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이력서를 넣었다. 아니, 강릉 어느 대학에서 올린 구인 공고에 이력서를 넣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지. 몇 개월쯤 더 쉬겠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씩 구인 사이트를 들어가 보긴 한다. 그러다 그 공고를 발견한 것이다.
내 마지막 연인은 강원도에 살고 있었다. 주선자에게 '카페를 하는 남자'까지만 듣고 별다른 정보 없이 소개팅에 나갔는데, 지금 강원도에 살고 있다고 했다. 카페도 강원도 산골에 있다고 했다. 서울서 나고 자랐고, 서른 살까지 서울서 카페를 하다가 견디기 힘든 순간들에 결단을 하고 내려갔다고 했다. 그냥 나는 이미 첫눈에 마음에 들었었다.
전화해서 어디냐고 물으면, 어느 날은 돌돌이(키우던 강아지 이름)랑 꽝꽝 언 강 위서 놀고 있다고 했고, 또 어느 날은 돌돌이와 밭길을 뛰고 있다고 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뀔 때, 강에 얼음이 녹는 소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흙과 아카시아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비 온 뒤 무거워진 공기의 변화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카페는 느리게 돌아갔지만, 별장같은 집에서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버는 만큼 살면 된다고 했다. 멋진 사람이었지만, 계속 함께 하지는 못했다. 자기가 원하는 속도로 살기 위해, 그곳에서 혼자가 된 사람이었다. 함께 했을 때는 내 속도 때문에 다그쳤으면서, 헤어진 이후에 그 사람의 속도가 자꾸 생각났다.
그 사람에 때문에, 강원도를 알게 되었다. 조금 더 특별해졌다. ‘서울을 벗어나 보면 어떨까’ 구체적이진 않았지만 자주 꿈꿨다. 혹시 내가 그럴 수 있다면, 그땐 그곳이 강원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더니 ‘강릉’이란다. 박은정 씨냐고, 저희 쪽에 지원하신 게 맞느냐고 묻는다. 급여도 직종도 지역도 맞지 않는데 혹시 잘 못 지원한 게 아닌지 확인차 연락드렸다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일단 맞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에는 신입 직원의 급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확히 묻고, 담당 업무에 대해 다시 물었다. 경력이 없는 신입의 연봉은 거의 최저 임금에 가까웠다. 핸드폰 너머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면접 보러... 오실 마음이 있으신가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연봉을 빠르게 열두 달로 나누고, 한 달 생활비를 어림잡아 구해보고, 짧은 시간 머리를 휙휙 돌려 계산을 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 무슨 전화인지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 아빠에게 상황을 전했다. 말릴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었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씀하신다. “왜에~ 가보지 한번!!”
방으로 들어와 다시 생각을 시작했다.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꽤 오랫동안 그려왔던 순간 아니냐고. 1월, 강릉 여행에서 걸었던 길들이 생각났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릴 때 보았던 하늘이 생각났다. 금방 도착할 수 있었던 바다와 소나무가 생각났다. 기다려도 잘 오지 않던 버스가 생각났다. 공장이 없어 공기가 맑지만 일할 곳도 없다는 택시 기사님의 말이 생각났다. 한적했던 번화가가 생각났다. 조용하고 조그만 카페 안을 지키던 그가 생각났다. 밖이 어두워지면 조용히 카페의 문을 닫고, 어두운 길을 운전해서 또 아득히 고요한 자기만의 공간의 불을 켜던 그가 생각났다. 퇴근길 만원 버스를 타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와다다다 쏟아내면 전화 너머로 느릿느릿 차분하게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아침마다 ‘오늘은 일하면서 예민해지지 마’ 카톡을 남겨주던 그 사람이 생각났다.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으로 통화목록을 열어 방금 걸려왔던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버는 만큼 살면 된다고. 지금도 그렇게 자기가 선택한대로 살고 있을 그 사람을 생각했다.
고민했던 순간이 무색하게, 설 연휴 지나고 면접 일정을 알려주겠다던 직원분께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덕에, 자기 속도로 사랑을 주던 그 사람을 실컷 떠올렸다. 그 덕에 조금 구체적으로 서울을 벗어나는 것을 상상해봤다. 그 덕에 다음 번, 다른 곳에서 전화가 온다면 그땐 고민하지 않고 바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네! 면접보러 가겠습니다.”
아, 강원도에 살고 싶다. 어쩌면 정말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곳에 한걸음 쯤은 가까와진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