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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Apr 01. 2024

Thank you

"저기... 수석님, 여기 쓰시라고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1층 교장실에서 분명 '아늑하고 좋은 곳'을 마련해 뒀다고 들었는데 무슨 소리지? 

 내 옆에 있는 교무부장을 다시 보았다. 

교감이 출장이어서 수석실을 안내한 교무부장은 내 시선을 받아내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눈길을 주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글로벌 문화 체험실'

원어민 교사와 보결을 담당하는 진로 담당교사와 함께 쓰는 사무실이었다. 

왼쪽 구석 창가자리 빈 책상에 가방을 올려두자 뽀얀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사무실을 둘러보는데 맥이 탁 풀렸다. 


수석교사로 근무하면서 처음이었다. 

그동안 늘 혼자서 사무실을 썼다. 

수업 컨설팅과 개인적인 상담이 주로 이루어지는 수석교사 업무 성격에 따라

 독립적인 공간에서 근무하는 것이 내게는 당연했다. 

당황스러웠지만, 며칠 동안 조용히 상황을 파악했다. 

혹시 학교에 공간이 부족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결국 내린 결론은 관리자들의 마음의 문제였다. 

새로운 직급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혹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딱딱한 마음, 그 문제였다. 


내 앞에는 선택지가 놓였다.

관련 공문을 찾아들고 관리자들과 담판을 짓거나 아니면 그냥 있거나. 

즉 그들을 고치거나 내가 고치거나 


교감에게만 한 번 이야기를 했다. 

교장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지만, 

말하는 순간, 쇠귀에 경 읽기, 느낌이 왔다. 

아, 교장실에 직접 가서 따져야 하나? 


그러다 시간이 흘렀다. 

아니, 마음이 정리하지 못한 채로 시간을 뭉갰다. 

새 학교라 새로 적응할 일들이 많았다.  

당시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적응하는 데만 신경을 써도 집에 오면 녹초가 되었기에 

한 학기가 훌쩍 지나갔다. 

문득문득 관리자들의 딱딱한 마음을 느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에 짜증내기엔 또 가만 보면 내 형편이 나쁘지 않았다. 

아침마다 출근할 수 있는 학교, 

방해받지 않고 근무할 수 있는 내 자리, 

내가 관리하지 않아도 수업할 수 있는 교실, 

수업 컨설팅할 때만 좀 불편했는데 그때는 해당 교사의 교실로 찾아가면 되었다. 


요즘 말로 정신승리하면서 한해를 그렇게 살았다. 

어쩌면 딱딱한 마음을 피했는지도, 아예 상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부딪히면 내 마음이 상처 입거나 그들 마음에 상처 줄 것 같았고, 그게 싫었다. 


대부분 상황을 외면하다 때때로 속을 끓이다 어정쩡한 상태로 마무리하던 한 해 끝자락, 

나는 한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운전하다 우연히 듣게 된 법문은 내 머리를 내리쳤다. 


다른 말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사자성어 같은 네 글자는 또렷이 기억한다. 


수처작주 隨處作主 

어느 곳에 가든지 주인으로 존재하라


순간, 아, 나는 지금 종이구나. 

관리자들이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행복했을 테고, 학교에 더 헌신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나, 

그러지 않아 속상해하며  삐친 종이 었다. 


 '너거(너희)가 언제 내 말 들어줬나, 나는 알 바 없으니 너거 마음대로 해라' 

이게 딱 내 마음이었다. 


워낙 불교에 문외한이라 난생처음 들었던 이 말은, 나를 깊이 바라보게 했다. 

부끄러웠다.    

밴댕이 속알딱지처럼 좁디좁은 내 속이 훤히 보였다. 

누군가 한 행위에 끄달려서 일 년을 하루같이 불행하게 지내는 어리석은 사람, 바로 나였다. 


생각해 보니 여러 사람과 같이 사무실을 쓰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여러 선생님들을 자연스럽게 만나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글로벌 문화 체험실'이라는 이름부터 정체가 모호한 사무실은 

아마 영어 교과 전담 교사들이 썼던 곳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자료제작실처럼 여러 가지 기자재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성능 좋은 칼라 프린터기도 공유 설치되어 있어, 덕분에 많은 선생님들이 프린터 하러 왔다. 

학교를 옮긴 첫 해는 늘 어색하게 지냈는데 그해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아이들에 대해서 학교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함께 고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원어민과 나누는 손짓 발짓을 겸한 영어 대화도 재미있었다. 


이제까지 혼자 수석실을 썼었던 덕분에, 그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고집했구나. 

내 고집이 눈을 가려 많은 좋은 것들을 간과하고 있었구나. 


그러다 이듬해, 딱딱한 마음의 관리자들이 학교를 떠났다. 

새로운 관리자들이 와서 내게 수석실을 따로 마련해 줄까 물었다. 


아니오 


그즈음 나는 수처작주隨處作主를 연습을 하기로 작정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거기서 주인으로 살아보기


덕분에 일상에서 몇 가지를 확 바꿀 수 있었다. 

30년 만에 다시 영어를 공부했다. 

가만 보니 원어민도 하루 종일 옆에 있겠다 최고의 환경이었다. 

 '언젠가 외국어를 공부해야지' 하며 굴러다녔던 마음을 잡아 그 언젠가가 지금 여기로 만들었다. 

또, 교실에서 소외되어 있는 한글 미해득 학생에 대해서도 정규 수업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까워만 했는데 한글 튼튼 교실 프로그램에도 참여해 가르쳤다. 

늘 바랬지만, 미루기만 했던 새벽 기도와 글쓰기도 아침 루틴에 집어넣어 

덕분에 소위 '미라클 모닝'이라는 것도 체험했다. 


'얼마나 지속할까? 며칠 하다 말겠지.' 

했던 초반의 의심이 무색하게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이 일상은 계속된다. 

일상에서의 작은 성공들은, 그다음의 성공을 부른다. 

다음에는 무뚝뚝한 내 성격을 고쳐볼 요량으로,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상냥하게 말 건네기를 실천해 볼까 생각 중이다.


또 한 해가 지난 지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던 딱딱한 마음의 그들을 떠올린다.

말도 섞고 싶지 않을 만큼 삐쳐있었지만, 이제는 한 마디 해 주고 싶다.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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