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17의 기록
다른 사람들의 치앙마이 여행기를 보면서 새삼 아직 안 가본 곳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히 다녀야겠어, 이런 마음에 아침부터 택시타고 님만해민으로.
치앙마이 아트센터에서 보고 느낌 좋다 생각했던 전시 포스터. 여기서 전시 중이었구나.
누군가의 뒷 모습. 색 없이 그려놓은 뒷 모습만 보니 이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재밌었다. 결국 우린 서로가 서로를 머리의 색, 피부의 색, 골격이나 생김새, 눈에 보이는 차이로 분류한다. 서양 사람이라고 머리 위에 머리 하나가 더 있거나 한국 사람이라고 머리카락이 없거나 한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의 머리는 목으로 몸통과 이어져 있고 머리엔 색이 다르지만 털이 나 있고 얼굴의 양쪽 옆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르지만 귀가 붙어 있고. 따지고 보면 다른 것보다 비슷한게 더 많은데 말이다. 치앙마이에서 실컷 태국 사람들을 만나고 공항에서 그들과 함께 줄을 서고 한국에 오는 같은 비행기에 오르고, 그 뒤에 한국에서 동남아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었을 때, 이전과는 매우 다른 느낌으로 그들이 보였다. 이전엔 너무 몰라 그냥 '동남아 사람'으로 보였다면 이번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고 해야할까. 설명할 순 없지만 한 없이 친근한 느낌으로.
갤러리를 둘러보고.
카페와 스튜디오도 함께 있다. 거의 모든 치앙마이 여행자들 사진 속에서 봤던 카페와 동그란 창문.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사진에 참 예쁘게 나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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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이 곳에서 먹을 참이었다.
이 곳도 못지않게 유명한 곳.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다시 올 일은 아마도 없을테니 가장 먹고 싶은걸로 시켰다. 그 결과 아침 9시전의 치킨. 쨔잔. 시킬 땐 좋았지. 막상 실물이 눈 앞에 있으니 참으로 어마어마하면서 별안간 외로움이 몰려왔다. 이걸 혼자 다 먹어야 한다니. 비쥬얼 훌륭하고, 커피맛도 좋았고. 그렇다면 치킨 와플의 맛은? 우리가 알고 있는 와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치킨을 같이 먹는 맛.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지만 입안에 넣었을때, 헉 생각지도 못한 조화야! 하는 드라마틱한 맛은 아니었다. 게다가 혼자 다 먹기엔 조금 버거운 양이다. 중국일까 홍콩일까, 그런 분위기의 가족이 들어와 사진을 열심히 찍기에 셋이 같이 찍어줄까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며 되려 내 사진을 찍어주신단다. 아주머니가 열심히 찍어주신 사진을 건네받아 들여다 보다가 깜짝, 아직 아침 붓기도 가라 앉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렇게 띵띵 불은 얼굴로 먹는 치킨 와플이라니.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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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거하게 먹었으니 님만거리 산책이다.
거리에 호스텔도 진짜 많고 예쁜 집들도 이미 넘쳐난다. 올드타운이나 치앙마이 대학가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예쁜 카페는 말할 것도 없이 많고.
핑크핑크한 건물. 진네이비와 핑크의 컬러 조화, 로고의 귀여움까지.
그래도 중간 중간 역시나 초록은 풍성하다. 극락조가 담벼락에 잔뜩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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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니 엊그제 들렀던 북스미스가 보여 다시 들어가서 노닥 노닥 시간을 보냈다. 한나절 만에 금방, 여기 저기 들러봐야겠다는 마음이 쏙 들어갔다. 역시 가고 싶은 곳에 가는게 최고지. 사고 싶은 책이 있어 찜해둔 터였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원하는 책은 없었다.
아쉽지만, 다른 책들을 구경했다. 'K-pop for beginers'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SORRY SORRY》라는 제목의 책. 저 춤 동작 일러스트좀 봐. 크크크. 내용을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케이팝 팬 입장에서 한국을 방문하고 뭐 이런 내용의 책인 것 같았다. 아이디어 굿.
