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도덕군자보다 호기심
아침은 바쁘다. 중학교 2학년 작은 시동생이 제일 먼저 학교에 간다. 다음에 딸이 유치원에 가고, 아들은 유아원에 간다. 큰 시동생은 대학생이라 늦게 일어난다. 밤늦게 술 마시고 가끔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힘들게도 하지만, 시누이들이 나에 대하여 불평을 하면 남편보다 먼저 나서서 내 입장이 되어 말을 해준다. 남편이라는 작자는 내 편은커녕 골치 아픈 일에 나 몰라라 모르쇠 하고 있다. 내가 불평하거나 억울한 일을 호소하면 대책도 없이 무조건 참으라고만 한다. 시동생이 나가면 설거지와 빨래와 청소하고 드디어 주부에게는 잠깐의 짬이 생긴다.
미스 노의 딸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만일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녀가 우리 가족의 주민등록을 처리해 주지 않는다면, 내 주민등록에 오점이 생길 것이고 시댁 식구들에게도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쓸데없는 염려 때문에 딸의 앞날에 어둠을 줘서는 안 된다. 염려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딸을 내 자식으로 등록하는 행위에 대하여 우리 언니는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소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 딸에게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20세기에 법 때문에 학교를 못 간다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선한 모험을 택한 것이다. 안일무사주의, 적당주의 그러한 체제에 반항하고 싶었다. 교육으로 한 생명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부모, 사회, 국가의 의무이다. 역지사지! 그래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자. 마음은 주민등록 살리기에 확실히 기울어졌다. 소파에 앉아 잠시 생각에 젖었다.
시누이 셋, 시동생 둘, 시어머니까지 모두 여섯 명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가 뭔데 그런 결정을 하느냐? 밥도 제때 못해주면서 그 여자 일에는 왜 열성이냐? 언제 왔는지 시어머니도 네가 우리 집 망칠 사람이라고 하며 오지랖 좀 그만 떨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섯이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며 살림이나 잘해보라고 큰소리를 쳤다. 아이고, 시집을 괜히 왔나 보다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럼 나더러 어떡하라고요?” 하며 벌떡 일어나 처녀 때 배운 태권도로 앞차기 뒤차기를 하며 다운시켰다. 손을 털고 일어나 보니 꿈이었다.
현실이 아니고 꿈이라서 참 다행이었다. 시댁 시구들이 모를 텐데 어떻게 알았지? 꿈이니까 알았나 보다. 어쩜 그렇게 꿈이 사실 같았을까? 까다로운 중·2 시동생을 위하여 아침에 빨아 놓은 교복도 남편 와이셔츠와 함께 다림질하였다. 빨래를 개는 동안 해는 기울어지고 남편이 일찍 퇴근했다. 미스 노의 이야기는 서로 말하지 않았다. 시동생들이 들을 수도 있어 조심해야 했다. 저녁 먹고, 말하기 좋아하는 남편이 설거지를 끝내는 나를 자리에 불러 앉히더니 친한 친구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 L의 이야기야. 어느 날 술 한 잔 하자면서 L이 찾아왔어. 여의도에 같이 갔었지. L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힘들다고 했어. 시어머니와 며느리, 고부간 문제에 L은 시달리고 있었어. 고집 센 어머니에 논리적인 마누라, 아내와 어머니하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하고 살 거라고 하며 시골에서 이삿짐을 가지고 왔더래. 자식이 본인 하나밖에 없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에 부인이 이혼하자고 하더래. 화가 나서 어머니도 아내도 다 나가라고 하고, 나를 찾아왔어.”
“잠깐 내가 예측할게. 여의도에 있는 미스 노의 동료를 어떻게 했지? 그곳에는 여자들이 많이 있으니까.”
“맞아, 요약하면 그런 이야기지.”
“L도 역시 똑같은 도둑놈이네. 고부 문제는 결혼하면 누구나 한 번씩 겪게 되는 괴로운 결혼통과의례야. 그럴 때마다 모든 남자들이 바람을 피운다면 가정은 다 파괴되게? 사회는 삐꺽하고 나라는 어떻게 되겠어?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더니.”
