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느슨한 위로를, 치앙마이

2017. 10.16의 기록

by 노니

대학교 근처라 그런지 집 근처에 이른 아침 부터 문을 여는 카페들이 꽤 있길래, 오늘은 마음 먹고 아침 일찍 카페에 나왔다.

7시에 오픈한다는 카페.

메뉴판의 사진이랑 너무나 다른 비쥬얼의 브런치가 나왔다. 굳이 맛 없을 것도 없는 메뉴라서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긴 했지만.

카페에서 좀 늘어져 있을 생각이었는데, 저 발랄하기 짝이 없는 프렌치 불독이 등장하면서 내 평화로운 아침 계획이 깨졌다. 사진 속의 얌전한 모습은 훼이크, 정말 잠시도 쉬지 않고 테이블 사이 사이를 종종거리면서 다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책을 읽고 있다가 갑자기 한번씩 이 귀여운 생명체가 종아리를 슥- 스치거나 할짝- 발을 핥아버리니 내가 놀래 안 놀래. 처음엔 귀여워서 낄낄댔는데 내 조리를 물어뜯고 앞 사람 테이블 아래에 똥을 싸고. 결국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내가 도망쳐 나왔다.

평화로운 아침 시간을 향한 집요함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카페에 다시 들어갔다. 알고보니 뜬금없지만 자전거 라이더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카페에 수시로 헬멧을 쓰고 자전거 라이딩 복장을 한 건강한 여행자들이 들락거렸고 '나도 운동 좋아함'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건강미 넘치는 매력적인 여 사장님이 상큼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태국엔 미녀가 많은 것 같다. 들락날락 손님들은 있어도, 오래 앉아 있는 손님은 많지 않아서 내부는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커피 맛 좋구요,

내부 분위기 나쁘지 않구요.

새로 산 수첩에 쓰기 시작한 여행 일기. 손으로 쓰는 걸 안 좋아해서 왠만하면 일기는 잘 안쓰는데 언제가부터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일거리(?) 삼아 쓰기 시작했다. 열심히 따라잡았지만 아직 일주일 전 매림의 일기다. 마침 카페에 색연필이 있어서 신나게 그림에 색칠까지. 발로 그린 그림이지만 너무 인상 깊었던 욕조 샷은 말보다는 그림이 제격이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푸미폰 전 국왕의 얼굴. 월요일 오전은 어째 여행 중이라도 힘내기 싫은 시간이라서, 힘을 쭉 빼고 설렁 설렁 아침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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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씻어 볼까 숙소에 들어갔더니 문에 덜렁 아침이 걸려 있었다.

내가 남의 뒷담화를 하고 싶은건 아닌데 호스트가 뭐랄까 좀 엉망이었다. 조식 제공 안내가 무색하게 랜덤 제공, 언제 조식이 나오늦지 물으면 답변은 오지 않고 몇 시간이나 지나서 온 답변을 확인해보니 냉장고 위 시리얼 못 봤냐 그걸 먹으라는 둥. 있는 동안 조용히 있다 가자 싶어 말을 안했더니 제대로 조식이 나오질 않았다. 그랬다.

메세지를 확인해보니 이건 이틀치라고 밥은 내일까지 먹고, 우유는 시리얼과 함께 먹으란다. 근데 이거 좀 귀엽다. 팩우유에 바나나 잎에 쌓여진 태국 삼각 주먹밥도.

아 기여워, 게다가 쫌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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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고, 낮잠을 좀 자고. 가장 더운 시간은 에어컨과 보내고 다시 어슬렁 나왔다.

치앙마이 대학생들의 아지트 같은 느낌의 카페였다. 야외에 앉았다. 어느새 계절이 조금 바뀌고 있는 듯, 아침의 가장 뜨거운 더위가 지나고 나면 선풍기 없이 앉아 있어도 견딜만한 온도가 되었다. 패션후르츠 쥬스 한잔.

시큼해서 싫다는 사람도 있던데 새콤달콤 너무 사랑스런 맛이다. 대로변의 카페라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카페 안으로 한국아이와 젊은 엄마가 들어왔다. 딱 조카 준서 나이로 보이는 남자 아이는 그야말로 에너지가 넘쳤고, 갸냘프게 마른 엄마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벌건 얼굴이었다. 아이와 함께 여행이라는 고난이도 미션. 혼자 여행하기도 때때로 피곤한데. 아이는 엄마에게 끊임 없이 무언가를 물었고, 엄마는 얼굴에 피곤기가 가득한데도 놓치지 않고 대답을 이어갔다. 대단하다. 엄마는 정말 강하다. 엄마가 연신 테이블에 앉은 아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 울컥 오지랖이 올라와 같이 사진찍어드릴까요, 말을 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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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와 치앙마이 대학 캠퍼스 산책을 하러 들어갔다. 투어 버스에 올라 내리고 싶지 않은 곳에 내리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시간 맞춰 투어 버스에 오르고 싶지는 않아서, 쪽문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산책만 할께요.