한참 뒤적이고 결국 골랐다. <DEAR, PORTLAND> 멋진 사진이 잔뜩 실린 포틀랜드 사진집이었다. 포틀랜드에 언제쯤이면 가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속 풍경이 참 좋았다. 가본적도 없는데 그리울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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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나왔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요 며칠 비가 안왔던터라 마음 놓고 우산을 두고 나왔는데 새삼 또 비라니. 곧 그치겠지 싶어 무시하고 걸었는데 갑자기 비가... 비가 다 쓸어버리겠다는 기세로 퍼붓기 시작했다. 정신 없이 바로 옆에 있던 가게로 들어와 버렸다.
근데 들어오니 하필 야외 테라스만 있는 카페였다. 빗방울 쏟아지는 거 보면서 마시는 커피 정말 좋지만, 그건 실내 있을 때만 해당되는거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 내린다. 점원이 튀어 나와서 카운터 앞으로 의자와 테이블을 바짝 끌어 당겨 딱 한자리, 가까스로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는 이런 비에 익숙하다는 듯, 민첩하게 의자를 기울여 놓았다.
음악 소리가 안 들릴 만큼 헤비하게 쏟아지는 비는 그칠 생각을 않코 계속 내렸다. 바깥 도로에는 역시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 이 상태라면 우산을 쓰고 나가도 홀딱 젖을테니, 다들 움직이지 않고 있을터였다. 계속해서, 어떠한 곳에서도 어떤 움직이나 소리도 없이 따가운 빗소리만 계속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은 정도의 빗소리에 이어폰을 꽂고 책 읽기 시작했다.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_고레에다 히로카즈
사방에서 물이 튀어 팔뚝도 다리도 서서히 젖어갔지만 어차피 이 비가 완전히 그칠 때까지는 꼼짝 없이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 생각하니 되려 이 상황이 좀 분위기 있게 느껴졌다.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에 의미있는 시간. 뭔가 점점 신이나서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부를 지경. 어느 정도 소리를 높여도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빗소리가 이어졌기 때문에.
꽤 긴 시간 자세도 못 바꾸고 무릎에 가방을 올려 놓은 채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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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지 않을 것 같았던 비가 그치고.
택시를 불렀다. 비에 몸도 노곤해지고, 옷도 축축했다. 이런 컨디션으로는 가고 싶은 곳이 많지 않았다. 도서관(?)으로 왔다.
콕 쳐박혀서 책을 읽고 싶은 오후, 지난 번 읽었던 책의 뒷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고. 금새 남겨둔 페이지를 다 읽어버렸다. 죽음 이후의 7일을 기록해 놓은 이 소설은 시종 책 표지처럼 우울하고 아득한 이야기들이 이어졌지만 비참한 가난을, 어처구니 없는 부조리함을, 덮고 상쇄하는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마냥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때 한 번 듣고 잘 잊혀지지 않던 책의 제목이 생각났다. <사랑, 어쩌면 그게 전부>
그냥 갈까 하다가 읽을 책을 더 골라보기로 했다. 아직도 바지 끝이 눅눅했기 때문에. 그때 새삼 내 눈에 띈 책, 《미생》이었다. 퇴사 여행에서, 그것도 치앙마이 한복판에서 펼쳐 보는 미생이라니. 큭. 한참 이슈가 될 때는 막상 관심이 없어 드라마로도 책으로도 본 적 없었다.
무책임해지세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
우리를 위해 열심히 사는 건데, 우리가 피해를 보고 있어.
말하지 않아도 행동이 보여지면 그게 말인거여. 어른 흉내 내지 말고 어른답게 행동해라.
