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온 Mar 13. 2024

절호의 기회

며칠 전 저녁이었다. 

내가 속한 공동체 모임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나 자매가 말했다. 


"요즘 내 친구들이 공황이나 우울 같은 일로 

정신과 치료를 많이 받아요. 

승진 안 하려고 마음먹은 애들인데 

학교에서 부장 같은 건 맡아서 할 나이이고 

어쩔 수 없이 맡았는데 스트페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그래서 휴직하려는 친구도 있고. 많이 공허한가 봐요." 


안나 자매는 나와 같은 초등교사다. 

늘 씩씩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그녀는 일찍부터 승진하는데 관심이 많았고, 

곧 그리 될 것 같다. 

그가 관리자가 되면 어떨까 잠시 생각해 보는 사이 

마음이 아프다는 그녀의 친구들에게 내 관심이 옮겨갔다. 


나보다 7년쯤 아래니까. 

지금 4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 

교육경력은 20년이 넘었을 테다. 

요즘 서로 부장을 맡지 않으려는 분위기 때문에, 

승진 점수에 관심이 없어도 나이의 무게감 때문에, 

혹은 교장, 교감과의 관계 때문에, 

부장을 맡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결혼을 했다면 가정에서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 고등학생쯤 되었을 테다. 그리고,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느낄 테다. 그리고, 

 부모님은 조금씩 더 노인이 되어 가고...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마음이 아플 고비가 맞네. 

음, 나의 그 맘 때는 어땠더라? 

불과 얼마 전 나도 겪었는데 

마치 레테의 강을 건넌 것처럼 까마득하게만 다가왔다. 

그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완전 다른 존재인 것처럼. 


나도 그때쯤 그 고비를 맞았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멈춰 섰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20대부터 아니 10대부터 풀액셀을 밟아 

앞으로 직진만 하던 차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짙은 안개가 감싸 주변이  전혀 분간되지 않는 상황. 

 앞으도도, 옆으로도, 하물며 뒤로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어디론가 빨리 가기는 가야 할 것 같아서 시동을 끄지 못하고 

공회전만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주변 사람들은 

이제껏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들 자기 갈 길 잘 가고 있는 느낌. 

딱 그랬다. 


지속적으로 우울하고, 

별 것 아닌 일에도 짜증이 났다. 

특히 예전에 그냥 묻고 지나갔던 일들이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새록새록 생각났다. 

행복했던 일, 즐거웠던 일, 

감사했던 일들도 분명 많았을 텐데,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억울했던 일, 속상했던 일, 화났던 일, 

서운했던 일만 켜켜이 쌓여갔다. 

그런 일들만 마음에 쌓이는데 

밤 잠을 잘 잘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 일은 더 생생해졌다.) 


잠 못 드는 밤이 이어지고, 

마음에 막막함. 공허함. 외로움, 

그리고 야속함이 턱 밑까지 찼을 때 

나는 잘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웠다. 

한밤중에 나는 몇 시간 동안 

신혼 때부터 근 20년의 기간 동안 

있었던 온갖 일을 꺼내 화를 냈다. 

남편은 별 말없이 눈만 끔뻑거리며

 어안이 벙벙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밤이 3일째 이어지자 

내가 정상이 아니구나, 자각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지내던  두 분의 수녀님께 

지금 내 상태를 이야기했다. 

두 분 모두 내게 자각하고 살 길을 찾아 

여기저기 전화할 정도면 괜찮다고 

회복될 거라 안심시켜 주시며 각자 처방을 주셨다. 

한 분은 꼭 병원에 가보라고 하셨고, 

한 분은 그것과 더불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떠오르는 생각들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말고, 

낙서처럼 무조건 써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흘려보내라 하셨다. 


'갱년기 우울증'


내가 받은 진단은 그랬다. 


월경을 하고 있더라도 호르몬 양은 줄어드니 

그에 의한 영향으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 염려 마라, 


병원에 간 첫날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 후 병원을 다니면서 꽤 오래 치료했다. 

콩나물시루에 콩나물이 자라듯이, 

나는 언제 괜찮아졌는지 모르게 

그 암흑 같은 터널을 빠져나왔다. 


당시에는 죽을 만큼 괴로웠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마음먹은 대로 하면 되잖아 라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무기력감이 온몸을 감쌌다.

처음 아파본 마음은 내 온 존재를 뒤흔들었다. 

