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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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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디브라운 Sep 28. 2017

마담, 당신 늦지 않았어요

에필로그 : 파리의 여름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코 앞에 두고 마지막 공항 검색대. 처음 떠나 온 혼자 여행, 영어도 자신 없으니 수속을 편히 끝내고 맘 놓고 쉬려고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했다. 문제없이 통과 통과 통과, 마지막 검색대만 남겨놓았는데도 내가 좀 서둘렀나 보다. 키카 큰, 흑인 직원이 나를 지긋이 1-2초 정도 내려 보더니 말한다.


"마담, 당신 늦지 않았어요."


맞아 나 늦지 않았지, 머쓱하니 웃었다. 여행의 마지막, 싱숭했던 마음이 조용히 기분 좋은 울림으로 차분해졌다. 그러게 말이다. 늦지 않았다. 34살, 스스로에게 꽤 충실하게 살았지만 아직 미혼, 비어있는 잔고, 여전히 고민하는 진로.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으려고, 서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세상의 기준들에 따라가려고 버둥댄 적이 왜 없겠는가.

그런 내게 묵직하니 울림을 준다. 계속 곱씹어 본다. 맞다, 나는 아직 늦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 얘기를 전하는데, 엄마 아빠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목이 콱 막힌다. 환갑을 넘기고 갑자기 은퇴하신 아빠, 그 뒤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된 엄마.


나뿐 아니라 우리 중 그 누구도 늦은 사람은 없다. 이야기를 듣는 엄마의 눈이 그렁해진다. 엄마, 아빠도 늦지 않았는 걸. 그러니 앞으로의 순간들도 필요 이상으로는 서두를 이유는 없다.  모두, 불안해하지 말고 그저 자기 속도로.



                                      

서른넷,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이것 또한 나에게만 특별한, 사실은 흔해 빠진 여행 이야기다.


생각해보면 회사 안에서는 걸어 다닌 적이 거의 없었다. 늘 종종걸음으로 뛰듯이 걸었다. 평일 퇴근 후 약속은 열이면 예닐곱 번은 깨거나 미뤄야 했다. 갑자기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결정되는 야근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몇 년간 빨간 날을 제외하고 단 하루의 연차도 없었다. 회사에 입사한 뒤로 딱 한 번의 감기 몸살 결근을 제외하고는, 지각도 조퇴도 해본 적 없었다. 대단히 대단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는 회사를 보는 것은 꽤 즐겁고 짜릿한 일이었다.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일들을, 그때는 단지 그 기쁨만으로도 해냈다. 내 젊음, 치열하고 무식했다. 우리 회사 바빠, 나 바빠라는 말은 푸념인 동시에 자랑이기도 했다. 일 년에 딱 한번, 일주일의 여름휴가. 주변에서 모두 해외여행을 권했다. 패키지 동남아 여행, 패키지 유럽 여행, 일본 출장 등이 내 경험의 전부였다. 왜 굳이 여행을 가야 하는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과연 그 돈을 들여서, 그 시간을 들여서 그 과정들을 해낼 수 있을까. 혼자 의심했다. 휴가를 3달쯤 앞둔 어느 날, 사장님께서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이번엔 미루지 말고 꼭 여행 다녀오라며  항공비에 보태라고 50만 원을 주셨다. 시작은 그거였다. 50만 원을 받았으니 안 갈 수도 없고, 그래서 다음 날 쯤 항공권을 결제했다.


파리행 아시아나 비행기, 토요일에 출발해서 토요일에 돌아오는 6박 7일의 여행, 나에겐 어쩌면 첫 여행.




퇴사 문제가 정리되고 식사 자리에서 사장님이 말했다. "그때 파리를 떠밀어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농담이었다. 같이 웃었다. 우민화 정책도 아니고. 물론 나도 농담이다. 자격지심이 좀 섞이긴 했지만.


정말 나는 그 여름의 여행 이후 정신없이 떠났다. 늦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조금씩, 연습을 했던 것 같다. 언제고 떠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떠나는 연습. 이것은 서른넷의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해가 바뀌어 봄, 다시 여름 또 가을로 이어지는 내 여행의 이야기이다.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싶지만 자의식이 넘치는 사람이라서 때로는 모두 아는 것을 나만 아는 비밀을 털어놓듯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흐흐.


어쩌면 잠시라도, 누군가가 멈춰설 수 있는 말을 건네 본다. 어쩌면 늘, 누군가가 듣고 싶었을 말을 건네 본다. 어쩌면 한 번쯤은, 누군가가 생각해봐야 할 말을 건네 본다.


" 마담, 당신도 늦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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