다들 열심히 살았지만 뭘 했는지 모를 하루, 잘 보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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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듯이 빠져들어 보는 사람 없는 구석에 쳐박혀서 눈물을 질질 흘려가며 읽었다. 말단 직원에서 총괄 관리까지 안 해본 일이 없어서 그런지 장그래의 마음이 되었다가, 오과장의 마음이 되었다가 여기 저기 알아주고픈 마음들 뿐이었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와 '나 참 열심히 살았었구나'를 오가면서 책장이 바쁘게 바쁘게 넘어갔다. 문 닫을 시간 전까지 꽉 채워 읽고 책을 덮었다. 아쉽지만 내일 또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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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까부터 도서관 안에서는 정체를 모를 모임이 계속 되고 있었다. 흘끔 흘끔 지켜본 결과, 전통 악기나 전통 노래등을 장인(?)으로 부터 전수 받는 시간인 것 같았다. 마치 무형문화재 일 것만 같은 어른 한명이 선창을 하면 아이들이 독특한 가락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스승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즤들끼리 자율학습을 하면서 가사를 운율 없이 읊기도 하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내가 오기 전부터 있었으니 몇 시간째 계속 된 수업. 문 닫을 시간이 되자 고수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가운데서 꽃 바구니 같은 걸 들고 섰고 아이들은 옆으로 한 줄로 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호, 예상치 못한 가락을 BGM삼아 독서 타임이라니. 무슨 모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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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 뒤라 많이 습하려나 했는데 별로 덥지 않아서 집까지 걷기로 했다. 도서관은 두번째지만 그 사이 며칠, 집 주변을 열심히 돌아다닌 터라 여기서부터 집까지 구글맵을 안 켜고도 찾아갈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 익숙해진, 아는 길을 걷는 건 역시나 참 좋은 기분이었다. 걷다가 중간에 예쁜 카페를 발견해서 바로 들어갔다. 또 요런 재미가 있지.
yellow crafts
대표 메뉴가 신기하게도 두유라서 그걸 시켰다. 그리고 나는 치앙마이 카페 방문 중, 첫 실패를 경험했다. 맛없었다. 심지어 내부는 좀 지저분하다는 느낌이었다. 외관이 저렇게 감각있을건 뭐람. 속은 기분. 게다가 손님은 없는데 카운터에 스텝만 예닐곱명. 자기들끼리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뜨끈한 두유를 식혀서 원샷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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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서 팟타이를 먹었다. 그냥 별 것 없어 보이는 가게인데 밖에 기다리고 서있는 사람이 있었다. 예전 대학교 다닐 때 자주 갔던 학교 앞 분식집이 생각났다. 메뉴가 거진 50개도 넘었는데 신기하게도 모든 메뉴가 맛있었다. 그 분식집이 생각나는 가게였다. 메뉴가 열댓개도 넘었다. 팟타이가 50바트도 안하는 걸 보니 싼데 양도 꽤 많고 맛있었다.
기분 좋은 식사의 마지막은 맛있는 커피 한 잔.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어디고 평균 이상이라니까, 라테 맛 좋고. 커피를 마시고도 들어가기 아쉬워서 어슬렁 어슬렁 길 건너편의 야시장을 구경하다가 말로만 듣던 음식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바로 로티. 종류도 많고 다 맛있어 보여서 고민 고민하다가 남기더라도, 하는 마음으로 두가지 맛을 사왔다.
만드는 과정도 재밌지만, 포장도 재밌었다. 일회용 용기 양쪽을 칼로 슥슥 오려내서 김이 빠질 구멍을 만들고, 위에 젓가락을 푹 꽂아주신다.
바나나 로티와 치즈 로티. 꺄악. 맛있어서 술술 들어갔다. 많으면 남겨야지했지만 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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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오늘은 땀을 한 방울도 안 흘렸다. 비도 시원하게 쏟아붓고, 그 뒤로 내내 에어컨 있는 실내에 있어서 춥기까지 했다. 이제 여행하기 좋다는 건기가 코 앞으로 오기도 했고. 신기했다. 여행지에서 계절이 넘어가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
내가 알아차리지 않더라도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 그게 자연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넘어갈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여전히 반팔을 입고 있다가, 팔둑에 스치는 바람에 으스스 닭살이 돋으면 그때야 놀라서 아니 언제 바람이 이렇게 차가워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무에 찬란한 단풍드는걸 죄다 놓치고는 바닥에 떨어진 잎들이 더 많아졌을 때 아니 언제 이렇게 잎들이 다 떨어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중한 건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내 시간. 무언가 다음으로 넘어가고 있는 이 시간을 보내는 마음을, 스스로 세심히 바라봐주고 싶어졌다. 누구보다도 내가. 내가 그렇게 하든 하지 않든 시간은 또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다 지난 다음에야 아 나의 시간이 지나가버렸구나, 하지 않아야지, 놓치지 말아야지.
그것이 아마도 '건너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