걸핏하면 화가 나고, 또 눈물이 나고, 억울해지고, 속상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선생님과 수업 컨설팅을 하면서

 어느 순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구나'


내 마음이 마치 유리구슬 같았다. 

조심하지 않으면 순간의 충격으로도 쉽게 금이 갈 수 있는. 

그렇게 생각하니 이전의 내가 어땠든, 

지금의 나를 내가 보살펴야 했다. 

마음이 약해진 나를, 

예전만큼 일을 못 쳐내는 나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나를, 

신경질만 나는 나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래야 한다, 이러는 것이 좋다는 생각들은 멀리 던져버렸다. 


한동안 휴직했다. 

그러면서 병원을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떠오르는 상념들을 

낙서하듯 써서 흘려보냈다. 

모래놀이 상담도 했다. 

그리고 마음에 좋다는 차, 

마음에 좋다는 음식(주로 채소였다)을 먹었다. 

주로 햇빛 속에서 많이 걸었다. 

요가도 배웠다. 

마음을 비우며 시간을 채워나갔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꽉꽉 채우며 살았는지 

잘 비워지지 않았지만, 

비우는 시간으로 삶을 채웠다.

 비우는 시간이 내 삶을 점점 채워가자 

어느새 내 마음은 비워져 

울림 좋은 메아리가 머무는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울림 좋은 내 마음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조금씩 일상의 일로 내 시간을 채워갔다.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이제 회복된 거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니 회복은 아니고... 그냥 어떤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아."


"그랬구나"

이어 친구는 다른 데로 화제를 돌렸다. 


거기에 더 말을 잇진 않았지만, 

나는 덧붙일 말이 있었다. 

'그런데 그 터널은 마술상자처럼 들어갔다가 나올 때 

다른 사람이 되는 터널인 것 같아. '


내가 딱 그랬다. 

내 마음에 떠오르는 찌꺼기들을 

걷어내고 걷어내고 걷어내니 

맨 아래 진짜가 보였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 정도여야 하지 않을까, 저 정도가 좋지 않을까 등등  

내가 가졌던 인생에 대한 기준들, 

바람들을 꺼내놓고 보니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들 원하는 것, 

혹은 다른 이들이 내게 기대했던 것이었다. 

별반 내세울 것 없는 나를 가만히 보며 생각했다. 


'왜 내세울 것이 있어야 하지?'

내것은 따로 있었다. 


내가 휴직한다고 동료들에게 인사할 때, 

후배가 내게 물었다. 

"휴직하면 뭐 하고 싶으세요?"

".... 청소.  집청소를 깨끗하게 하고 싶어요." 


질문했던 사람의 눈동자가 커진 것으로 봐선 

내 대답이 너무 뜬금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따뜻한 오전 햇살이 집안 구석구석 먼지를 가감 없이 비출 때 

나는 햇살의 도움을 받아 말끔하게 털어내고, 

물걸레로 반질반질하게 닦고 싶었다. 

그렇게 깨끗해진 내 공간에서 

향기 좋은 차를 한 잔 하며 머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공간을 정화하면서 

나를 정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의 욕망이 내 것인 양 

덕지덕지 붙어 무거워진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정말 내가 그래야 하는 걸까, 아닐까를 생각하며 

찌꺼기를 분리수거하고, 

이런저런 일로 생긴 흠집과 때를 지우고, 

투명하고 가볍게 하기. 

그래서 그 마음 따라 의심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긴 터널을 통과할 마지막즈음 

나는 내 마음속 깊숙이 있었던 

진짜 마음을 가까스로 찾았던 것 같다.  

바로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성장하고 싶다. "


지금보다 조금 더 편견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 만물과 

조심스럽게 어울리고 싶다. 

내가 옹달샘이라면 

지금보다 

조금 더 깊어지고, 조금 더 맑아져서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한 모금 시원한 물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한 참을 몇 년 전 그때로 돌아가

 내 기억을 더듬다 보니, 

안나 자매가 내릴 때가 되었다. 

그녀는 힘이 넘치는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자동차 문을 닫았다. 

나는 친구를 걱정하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다만 인사만 되돌렸다. 

우리 집 쪽으로 핸들을 꺾으며 생각했다. 


다음에 만나면 

'걱정하지 마세요, 자매님. 

그 친구들은 지금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거예요.'

라고 말해줘야지. 

작가의 이전글 학교에서 따뜻하게 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