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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디브라운 Apr 30. 2018

살아보니 살아지더라 : 제주도

제주는 뭐가 좋냐면

어젯밤도 바람이 꽤 거칠었다. 오늘은 날이 어떠려나,

호스트의 집 현관에 이렇게 귤(?)이. 천혜향인가. 떠나는 날, 따로 싸주셔서 먹어보니 되게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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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눈도 비비기 전에 묵상집을 주섬주섬 꺼내 펼치고, 묵상을 마치고 질문을 하나씩 품고 산책을 나섰다. 여행에선 이게 된다. 하하. 이 날도 하늘이 좀 흐렸다.

괜히 동네 멍뭉이를 건드려서...
나를 10분은 따라오는데, 달려들까 봐 겁내다가 사실은 저 멍뭉이가 나를 더 경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너를 해코지할 마음이 전혀 없어' 하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썼다. 졸졸 따라오던 백구가 어느샌가 자기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할망들이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셨다. 숙소가 있는 곳이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보니, 확실히 하루가 일찍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흐린 바다. 오늘은 ‘한올’을 들으며. 운동이라기에는 너무나 운동 안되는 속도로 거닐었다.  

바다 근처가 너무 예뻤다. 계속 어제 4.3 평화 공원에서 알게 된 사실들이 머리를 스쳤다. 표선 해변 또한 학살터라고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가라앉은 날씨,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았다. 휘적 휘적, 힘을 주고 걸어야 하는 정도의 바람이 부는 아침. 그런데 또 바람이 차지는 않다. 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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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근처에 초등학교 표지판이 있길래 조금 더 걸어 구경 갔다. 8시 30분, 딱 아이들 등교 시간이라 낯선 이가 어슬렁거리다 오해라도 받으면 어쩌지 생각하고 갔는데 개미 한 마리 없다. 오늘이 주말이었나 순간 생각했다. 교문도 담도 없는 시골 학교 풍경은 정겹지만 운동장에 아이들이 없으니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었다. 마을에 원체 아이들이 없는 걸까. 아님 너무 일찍 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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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나왔다. 꽤 길어진 아침 산책 시간에 맞춰, 내가 편한 시간에 차려주셔서 감사했다. 게다가 꽤 많은 양이라서 다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진 채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혼밥을 그닥 싫어하지 않는 거지 좋아하는 거라고는 말 못하겠다.
내가 차려주신 아침을 먹는 동안 호스트가 꼭 맞은편에 앉아 있어 주었다. 그러면 시추는 내 옆으로 와서 의자에 올려달라고 박박 긁어댔다. 아침을 먹는 동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사정을 대강 헤아리고, 새로운 사람의 이야기는 꽤 즐거우니까. 이런저런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자기가 호스트인 줄 아는 게스트들이 있어 가끔 힘들다는 얘기가 나왔다. 오. 신기한 사람들이군 했는데, 도착한 첫날 괜찮다는 대도 굳이 주방에 성큼 들어가 내가 먹은 라면 냄비를 설거지했던 내가 생각났다. 뜨끔. 호스트가 10명이면, 대하기 힘든 게스트 종류(?)도 10명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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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행선지는 위미리. 동백 군락지가 있는 곳. 제주에 와서 동백과 사랑에 빠졌지만 동백 군락지에는 가지 않을 예정이었다. 이상한 심보.

몇 달 전 수업에서 만난 제주 관련 책을 쓰신 작가님이, 제주 여행을 한다면 추천해주고 싶은 곳 1번으로 위미리를 꼽으셨었다. 위미리는 뭐가 좋으냐고 여쭤봤더니. 그냥 마을이 예쁘다고, 그래서 마을 초입 정류장에서 내려 마을을 걸어 다니기로 했다.
속상하지만 미세 먼지 수치가 좋지 않은  날, 마스크를 챙겨 끼고 걸었다. 다행히 비는 완전히 그쳐서 기분 좋게 걸었다. 굳이 군락지를 가지 않아도 집집마다 동백나무 한 그루쯤은 기본적으로 심어져 있었다. 위미리는 동백이 풍년. 원 없이 동백 구경.

원 없이 동백 사진 찍기.

조금 걷다 보면 금방 바다가 나온다. 조용한 바다를 따라 걷다가.

올레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멀리서도 이 표식만 보면 어찌나 반가운지. 나 제대로 걷고 있구나 하고 안심하게 되는. 리본이 가로로 똑바로 날리고 있는 걸 보니, 이 날의 바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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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카페가 있다고 했는데, 생각할 때쯤 와랑와랑을 발견.