캠퍼스 안에서 아까 카페에서 먼저 나간 한국인 모자를 다시 마주쳤다. 이 넓은 캠퍼스 안을 아이는 신이 나서 깡총 거리고 있었고 엄마는 그 옆을 종종 함께 걷고 있었다. 미소가 지어지는 예쁜 순간, 나는 그 뒤로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캠퍼스는 엄청 엄청 엄청 넓고 어디나 키 큰 나무가 잔뜩 있었다. 적당한 햇빛이 기분 좋은 산책길, 대학 캠퍼스를 걷고 있지만 학생들이 온통 교복을 입고 있어서 꼭 고등학교를 걷는 느낌었다. 아무래도 사복이 아니다보니까 첫 눈에는 학생들이 모두 수수해보인다 생각했는데 점점 눈에 익다보니 교복 스타일도 천차만별이다. 옷은 교복이지만 명품 토트백에 명품 샌들을 신은 학생들도 있고, 긴 치마 짧은 치마, 교복 치마 길이도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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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걸어서 호수에 도착했다. 찾기 어렵지 않다.

하, 입이 쩍 벌어진다. 사진에 다 담지 못했지만 호수 풍경이 아주 장관이다. 규모도 아주 크다. 아우 참 좋다. 산책 코스로 아주 제격이구만.

이게 대학교 안에 있는 호수의 일부, 때마침 적절한 하늘과 구름의 풍경까지.

호수 주변을 빙둘러 잘 닦여진 트랙을 따라 걸었다. 적당히, 땀이 이마에 약간 스밀 정도의 걷기 좋은 날씨였다.

기대도 안 했던 그림 같은 풍경들이 갑자기 툭, 툭 눈 앞에 펼쳐졌다. 감탄에 감탄. 꽤 오래 정신이 팔려 걷다보니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지고 제법 으슥한 곳까지 들어가게 됐다. 아무도 없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어디선가 연인 등장, 또 어디선가 연인이 등장했다. 그래 이해한다. 연인과 함께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찾아내는 재주가 생기게 마련이니까. 흐. 호수 주변을 크게 빙 둘러 걸으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걷다보니 어째 막다른 길이 나왔다. 다른 길은 없는가요, 물을 사람도 표지판도 없어서 일단 다시 뒤를 돌아 걸어 나왔다.

너무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솔직히 부러운 젊음이었다. 문득 혼자 걷는 길 위에서, 사랑스런 청춘과 푸르른 풍경 사이에서 뜬금없이 감사를 고백했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지금에, 혼자이고 싶을 때 언제든 혼자일 수 있는 지금에 마음껏 감사하자 생각했다. 여행 14일만에야 비로소.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그녀의 피곤한 낯빛을 보고 생긴 상대적 우월감 같은게 아니다. 그녀의 종종걸음에 대한 측은함도 아니다. 그냥 각자의 지금에 감사하는 것 밖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내게도 언젠가 저런 청춘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게도 마음대로 혼자일 수 없는 시간이 올것이다. 누군가가 더 나을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시간이다. 그러니 나의 지금을 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라야, 어느 순간이라도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응원을 건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마도. 받고 싶었던 격려와 응원을 스스로 건내며 나머지 길을 걸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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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입구에 다시 돌아오자 마침 방문객을 태운 셔틀버스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입구에서 바라보는 호수도 장관이지만, 시간이 된다면 호수를 두른 트랙을 따라 걸어가며 풍경을 보는 것이 정말 좋을 것 같다. 추천은 잘 안하지만 추천. 헷. 후문에 거의 도착해서, 도로 양쪽으로 높이 우거진 나무 사이를 지날 때 였다. 세찬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나무에서 나뭇잎 비가 내렸다. 벚꽃이 떨어지듯, 나뭇잎들이 아름답게 바람에 날렸다. 하늘을 올려다 봤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와하- 하고 웃어버렸다.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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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는 길 집 앞 야시장에 들러 저녁을 포장해와서 먹었다.

똠양꿍 국물은 아직 적응 중. 제대로 못 먹고 남겼다.

치앙마이 대학교 안의 세븐일레븐에서 찾은 푸딩을 두개다 한꺼번에 챱챱.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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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이란게 참 웃기지. 지금 이 순간이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하고 나니 모든 순간이 귀해졌다. 파랑새를 찾으러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돌아오니 제 집 마당에 있었다는 동화를 어려서 분명히 읽었으면서도, 자꾸만 파랑새를 찾아서 헤매고 만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중요한 건 어쩌면 파랑새를 찾으려는 청춘의 마음인지도 모를 일. 덕분에 오늘, 앙깨우 호숫가에서 오늘의 파랑새를 만났지 않냐고. 스스로에게 느슨한 위로를 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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