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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디브라운 Apr 13. 2018

우리는 모두 도움이 필요해 : 제주도

제주는 뭐가 좋냐면

얼마만의 파란 하늘인지, 누리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외출했다. 아. 좋다.

오전에 사모님이랑 만나 성경공부를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져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짐을 미리 안 싸놓은 탓에 그제야 가져갈 옷을 고르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가져갈 옷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자라면 공감할껴. 미리 준비 안 해 놓은 나 자신을 탓하며. 대강 옷들을 챙겨 캐리어에 쑤셔 넣었다.

도착하고 2-3일 계속 비 그림이 있길래 트렌치코트를 챙겨 입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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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수속 공포증. 괜찮아질 때도 됐는데 또 엄청 서둘러 나갔다. 국내선을 타면서도.

캐리어를 끌고, 배낭을 메고 집 밖으로 나왔는데, 어째 동네가 좀 달라 보인다. 내가 미세먼지에 너무 민감한 걸까. 희뿌연 먼지가 걷힌 우리 동네가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세상에, 봄 볕이 이렇게 기분 좋다니. 세상에, 버스의 창문을 활짝 열 수 있다니. 열린 창문 사이로 살랑살랑 들어오는 기분 좋은 봄바람 못 잃어어어어. 세상에, 노랗고 하얗고 부농부농한 봄 꽃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어찌나 한눈에 들어오던지. 버스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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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누리던 소중한 것들을, 잃고 나서야 사무치게 깨닫게 되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나. 잃고 나면 깨달아도 손 쓸도리가 없으니 후회만 남게 된다. 다행히, 아직 완전히 잃지 않은 거라면 개선의 여지가 있다. 맑은 하늘, 맑은 공기 못 잃어어어어.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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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믿음도, 사랑도, 내가 노력해서 얻은 건 하나도 없었는데.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려보내듯 놓치고 나서야 깨닫는다. 당연히 누리던 소중한 것들. 온전하게 사랑받는 자의 그 충만함을. 아직 완전히 잃지 않았으니 돌이킬 수 있다. 다행이다. 나는 헷갈렸지만, 아버지는 그대로 계셨다. 사랑은 여전히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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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도착, 모바일 탑승권까지 발급받은 탓에 이건 뭐. 기차표 끊듯 들어와 앉았다. 기내 수화물 10kg에 맞춰 정말 딱 집요하게 10.00kg으로 싸온 캐리어를, 불안한 마음에 다시 재보고. 그 무게에 백팩까지 포함되는 건가 불안해하고. 크크크.

참말로, 끝까지 예쁘기 있음? 천천히 해가 떨어지고, 완벽히 어둠이 내려앉을 동안에도 하늘이 설레게 예쁘다.

저녁 8시 25분 비행기였다. 도착하면 9시 30분은 될 거고. 그러고 나서 10시가 막차인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가 끊기면 택시도 있지만. 늦은 시간에 초행길을 택시라니, 항상 여행지에 도착해서 숙소에 들어가기 전까지가 제일 신경 쓰였다. 늘 그랬듯 무사히 숙소까지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불안해. 혼자 여행을 아무리 해도, 처음 해보는 건 매번 불안해한다. 괜찮다 괜찮다 말해줘도 스스로 해보기 전까지는, 에효 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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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15분 지연 소식은,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됐다. 버스는 진짜 탈 수 없겠구나. 포기하고나니 되레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전히 택시를 타는 건 무섭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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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한 시간 만에 제주 공항에 내렸다. 제주 항공은 세 번째지만 늘 도떼기시장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강릉 가는 버스표 보다도 싸게 제주를 가니 군말 않코 가야지 싶었지만 정말이지... 뒷좌석의 아이는 등받이를 연신 발로 차고, 뒷좌석 사선에 엄마에게 안긴 갓난아이는 오열을 한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읽으려던 책을 덮고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아 눈만 감고 있었다. 빨리 나가 버스를 타려고 수화물도 들고 탔고, 좌석도 앞쪽으로 지정했더랬다. 내려서 시간을 보니, 이게 웬일. 앞자리에서 너무 빨리 나온 탓에 얼추, 버스랑 시간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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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45분 도착, 5분 안에 수속을 마치고 나가서 어리바리 2번 게이트로 갔는데 눈 앞에 마침 버스가 도착, 무사히 막차를 타버렸다. 럭키. 좋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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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을 달려 환승해야 할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여기서는 10분 정도 택시를 타면 숙소에 도착할 수 있다. 어두운 밤, 캐리어에 배낭까지 짊어지고 애매한 정류장에 덩그마니 내린 마지막 손님이 불안했는지 버스 기사님이 가시려다가 다시 앞 문을 열고 물으신다.
"이게 막찬데 다른 버스 기다려? 어디로 가게?"
"저 토산리 가는 택시 타려고요."
"택시는 여기 말고, 죽 가서 오른쪽으로 가서..."
택시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셨다. 그러게, 그러고 나서 둘러보니 여기서는 택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안 알려주셨으면 그것도 모르고 계속 기다리고 있을 뻔했네.
"감사합니다!!!"
깜깜한 길 위에서 기사님의 따뜻한 관심이 어찌나 반갑던지.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아니, 어두운 길도 덜 무서웠다. 씩씩하게 캐리어를 끌고 몇 걸음 갔는데 기사님이 금방, 다시 나를 부르신다.
"택시 타는데 가서 내려줄게. 타."
괜찮다 거절할 법도 한데, 넙죽 올라타버렸다. 럭키, 감사합니다. 아저씨가 말씀하셨던 방향으로 가서 코너를 도니 택시가 몇 대 줄지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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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 택시 있는 곳까지 가서 기사님께서 앞문을 열고 내려주셨다. 창문을 빼꼼 내리고 내다보시는 택시 기사님께, 마치 아는 사람을 부탁하듯, 툭 말을 건네셨다.
"토산리 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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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말 깜깜하고 낯선 시골길을 따라 택시를 타고 굽이 굽이 들어가는데도 하나도 안 무섭고 기분이 참 좋았다. 요금 미터기 안 켜신 거 빼고. 조금 바가지요금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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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도 넘어서 도착한 숙소, 바깥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반갑게 호스트에게 인사하고, 짐을 풀었다. 저녁 안 먹고 왔으면 라면을 끓여주신다는데 또 거절 않고 넙죽 잘 먹겠습니다, 했다. 먼저 마시고 있으라며 직접 담근 한라봉청을 넣은 시원한 주스를 주셨다.

그리고 진라면 뚝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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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왕복 특가 20,200원 여행. 밤 비행할만하다며, 무사히 숙소에 도착하고 나니 허세가 시작됐다.

짐을 풀고, 씻고. 책 좀 읽다 자야지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 거의 눕자마자 잠들었다. 언젠 안 그랬겠는가마는,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는 제주 여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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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비슷한 듯, 그러나 또 새로운 여행을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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