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 모임에서 먹은 방울토마토가 헉 소리 나게 달았던 것이 생각나, 방울토마토를 사러 갔다. 과일 소쿠리마다 이름과 가격을 손글씨로 휘갈겨 써둔, 시장 초입의 좌판 과일 가게였다. 방울토마토를 집어 들고 있는데 옆에 선 아저씨가 나에게까지 들릴 만한 소리로 혼잣말을 하신다. "아보차도~오?" 몇 번을 그렇게 읽으시더니 결국 점원에게 물었다. "아보차도? 이건 뭐예요? 어떻게 먹는 거예요?". "아보카도요? 깎아서요. 지금 사면 좀 더 익혀서 드셔야 돼요." 아직 초록빛을 띈 '아보카도'들이 소쿠리에 담겨 있다.
과일인지 야채인지, 처음 봤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비주얼이긴 하다. 쭈글쭈글한 겉표면을 들여다보면 맛조차도 상상하기 힘들다. (대체) 이건 정체가 뭐예요, 물어볼만하다. 아저씨가 오늘 아보카도를 사 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번엔 아저씨에게 '아보카도'가 '아보차도'가 아닌 '아보카도'로 보일 거다. 아저씨의 아보카도 첫 경험의 순간을 목격했다.
아저씨가 모르는 아보카도를 나는 안다. 내 경험을 통해.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아저씨는 알고 계실 거다. 아저씨의 경험들을 통해.
하루 24시간, 우리의 모든 시간은 어떤 경험들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싫건 좋건, 살아온 경험으로 만들어진 '시야'로 세상을 본다. 무섭고도 정직하게. 예전엔 그게 참 불공평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것만큼 공평한 게 있나 싶다. 경험은 질을 따질 수 없는 거라고,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고부터 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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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막 30살이 되었을 때, 서울에 갓 상경한 20살의 H를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해 귀차니즘이 심한 아이였다. 함께 지내다 보니, 그건 아주 어려서부터 쌓이고 쌓인 우울감의 표현이었다. 10살이나 많은 나도 겪어 보지 않은 일들을, 스무 해 동안 질리게 겪어 온 아이였다. 자신의 불행을 너무 쉽게, 아니 편하게 말하는 아이였다. 가끔, 그 이야기들을 뜻하지 않게 마주하게 될 때 한 번씩 생각했었다. H의 시간은 어떤 경험들로 채워져 있을까.
그리고 몇 해가 지나 26살, 어엿한 직장인 4년 차가 된 H를 만났다.
H는 여전히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온통 편안히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아이는 그사이 또 많은 일을 겪으며 자신의 경험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우울과 함께, 절망하다가 원망하다가 무뎌지다가, 다시 희망을 품다가. 익숙해진 방식으로, 조금 더 노련하게 생의 파도를 타고 있었다.
H의 이야기에, 예전에 비해 조금 더 자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지난, 나의 시간이 실감 났다. 경험을 가지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얼마나 더 근사할 수 있냐는 말이다. 누군가의 결핍에 마음을 쓸 수 있게 만들어 준, 결핍된 나의 시간에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보다 10살이나 어린아이와 마주 앉아 '지긋지긋한 세상 살이'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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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개월이나 전에 들은 말에 집착을 하고 있다. "해보지 않아도 좋은 경험이 있다" 어느새 어떤 뉘앙스로 그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때 저 말이 나에게 느끼게 했던 수치심에 대해 깊게 집착하고 있었다. 이미 살아버린 시간들이, 겪은 경험들이, 해보지 않아도 좋았던 것들이었을까 싶어 와르르 무너졌다. 아마도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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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벗어나려고, 그 말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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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냥,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을 도통 겪고 싶지 않은 괴로운 경험들로 치부하지 말자고. 이 시간이, 이 경험이 쌓인 내가 보게 될 세상을 기대하자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또 한편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경험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