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없어서 계속 걸었다 : 포르투의 거리

포르투 카페에서 브런치를

by 노니

여전히 시차 덕인지 발딱 잠에서 깼다. 호스트 gracja는 일이 있어 오늘까지 집을 비운다고 했고, 옆방의 게스트들도 어제쯤 방을 뺀듯하니 이 아침, 이 집에는 나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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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발코니에서 음악을 틀고 앉아 여유를 부리다가 어김없이 아침 산책을 나섰다. 하루 중에서 제일 기분 좋은 시간, 긴 끈에 묶어 놓은 열쇠 꾸러미를 목에 걸고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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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왼쪽 오른쪽을 왔다 갔다 하며, 문이며 벽이며 예쁘고 사랑스러운 풍경을 마음껏 찍었다. 어차피 정해진 시간까지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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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발걸음을 멈춘 곳은 어제 친구가 알려준 카페. 가성비 따지기를 좋아하는 친구답게, 가성비 최고의 카페였다. 아침에 길을 걷다 보면, 일찌감치 문을 연 카페들이 있었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면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 출근하는 차림의 사람들 가릴 것 없이 테이블마다 에스프레소 한 잔씩 올려놓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꼭 카페가 아니더라도 간단히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곳들이 있었다. 다양한 잡화점 한 귀퉁이에서 빵을 팔거나 하는 풍경도 종종 봤다. 그리고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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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타랑 빵도 하나씩 담아 야외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에스프레소는 빵 두 개를 커버하기엔 부족하지만. 이렇게 해서 1.6유로라니, 가격이 은혜스럽다. 금방 입에 털어 넣고 일어나 계속 걸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가끔씩 "Bom dia" 인사를 건넨다. 오래 머문 것은 아니지만, 이곳 사람들은 아주 살갑게 웃어주지는 않는다. 눈만 마주쳐도 인사를 건넨다거나 친절한 미소를 보내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무례하거나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이는 없었다. 도시의 분위기처럼 다소 투박하지만 다감한 느낌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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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흐리다.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멋지다. 슬슬 동 루이스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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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도 오르막이 많다. 올라갈 땐 힘들지만 다 올라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황홀해진다. 어디 멀리 안 가도 이런 풍경을 골목골목에서 볼 수 있으니, 근사한 곳이다. 포르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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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이 필요했던 누군가의 밤의 흔적을 발견하면 재밌어진다. 슈퍼복 3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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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참 징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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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걷다 보니까 상벤투역이 나온다. 그냥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서울역> 같은, 실제로 메트로와 기차가 다니는 역인데 여행자들에게는 관광지 중 한 곳이다. 역 내부의 아줄레쥬 때문에. 이왕 지나는 길이니 살짝 들어갔다. 아침부터 역을 이용하는 사람, 역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북적북적한 분위기였다. 가만히 서서 90도씩 몸을 돌리며 동서남북 사방을 구경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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힝, 그냥 바깥 풍경 다 좋아. 너무 좋아. 보시다시피 이곳은 건물들끼리 신기하게도 벽에 틈이 없이 딱 붙어 있다. 신기하고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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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 천국,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냥 돌에도 타일 무늬가 새겨져 있다. 흐흐. 상벤투역 근처, 길에 놓인 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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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 다리 입구로 걸어왔다. 어제저녁을 먹은 펍을 지나서, 다리를 건넜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한 번씩 까마득해지는 높이다. 다리 중간으로 갈수록 점점 옆의 경치를 감탄하기보다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고 잰걸음 하게 돼버리는. 그런 내겐, 다리 위를 유유히 조깅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진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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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에는 철로가 있어서 메트로가 양쪽 방향으로 지나다닌다. 멀리서 메트로가 지나갈 때는 다리 가장자리로 붙어서 걸어야 한다. 포르투 메트로는 예쁘고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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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높은 곳에 보이는 멋진 건물, 세라 두 필라드 수도원(Monastery of Serra do Pilar)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아침이라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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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을 만끽하고 맨손체조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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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마당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 하늘은 무겁게 흐리고 물빛은 차분하게 짙다. 참 아름다웠다. 도통 멍 때리기가 쉽지 않은 사람인데, 여기선 저절로 멍-하니 있게 되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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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오기 전, 블로그 이웃 보경 씨가 선물해준 책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들고 와 읽었다. 짧은 글들을 짧은 호흡으로 끊어 읽었다. 작은 것에도 자주 숨이 차던 시기였다. 함께 보내온 다정한 편지도 책에 끼어온 덕에 몇 번이나 꺼내 읽었다. 섬세한 문장들에 애처로운 마음이 되는 걸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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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외롭고, 나와 고독한 것 같아서 서글퍼지는 문장들에 하나하나 깊이 빠져가며 읽었다. 일부러 눈물을 내고 나를 못살게 굴었다. 그러고 싶은 풍경이었다. 아직 여행 초반, 몸은 이곳에 있는데 마음은 어딜 부유하고 있는지 자꾸 끌어다 앉혀야 하는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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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수도원 마당을 혼자 차지하고, 일부러 내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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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와서 다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강을 끼고 걷다가, 골목골목 마을이 보이길래 가파른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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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좁은 골목을 터덜터덜 내려오면 1층 다리 입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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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 소박한 집들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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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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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만난다. 포르투, 이 도시를 형상화 한 로고다. 재밌게 읽은 기사가 있어서 조금 발췌해 적어본다.