예뻐요 예뻐. 바깥 풍경이 정말 기분 좋은 카페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생각해보니, 카페를 많이 안 갔다. 힙한 공간을 찾는 것도 점점 일이라... 그래도 한 번씩 잘 꾸며 놓은 곳에 가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이렇게 지나다 좋은 곳을 발견하면 길에서 돈 주운 심정으로 들어갔다. 헤헷. 창밖이 사방 어디고, 기분 좋은 풍경이라서 바깥이 보이는 자리에 조금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채이는 게 동백. 쓸어내도 넘치는 동백이 온 바닥에 널렸다. 꽃 구경 실컷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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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기다리며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할망. 허리 한번 안 펴고 딴짓 한번 안 하고 버스 기다리는 30분을 꼬박 일만 하신다. 마침 내가 간 때가 고사리 철이라고 했다. 제주 고사리가 유명하다고.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으니 사방에서 벚꽃이 날린다. 기분 좋은 봄 제주(미세먼지만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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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귤 맞는가요. 끝까지 제대로 된 정체는 알지 못했지만 길마다 이렇게 예쁜 열매 맺은 귤들이 주렁주렁. 몇 정거장 가서 위미에 있는 서점 라바 북스에 들렀다.  

엽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쭈르륵 세 장을 이어 붙이면 제주의 기막힌 풍경이. 종달리 수국길, 비자림 숲길, 그리고 각각의 예쁨을 잘 살려 모두 조금씩 다르게 그린 다채로운 해변의 풍경까지,

이거 너무 사고 싶게 예뻤는데 32,000원이라니 살 수 없었다.

여행자를 위한 서점 라바 북스, 이곳의 손님은 대부분 여행자라고 했다. 많은 독립서점을 다녀본 건 아니지만 서울의 어느 서점보다도 공간이 예뻤다. 입구 쪽에는 식물이 많았는데 모두 판매하고 있었다. 식물도 판매하는 서점.

평소에 도서관 가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여행이 길어지면 여행지에서도 꼭 도서관에 가는 편이고. 도서관 주간을 앞두고, 도서관에 대한 애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즈음이라 이 책을 구매했다. 괜히 떨어진 벚꽃 위에 놓아두고 감성 사진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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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버스를 타고 밥을 먹으러 갔다. 버스를 타니 어김없이 기사님께서 말을 거신다. 어디 가냐고. 밥 먹으려고요, 했더니 어느 맛 집에 가냐고. 마침 졸렸는데 얘기하면서 잠을 좀 깨야겠다고 하시면서 말을 엄청 많이 걸어주셨다. 흐. 재밌는 기사님이셨다.

다 괜찮은데, 고약한 게 시간표란다. 풍경 구경도 하고 숨도 돌리고 좀 천천히 다니고도 싶은데 시간표 때문에 그러지를 못하신다며, 버스 운전 이거 엄청 힘든 거라고 딸뻘인 손님한테 내내 넋두리를 하셨다. 내가 바로 그 시간표 보면서 발 동동 구르는 승객 1이니까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이야기를 들었다. 기사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기사님 마음이 또 너무 잘 이해가 간다. 정류장에 차를 세워두고 뛰어서 화장실 다녀오는 기사님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좋지는 않고. 그치만 버스 없으면 발이 묶이는 사람들에게는 이 배차시간이 좀 너무 중요하고.

자신이 쓴 선글라스는 버스에 탔던 독일 사람이 주고 간 거라고, 독일 사람들 괜찮다고 하시더니. 금방 근데 이거 하나에 이천원쯤 해 보이지? 하신다. 그런데 그나마도 어떡하다 깔고 앉아서 알이 조감 깨졌다고. 흐흐. 안경 알을 바꿀래도 버스 기사 돈 많이 못 벌어서 못 바꾼다고 하신다. 못 하는 게 많은 기사님.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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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던 곳은 바굥식당 이었다.
다음 행선지까지 가는 길에 있길래 미리 살짝 시간 예약을 하고 들렀다. 한 상 맛있게 먹고.

메뉴는 딱 하나, 다른 건 주문할 수 없다. 일주일에 한 번씩 메뉴가 바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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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 앉는 바람에 길 건너에 있는 가게들이 보면서 밥을 먹었다. 길 건너에 세탁소가 하나 있었는데, 세탁소 문에 "세탁물의 상태를 말해주십시오"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국가 공인 뭐 자격증에 관한 것들도.

연초에 집 앞 세탁소 사장님과 싸우고(?), 한 블록 건너의 동네 세탁소를 새로 뚫었다. 얼마 전 봄 아우터들을 줄줄이 맡겼는데 뭔가 상태가 썩 마음에 들질 않았다. 노부부가 평생을 운영하신 가게라고 했다. 친근하고 가격도 저렴하고, 그런데 그건 그거고. 세탁을 마치고 찾아온 옷 상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트렌치코트 허리 끈 떨어진 걸 보시고 꿰매 주신다더니, 찾아와 보니 그대로, 금방 꾸깃꾸깃해지는 리넨 재킷이긴 하지만 뒷면에는 여전히 가로 줄이 그어 있고, 보풀 나는 소재의 겉옷에 보풀 제거도 전혀 안 해주시고, 단추에는 세제인지 하얀 가루 같은 게 고여있고. 갸웃 갸웃하면서도 내가 너무 까탈스러운 고객인 건가 싶어 그냥 몇 번 더 갔다. 운동 갔다 찾아오기 좋은 위치라 그냥.
어는 날 운동 끝나고 엄청 후줄근, 씻지도 않고 들렀는데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임신했어?" 할머니 아웃.
마음에 꼭 들게 세탁을 해주는 세탁소가 집 근처에 있는 건 행운이다. 마음에 꼭 드는 분식집이 집 근처에 있다는 건 행운이다. 카페는 두 말 할것도 없고. 없으면 할 수 없지만 있으면 참 행운인 거다. 마트가 집 근처에 있고 역이 가까운 것도 무지 중요하지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면서 맛있게 밥을 먹었다.