“그게 무슨 말인데?”
“다 남 탓만 하는 거야. 잘못은 자신이 해놓고 남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이지.”
나는 화가 나서 남편에게 행동 잘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남편도 삐딱하게 반응했다.
“보통 남편들은 조건 되면 다 바람피우는 거야. 못 피는 것이 바보지.”
“아, 이제 속마음을 털어놓았네. 그렇게 생각해서 바람을 피웠구나. 아빠들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자라겠어? 생각은 언젠가는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인데.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 가치기준이 없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기준이 없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야. 기준이 없다는 것은 아무 때나 내 이익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니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모르니까 제 이익대로 하는 거지.”
“왜 내 멋대로 한다고 다 악한 것인가?”
“사람은 원래 악한 존재이니까, 성선설보다 성악설이지. 내가 악하다고 생각할 때 그나마 나를 반성할 수 있어. 그런데 실컷 잘못해놓고 잘한 것이라니 어불성설이잖아?”
“그래 다 내가 잘못이다. 이제 물 한 잔 더 마시고 나머지 친구에 대하여 이야기할게.”
“더 이상 들을 필요 없어. 막내 도련님 내일 아침 일찍 도시락 싸야 되니까 일찍 자야 돼.”
“아냐, 이제 의친이 나오는데. 내 말 잘 들어봐. 의친은 의로운 친구라는 뜻이지. 의친의 이야기는 당신이 꼭 들어야 해. 그래야 당신이 내 친구를 깔보거나 무시할 수 없어.”
“그런 이야기들은 속만 터지고 시간만 아깝다. 안 들을 거야.”
“당신 꿈이 소설가라며, 다양한 남자의 소리를 들어봐야지. 도덕군자처럼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화가 났지만 내 안의 호기심 때문에 못 이기는 척하고 들어보기로 했다.
“자, 제2장 의친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어떻게 모든 욕망과 유혹을 뿌리치고 우리들의 영웅이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허랑방탕하지는 않았네. 그럼 의친의 환경이 좋았을까?”
“전혀, 그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난봉꾼이었고 술 마시고 와서 늘 어머니를 때리고 팼대. 어느 땐 형과 자신이 함께 말렸지만 아버지 힘을 당하지 못하고 셋이 같이 맞았대. 언젠가는 엄마와 함께 도망가다가 잡혀 죽도록 맞았고, 형과 자신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자고 울면서 맹세했대.”
“맹세하면서 닮는다는 말도 있는데.”
“맞아, 그 형이 결혼하더니만 아버지를 슬슬 닮아 가더래. 자신도 그럴 수가 있을 거 같아서, 그렇지 않으려고 결혼할 때 아내한테 서약서를 써 주었대.”
“뭐라고 썼는데?”
“우리 집안에 남자는 술을 마시고 아내를 폭행하는 이력이 있는데, 내가 만일 당신한테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나의 전 재산을 가질 수 있고 항시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다,라는 내용으로 썼나 봐.”
“양심적인 친구네.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겠네.”
“그렇지. 우리 셋 중에 제일 행복할 걸, 참 우리 부부는 빼야지.”
“L은 왜 의친을 닮지 않고 당신을 닮았을까?”
“내가 그렇게 속물인가?”
“당신은 교만 덩어리야. 언젠가는 멸망이지. 사람은 악의 유혹에 먼저 호기심이 가기 때문에 손을 내밀고 결국은 망치는 거야. 당신이 없었다면 유혹도 없었을 게지.”
“세상말로 바람 못 피우는 것이 바보야. 남자들한테 다 물어봐, 환경과 능력이 되면 바람피우고 싶다고. 한 번 실수는 누구나 있을 수 있는 거야.”
“김수환 추기경, 법정스님, 한경직 목사님 모두 바보였겠네.”
“아, 그런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고.”
남편이 언성을 높였다.
“그래, 집에서 싸우지 말고, 옆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한 판 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