[만약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포르투는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포트와인부터 전통 음식, 포르투갈 남부 사투리, 루이스 1세 다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를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 고정된 이미지가 아닌 시민 모두가 저마다 다른 '포르투'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여러 개의 아이콘을 제작하고 활용할 것을 권장한 것이다. 여기에 시각적 영감을 준 것은 도시 곳곳에서 물결을 이루는 '푸른 타일''이었다.]

그러니까 '포르투'하면 생각나는 것들을 모아 놓은 로고라는 것. 여기 사람들, 이런 거 참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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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브랜딩의 일환으로 시민 각자가 생각하는 포르투를 고유의 푸른 타일 컬러 아이콘으로 기획해서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 초기 20개에서 시작 현재는 70여 개까지 늘어났고, 이 각각의 아이콘은 단독으로 사용하거나 위의 사진처럼 재배치되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며 포르투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고 한다.

참 신기한 도시다. 2000년이 넘는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래되고 낡은 골목과 건물들 사이에 지나치게 감각적이며 현대적인 것들이 공존하고 있다. 나에겐, 이질적이기보다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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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1층까지 내려와 다리를 건넜는데, 숙소로 돌아가는 지도를 찾아보니 2층 입구로 다시 올라가는 코스를 안내한다. 지도로만 봐도 굽이굽이, 아마도 꽤 가파른 길이 예상된다. 걸어보자, 이쯤 되니 설렁설렁 산보에서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인중에 땀이 맺히는 파워워킹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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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낡고 지저분한 골목 사이사이 초록 화분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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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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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대며 올랐다. 꼭대기 도착, 다소 민망할 정도로 숨이 찼다. 운동을 제대로 했으니, 이제 브런치를 먹으러 가봐야겠군. 도착한 첫날부터 찜해놓은 숙소 옆 카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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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간판도, 로고도 너무 마음에 든다. 브런치 메뉴가 따로 있길래, 그걸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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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 바닥 센스 무엇. 아 예쁘다. 카페의 시그니처 타일과 포인트 컬러 하늘색이 의자 다리 끝에 살짝 묻어 있다. 예뻐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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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한 내부, 천장이 높고 공간이 넓은 편. 번화가가 아니라 주택가에 위치해 사람이 많이 없는 편이라 조용했다. 메뉴판 하늘색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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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메뉴가 나왔다. 오렌지 주스와 샐러드 한 움큼, 토스트. 토스트의 종류는 3가지 중에 고를 수 있다. 나는 체다치즈였던가. 맛없을 수 없는 조합이니 맛있게 먹었다. 포인트 컬러 맞춘 접시, 쟁반 시트지. 중간중간 주인아저씨가 스윽, 내가 얼마나 먹었는지를 확인하셨다. 천천히 나를 몇 번 힐끗거리고 나서 내 속도에 맞춰 기다렸다가 물어보셨다. 다 먹었냐고. 싹 비운 접시와 쟁반을 가져다 드리니 뚝딱뚝딱 커피를 내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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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안을 구경하고 있었더니 잠시 뒤 다시 한 쟁반을 차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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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푸짐해. 커피 종류는 선택 가능, 라테와 초코 케이크와 크루아상과 스폰이다. 이제 보니 이 브런치 세트 혼자 먹을 양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접시를 보면서 겁나 머뭇거렸더니 주인아저씨가 조심히 물어보신다. "요거... 싸줄까?" 어쩜 내 마음을 그리 잘 알아주시는지. 스콘과 크루아상 접시를 건네드리고 라테와 케이크를 먹고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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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다 먹고 일어났더니, 잼과 버터까지 듬뿍 담아 포장해두신 봉투를 내미셨다. 이게 무려 9.50유로니, 만 이천 원쯤 되는 금액이다. 겁나 푸짐한 브런치 한상차림. 진짜 포르투 만세다. 나오기 전, '유어 카페 이즈 쏘오 러블리' 한국말 하듯 강력한 발음으로 아저씨께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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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카페에서 맛있는 브런치를 먹었더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져 있었다. 집 옆에 이런 카페가 있다니 gracja의 숙소가 더 마음에 들었다. 숙소에 들어가서 꼼꼼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후에는 또 친구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산책만 하고 들어왔는데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이곳은 좀처럼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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