밥 먹으면서도 먹을 생각. 창 밖으로 보고 있던 맞은편에 고로케 집에 들렀다.  고로케 엄청 좋아함. 고민하다가 팥, 김치, 고기 고로케를 샀다.

맞은편에서 본 바굥식당. 간판이 아기자기....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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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에서 엄청나게 힙한, 이제 막 오픈한 카페를 발견하고는 찜해놨었는데. 도착해보니 오늘 문을 안 연듯. 창밖에 매달려 내부를 들여다보다가 이제 어째야 하나 하고 있는대 길 건너편에 버스가 오길래 생각 없이 뛰어서 탔다. 내가 타고 온 버스 번호랑 같다고 생각하고 얼른 올라 탄건데 검색해보니 앞 두 자 리만 같고 끝자리가 달랐나, 그랬다. 여하튼 잘 못 탄 거였다. 그저 버스 오는 것만 보면 마음 급해져서. 흐흐ㅡ. 노선을 죽 보니 중간에 시장이 있길래 타고 가다가 시장에 내려서 잠깐 시장을 구경했다. 혼자 하는 시장 구경만큼 별 재미없는 것도 없다. 내가 시장 구경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건지, 혼자라서 그런 건지. 여튼 쓸쓸히 시장 구경을 마치고 주전부리와 흑돼지 김밥... 을 사서, 집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아직 환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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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생각보다 늦게 마을에 도착했다. 비도 오는데 설상가상 마을 입구에서 핸드폰도 꺼졌다. 또 말하지만 시골 마을이 깜깜하기가 겁 없는 내가 무서울 정도니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어떻게 가면 집이 나올 거는 같은데, 너무 어두우니까 아예 길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왼쪽이더라 오른쪽이더라. 다시 도로로 내려가서 편의점에 가야 하나 어떡하나. 어쩌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카페가 생각났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카페 위치를 알아 둔 터라 마을 초입에 골목 안 쪽에 있는 카페를 찾아 들어갔더랬다. 따뜻한 라테를 테이크아웃하고, 대강 충전을 하고 나와서 근처 숙소를 찾아가는데 1분쯤 걸었을까, 다시 또 금방 핸드폰이 꺼졌다. 이놈의 아이폰. 카페에 다시 들어가 좀 전에 커피 테이크 아웃한 사람인데요, 하면서 잠깐 충전 조금만 더 하다 가겠다 했더니 대강 내 상황을 보시고 보조 배터리를 빌려주신단다. 이거 가져가세요, 혹시나 또 꺼지면 불편하시잖아요. 이 센스. 비 맞은 몸에, 춥고 피곤하고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냉큼 "감사합니다" 보조배터리를 받아 들고 집에 왔다.

어제의 보조 배터리를 돌려드리기도 해야 하고 겸사 겸사 카페에 들렀다.  

독특한 분위기의 카페,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여기 있어주셔서 감사해요. 숙소 근처에 카페가 있다니. 여행 전 상상 못한 호사다. 차 없는 내가 깜깜하게 해가 질 때까지 카페에 있다가 집에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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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익혀놓은 길을 따라 무사히 숙소에 돌아왔다.

동네에서 제일 밝은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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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사온 것들을 차려 밥을 먹고 씻고 누워서 빈둥빈둥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제일 좋은 시간.

# 꾸미는 일이 좋은데 엄마는 내가 사치만 부린대요. 맨날 꾸미고 싶은데 어떡하죠.

이녁 마음대로 할 거주 무신... 사치고 뭐고 마음대로 해사주. 어멍이 잔소리하는 것이, 그것이 사치라.

# 가끔 가족도 애인도 친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외로워요 할머니는 외로울 때 어떻게 하시나요

외로움은 아무도 이해 못한다. 이녁냥으로 알앙 촘아야지. 그걸 하소연해서 해결해 줄 사람이 어디 이시느니? (...) 외로운 것은 아맹 말을 고라도 나밖에 모르는 거라이. 놈이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한 거. 것이 당연한 거. 경해도 살암시난 다~ 살아져라. 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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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제주 매거진 iiin에 실린 할망의 상담 코너. 코너 제목이 뭐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기발하다. 제주의 할망에게 젊은이들의 고민 상담을 듣는 코너였다. 읽는데 코 끝이 몇 번이나 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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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을 겪고도 무슨 일을 겪고도 살다 보니 살아지더라 하는 말에 위안 받는 고약함. 창문을 덜컹이는 바람 소리를 자장가 삼아 이 밤도 고민 상담을 받고난 개운함으로 푹 골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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