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골목 끝에 친구가 있었다 : 동루이스 다리 산책

동루이스 다리 산책

by 노니

포르투의 골목을 걷다 풍성히 핀 능소화를 만났다. 서울에서도 초여름부터 피워대던 꽃을 만끽했는데, 24시간을 날아와 여기서도 만나니 이리 반가울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벌써 한 달 넘게 유럽을 여행 중인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기분 좋게 골목을 걸었다.

포르투에서 재회하자는 건 벌써 몇 달 전부터 짜 놓은 약속이었다. '우리 8월 13일에 포르투 시내 볼량 시장 근처에서 만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나라의 낯선 도시에서 만나기로, 동대문서 약속을 정했다는 게 생각해보면 참 재밌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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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을 걸어 약속 장소로 향하는데, 멀리서 친구가 보인다. 건물 외벽에 걸터앉아 정신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살금살금, 몰래 다가갔다. 바로 옆까지 갔는데도 못 알아차리기에, 친구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왁- 불렀다. 깜짝 놀라는 친구를 보고 서로 웃음이 터졌다. 이곳에서 낯익은 이름을 부르는 일도, 낯익은 목소리를 듣는 일도, 어느 쪽이어도 참 신나는 일이니. 우리는 깔깔 한참을 웃었다. 거의 한 달 만이었다. 까맣게 탄 팔과 얼굴, 메이크업도 안 한 얼굴로 친구가 그립게 웃고 있었다. 계속 틀어지고 어긋나는 계획 속에서 혼자 낯선 경험들을 대견히도 잘 해나가고 있던 친구가, 나를 보자마자 금세 징징거린다.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만났는 줄 알았겠지만, 사실은 한 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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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우리는 만난 그 자리에 서서 계속 큰 목소리로 웃고 떠들어댔다. 한참 정신없이 얘기를 쏟아내던 친구를 붙들고 오는 길에 봐둔 길 건너 카페로 향했다. 천장이 높고 매장이 넓은, 현대식 카페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레몬 동동, 나타 하나씩. 이렇게 해서 5유로. 손님도 많고, 가게도 예쁘고. 무엇보다 입구에 있는 통유리 작업장 안에서 나타 빵 반죽하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과연, 에그타르트의 나라답다. 하얀 작업복과 모자를 쓴 직원들이 그 안에서 끊임없이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었다. 잠깐 서서 봤는데, 버터가 버터가, 아주 기함할 정도로 많이 들어간다. 그러니 맛이 없고 배겨. 나중에 가게 이름을 사전에서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뜻이 1. 버터 제조소 2. 버터 상점이다. 버터를 들이붓더니만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 원래 리스본에 있는 나타 맛 집인데, 포르투에 분점을 낸 듯하다. 생긴지 얼마 안 되었는지 실내가 정말 깔끔했다. 주문을 하려는데 메뉴판에 음료 메뉴가 너무 많아서 멈칫 거리며 아이스로 먹고 싶은데, 하고 고민을 하니 친절한 직원이 거기 나와 있는 아이스 메뉴를 하나하나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아메리카노부터 아포카토까지 설명하는 직원의 친절함이라니. 뒤에 사람이 꽤 있었는데 아랑곳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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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많은 애가 동행만 의지하고 떠난 여행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혼자 남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동안 마음고생하며 힘들었던 얘기, 동행의 뒷담화까지. 하고 싶었던 얘기를 아주 보따리에 가득 담아 왔다. 가득 찼던 이야기 짐을 대강 다 풀어내고 나서야 바깥에 해가 저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이제 슬슬 나가서 걸어보자' 도루 강변으로 가보기로 했다.

큰 길을 벗어나면 금세 낡은 골목들이 나오고, 어디선가 지린내가 코를 찌른다. 사람이 사는가 싶은 집들이 다닥 다닥 붙어 있다. 가파른 경사가 힘들어 헥헥 숨이 차 쉬어가려다가도, 여기 너무 으슥한가 싶어 좀처럼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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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이, 분위기에 익숙해진 건지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잘 빨아 널어놓은 옷가지가 조르르 창가 빨랫줄에 매달려 있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빨래들에서 세제 냄새가 날 정도로 이곳저곳 빨래가 걸려 있었다. 조금 더 가니, 이번에는 낡은 담벼락 아래 조르륵 세워져 있는 작은 화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초록이 싱그러운, 정성껏 누군가가 물을 주고 가꾸는 화분이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으슥한 골목 안의 낡은 집들이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따듯한 가정, 가장 편안한 집이겠구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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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편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 골목을 굽이굽이 내려가 1층 다리 입구를 찾았다.

