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적게 일하고 적게 벌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런 삶을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반쯤은 내 선택과 의지로 이렇게 되었다. 그런데 적게 일하고 적게 버는 이 삶! 이렇게 살아보니 너무 만족스럽다.
한때는 피값으로(?) 돈을 벌 때도 있었다. 내 시간을 쏟아부어서, 내 건강을 갉아먹어가며 일을 했다. 퇴근할 때 동기들이랑 자주 하던 말이 '우린 정말 우리 목숨값으로 돈을 벌고 있는 것 같아'라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대단한 돈을 벌었던 건 아니다. 화장실도 제때 못 가고, 밥도 잘 못 먹어가며, 오버타임은 당연한 일로 여기며 살 던 그때. 날 선 선배들의 공격적인 말들과 과중한 업무와 응급한 일들로 마음도 몸도 너덜너덜 해졌던 그때. 그 당시에는 바빠서 월급이고 뭐고 제대로 확인도 못하고 지나갔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단한 돈을 받는다 해도 크게 위로가 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돌고 돌아 예상치 못하게 지금의 직장에 오게 되었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여유롭게 지내던 시절, 고용노동부에서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라고 한소리를 들었다. 실업급여 기간을 꽉 채우고 취업하고 싶었지만 재촉에 떠밀려서 일단 몇 군데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중에 한 곳이 집에서 무척 가까운(지하철역 1 정거장, 걸어서 25분) 곳이었는데, 근무시간이 9시부터 4시인 데다가 주 4일 근무였다. 지금 당장 취업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생각하며 지원했다. 지원하고 다음날 바로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고, 감사하게도 마음에 들어 해 주셔서 얼떨결에 금방 출근을 하게 됐다. 사실 그 당시 생각으로는 '남은 실업급여 못 받아서 아깝다'라는 마음과 '여기서 뭐 얼마나 오래 있겠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은 천국이구나 바로 깨달았다.
일단 집이 가깝다는 것은 굉장한 메리트였다! 여태 지옥철로 1시간씩 지하철 여행을 다니며 출퇴근을 해왔던 나는 늦잠을 자도 택시로 8분이면 직장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너무 감탄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운동삼아 일찍 나와 25분쯤 걸어가면 되는 출근길. 지하철 한정거장이라는 거리는 감동스러웠다.
그리고 근무 시간이 짧으니 나를 위한 시간을 쓸 수 있었다. 남는 시간에 배우고 싶었던 캘리그래피도 배우고, 사람들을 만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했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쓰니 삶이 풍성해지는 느낌이었다.
일을 할 때도 업무가 과중하지 않다 보니 스트레스가 없었다. 출근해서 내려먹는 모닝커피, 점심 먹고 나서 동료와 함께 산책 한 바퀴, 잠깐 틈이 날 때 서로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 근무시간이 여유가 있다 보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다 보니 동료들끼리 서로 날 선 말들을 주고받을 일도 없고 서로 도우며 업무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아는 분이 "일을 조금만 하고 돈을 버니 정말 능력자다"라고 하셔서 "조금 벌고 많이 벌어야 능력자죠! 하지만 적게 일하고 적게 버는 지금도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가끔은 내 커리어에 이게 괜찮은 건가 걱정도 되고, 하루라도 젊을 때 더 열심히 일하고 많이 벌어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도 된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로부터 오는 충만함을 놓칠 수 없어서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 있다.
삶의 모양은 가지각색이고,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의 선택도 개개인의 우선순위와 삶의 가치에 따라 달라서 무엇이 더 좋다 결론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게으른 나무늘보 같은 나는 적게 일하고 적게 버는 이 삶이 참 만족스럽다. 그러기에 오늘 하루를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꽉 채워가며 언젠가 나도 '적게 일해도 많이 버는 삶'이 되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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