있다. 가을이 자꾸 생각났다. 아무래도 갈 때가 됐나보다. 크.
해가 지는 길을 걸어서 어제와 같은 곳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어제 사람들이 먹는 것 중에 봐둔게 있어서 손짓 발짓으로 물어보고 그걸 시켰다. 법랑 도시락에 나오는 메뉴를 열어보면 맑은 국물이 있고 샐러드와 밥. 패션후르츠 음료도 시켰다. 역시 맛있었다.
어제 그 로티집에 가서, 이번에도 두 종류의 로티를 사와서 먹었다. 식어도 맛있구만.
집까지 걸어 들어오는 길의 문방구를 거의 매일 들르고 있는데, 갈 때마다 쓸데 없는 것들을 하나씩 사들이고 있다. 샤프, 볼펜, 테이프, 풀, 지우개.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그냥 매일 매일 들러 하나씩 집어 온다. 어느새 서울에서의 나와 비슷해진 생활 패턴으로 비슷한 모양의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_
여행병(?)이 걸려 한 달에 한 번씩 어디론가 떠나는 딸이 걱정 될 법도 한데 잔소리는 커녕, 떠나기 며칠 전에야 '이번에는 어디 가기로 했어' 불쑥 말을 꺼내도 뭐라 싫은 소리 한번 안 한 엄마 아빠다. 퇴사 하기로 했어 결정하고 말했을 때도 이런 저런 걱정은 했지만, 결국 '너가 알아서 잘 결정 했겠지' 했던 엄마 아빠다. 퇴사 하자 마자 바로 일정을 바꿔 '좀 더 길게 다녀올께' 해도, '그래 재밌게 놀다 와' 뿐이었다.
출발 전, 캐리어를 다 챙겨놓고 공항에 나가기 전에 엄마 아빠에게 물었다. "내가 갔던 여행 중에 제일 긴 여행인데, 가서 뭐할까?" 조금 생각하고 엄마가 대답했다. "일찍 일어나고, 끼니 시간 맞춰 챙겨 먹고, 생각 많이 하지 말고, 핸드폰 많이 보지 말고, 어디가든 많이 느끼고." 이어 아빠가 대답했다. "현지 음식 많이 먹고, 자연 풍광 많이 보고, 그냥 너가 하고 싶은거 하고." 엄마가 아빠 말을 듣고 있다가 덧붙인다. "그래, 너 하고 싶은거 다 해." 여기서도 충분히 하고 싶은거 하고 살고 있는 다 큰 막내 딸, 어련히 제 멋에 겨워 살까, 가서도 또 복잡해 지지 말고 하고 싶은데로 하다 와, 하신다. 엄마 아빠는 조금도 그렇게 살지 못했으면서 나에게는 늘 그렇게 하고 싶은거 하고 살라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것. 수면 시간을 내가 원하는대로 정할 수 있고, 무엇이어도 좋으니 하고 싶은게 생기면 그걸 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었다.
이게 다였다. 특별히 다른 것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러고 있구나. 역시나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
연락도 잘 안하는 딸,
아빠는 늘 먼저 안부를 묻는다.
예정된 일정이 이제 딱 이틀 밖에 안남았는데, 아빠는 오늘도 '오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들어와' 하신다.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러게 부모님은 언제나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줬었는데, 그 은혜가 사무치는 밤이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