동루이스 다리가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브 에펠의 제자 테오필레 세르그의 설계로 지어졌다는 건 꽤 유명한 사실, 정말 느낌이 비슷하다. 다리를 건너 찻길을 따라 쭉, 또 한참을 올라갔다. 나보다 며칠 먼저 포르투에 도착한 친구가, 언덕 위로 올라가는 근사한 길을 알아뒀다고 해서 친구 뒤를 졸졸 따라갔다. 사람이 많이 없고, 가장 가파른 길을 피할 수 있는 루트라며 자신만만하기에 군말 없이, 감사히 따라다녔다. 몇 걸음 걷고 뒤를 돌아, '저 풍경 좀 봐', 몇 걸음 걷고 또 변한 것도 없을 풍경에 ‘저 것 좀 봐’ 감탄과 감격을 보내가며 지나칠 정도로 신이 나서 걸었다. 마침, 해가 질 무렵이라 주황색 지붕이 주황색 햇빛을 받아 더 주황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으니, 누구라도 이 이국적인 풍경에 마음이 설레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일몰과 강가 풍경이 근사하게 들어오는 뷰 포인트 야트막한 언덕에는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해가 완전히 기울어지고, 눈 아래 도루강이 어둠으로 물들고, 그 주위의 가게들에 불이 하나둘씩 들어오는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비어있는 풀밭에 자리를 차지하고 눕듯이 앉아, 한동안 강가를 내려다보며 감탄해 마지않다가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다리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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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는 관광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 상점과 가게들이 많았다. '돌아다니다가 근사한 곳으로 들어가자' 하는 야심찬 계획으로 중심가까지 나왔건만 그럴듯해 보이는 곳은 이미 예약이 꽉 차 있었고 생각 없이 계속 걷다 보니 들어갈 곳이 없었다. 하. (일요일에 식사를 하셔야 하면 미리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흐흐.) 걷고 걷고 걷다가 다리 근처에 문이 열려있던 가게가 생각났다.

도착해보니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이걸로도 감지덕지. 술 마실 수 있고 안줏거리를 파는 정도.

이렇게, 노천에서 먹을 수 있게 길에 테이블이 깔려 있다. 동 루이스 다리 입구에 바로 있는 펍이었다.

유럽 한 달 여행 동안 와인 실력이 는 친구는, 와인을 나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받침이 너무 예뻐서 계속 들여다보다가 다음 날 볼량시장에서 아줄레주 무늬의 컵과 컵 받침을 샀다.

토스트와 문어 샐러드, 음식은 신선하고 맛있었다. 너무 추워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더 시키고. 유동인구가 많은 동루이스 2층 다리 바로 앞에 있는 가게인데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음식 나름 괜찮았다. 나쁘지 않았다. 부부와 할아버지가 같이 운영하는 가게인 것 같았는데, 엄청 친절하셨다. 할아버지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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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를 하고 다시 다리로 와서 야경을 감상했다.

야경은 아이폰이 담아내지 못한다. 마음이 탁 트이는 풍경을 마음껏 눈에, 마음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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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정신없이 달리던 직장 퇴사 후, 두 달의 여행을 떠난 친구는 나의 첫 유럽 여행 룸메이트이기도 했다. 둘 다 유럽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서툴고 낯설었던 그 순간들을 한없이 추억하고, 펍이 문을 닫을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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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다리에 매달려, 이번엔 내가 고민 중인 회사 문제를 나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얘기를 듣고 친구가 한없이, 한없이 이해해줬다. 그러고보면 친구가 회사 그만둘 때, 나는 얼마나 그 마음을 이해해줬던가. 우리 진짜 수고했다고, 쉬어가도 된다고. 어쩌면 뻔한 위로의 말을, 나보다 한 발 먼저 결단하고 먼저 한 발을 내디딘 친구에게서 들으니 새삼스럽게도 위로가 되었다. 응 맞아, 둘 다 너무 힘들었어. 서로 도닥이며 조금 욕심을 내어 늦게까지 거기에 있었다.

친구와 함께라서 행복하고, 또 조금은 서글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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