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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 일어나라!

15. 삶과 죽음

by 한평화

딸 정희의 입장에서 엄마인 나를 생각해 보니 좋은 엄마, 이해심 많은 엄마는 아니었다. 나도 실수가 많은 엄마였다. 이만큼 살았으니 눈을 감는다 해도 억울한 일은 아니다. 배가 아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진통제를 찾아먹었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참을 잔 것 같았다. 어디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났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요. 너무 늦게 오셨어요. 위암 초기입니다. 갑자기 나빠지셨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별다른 일은 없었는데, 위염으로만 알았어요.”

“큰 병원으로 바로 가셔야 돼요. 지체할 수가 없어요. 병원으로 연락해 드릴게요.”


복희는 왜 여기 병원에 있는지 유추해 보았다. 자신이 진통제를 보고 잠잔 것은 기억이 났고 그 후로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 사이에 아들이 왔을 것이다. 잠이 막 들라할 때,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났다. 재국의 딸, 숙진이 복희에게 안부전화를 했을 것이다. 숙진을 만난 후로 자주 전화가 왔었다. 전화를 받지 않자 숙진이 아빠인 재국에게 연락을 했고 재국은 정도에게 연락하였을 것이다. 복희는 아들과 함께 다니던 동네병원에서 준비해 준 병원차로 종합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재국과 숙진은 승용차로 뒤따라갔다.


복희는 환자복으로 갈아입을 때, 바지 주머니에 숨겼던 정희의 편지를 찢었다. 쓰레기통이 안 보이자 찢은 편지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정희에게 늦게라도 신뢰를 보이고 싶어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었다. 숙진이 환자복으로 입혀주었다.

“어젯밤에 긴급조치는 다했습니다.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몇 시간이라도 일찍 왔었더라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의사가 말했다.

“현재 상태는 어떠한지요?” 정도가 물었다.

“위암 초기입니다. 위가 많이 상했어요. 다른 기관도...”

정도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 검사를 몇 가지 더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정도는 고개를 숙였다.

검사만 해도 네 가지 이상을 받았을 것이다. 복희는 토하고 지쳐있었다. 축 늘어져 침대에 쓰러졌다. 정도는 죽은 듯 기척도 없는 엄마 곁에 가서 숨은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MRI 검사까지 다 했습니다. 암 초기인데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위염에서 위암으로 번지는 것이 너무 빠르네요.”

“옆에서 가족이 용기를 주셔야 기운을 빨리 차리고 수술할 수 있어요.”

재국과 숙진은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인사하고 떠났다. 의사와 정국은 복희가 회복되는 대로 수술하기로 했다. 복희는 회복을 기대하며 먹고 자고를 계속했다. 몸이 좋아지자 수술날짜를 잡았다. 위암 초기니까 퍼지기 전에 그 부위를 제거한다고 했다. 수술 결과를 봐서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는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차갑고 불빛이 환한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대기 환자도 많아 순서를 기다렸다. 보조 의사는 복희의 이름과 수술하는 부위를 물으며 재차 확인했다. 정희 생각이 저절로 났다. 정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다 괜찮으니 여행 잘 갔다 오라고. 마취약이 들어오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복희는 다시 꿈을 꾼다. 꿈속에서도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삶과 죽음이 높고 낮음 없이 한 좌표 안에 있었다. 죽음은 왼쪽 좌표에서 오른쪽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수학의 그래프가 보였다. 삶은 왜 왼쪽인 마이너스 좌표로 인식이 될까? 죽음은 오른쪽 좌표에 있었고 그 끝은 천국이었다. 삶은 짧고 유한이고 죽음은 길고 무한이기 때문일까? 왼쪽 끝을 보았다. 마이너스 좌표 끝에는 지옥이 있었다. 나는 그 중간인 0(제로)에 서 있었다.

천사가 나를 불렀다. 천사는 지나간 나의 행적들을 보여주었다. 거짓말했던 일, 욕하고 미워했던 일, 울고 웃었던 일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과거 나의 소행이 역겨워 손으로 눈을 가렸다. 천사는 자신을 업신여기고 소망 없이 사는 것이 제일 큰 죄라고 하였다.

“왜요?” 복희가 물었다.

“소망 없이 세상을 사는 것이 나를 망치는 것이고 남을 망치고 곧 창조자까지도 힘들게 하니까. 소망이 없다는 것은 세상에 만족하여 푹 절여 사는 것이니까.”

“그럼, 여기는 어딘가요?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르겠어요.”

“아름다운 찬양소리 들리지?”

“천국이라고요? 나처럼 나쁜 사람도 천국에 있다니요?”

“그래, 너 때문에 회의를 여러 번 했어. 내가 너를 적극 옹호하고 추천했어.”

“왜요? 내가 잘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렇지만 너는 항상 꿈을 꾸었어. 꿈이 있다는 말은 세상의 부정한 것을 정의롭게 만들고 싶다는 뜻이고 남에게도 꿈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니까.”

“꿈이 없다면, 정말 세상이 살기 어렵잖아요. 저는 행실은 부족했어도 항상 살기 위하여 꿈을 꾸었어요.”

“그 꿈의 내용이 남을 위한 소망도 되었다면, 소망은 그분이 네게 주는 선물이니까.”


누가 나를 운반하는 것 같았다.

“환자분 눈 떠보세요. 수술은 잘되었고 여기는 회복실입니다.”

‘아니야, 여기는 천국이야. 회복실이 아니라고’ 나는 속으로 외치며 발을 동동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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