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반에 들어서서 수업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정완이가 왼손 검지 손가락이 아프다면서
보건실에 가겠다고 다가왔다.
눈을 들어 예의 그 손가락을 보니
육안으로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디 부딪혔는지,
혹은 무엇을 하다 삐끗했는지 물었으나
아무 일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좀 있어보고
계속 아프면 이야기하라며 들여보냈다.
그러자 정완이 짝 민규가 한 마디 한다.
"너는 왜 맨날 공부시간만 아픈데?"
"... 맨날 아니거든..."
정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하며
아프다던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꼭 감싸 쥔다.
얼굴이 낯설어서 누군가 유심히 보다가
퍼뜩 떠올랐다.
아, 걔구나,
3월 초에 이 반에 전학 왔다는 애.
그러지 않아도 담임이 프린터 하러 왔다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가 쓰는 사무실에 성능 좋은
칼라 프린터기가 공유 설치 되어 있다.)
2학년인데 글자를 하나도 모르고,
공부 시간마다 아프다며 보건실에 가려고 한다고.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지금도 걱정이지만,
3학년 되어 교과가 세분화되어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면
학습부진으로 확 드러날 것 같다던 애,
정완이었다.
다행히 그날 내가 한 수업은
글자를 잘 몰라도 아예 따라갈 수 없는 내용은 아니었다.
자신의 손과 발을 살펴보고,
따라 그려서 그린 손자욱, 발자국을 바닥에 붙인 후,
모양 따라 네 발로 몸을 움직여 보는 것이었다.
손의 특징과 발의 특징을 살펴보고,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나는 정완이가 어떤지 자꾸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신경 쓰였다.
그때였다.
맨 뒤쪽 자리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났다.
가을이었다.
좀 전에 가을이는 양말을 벗기 부끄럽다면서 책상에 엎드렸다.
가을이는 몇 번의 내 질문과 회유에도 고개 숙인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면 교실에서 함께 공부할 수 없다고,
교실을 나가 담임 선생님과 둘이서만 공부해야 한다고,
나는 가을이에게 다가가 단호하게 말했었다.
그러자 울음이 터진 것이다.
가을이의 통곡 소리에 누구보다도 먼저
정완이가 달려왔다.
"괜찮아, 이렇게 벗으면 돼. 쉬워."
자신의 맨발을 들어 보며
발가락 앞쪽에 양말이 있는 양 당기는 시늉을 했다.
정완이는 아마 가을이가 양말 벗는 방법을 몰라서
운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가을이는 그런 정완이를 본 척 만 척
점 점 더 크게 목놓아 울었다.
가을이는 작년에도 비슷하게 행동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가을이가 넘어서야 하는 걸림돌을 알게 되었다.
가율이에 대해선 다음에 글로 정리하려 한다.)
그래서 오늘도 일관성을 갖고 가을이를 대했다.
담임교사에게 연락한 후,
울음을 그치고 말로 할 수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복도에서 들리던 가을이의 통곡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가을이를 힐끗 보고, 나를 힐끗 보며
눈치 보던 아이들은 마음이 놓인 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거나,
낄낄거리며 냄새를 맡거나
짝과 발크기를 재보거나 했다.
시끌시끌한 아이들에게 살펴본 발의 특징을
질문하며 답한 내용을 칠판에 정리했다.
그때 정완이가 손을 들어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확 잡아채.
마법의 멘트를 날렸다.
'맞아! 손가락은 구부러지는데
발가락은 꼼지락거리기만 하죠?
오 대단한 발견인데?
정완이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가자마자
정완이의 작은 가슴이 자부심으로 빠르게 차오르고,
눈동자에 반짝 불이 켜지는 게 느껴졌다.
음, 그다음부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정완이는 정말 최선을 다해 활동에 참여했다.
저학년 아이들은 모든 것을
정말 순수하게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
그 작은 가슴에 자부심이 가득 차고
눈동자에 불이 켜지는 순간,
세상 모든 지혜를 다 빨아들일 듯한 순간,
물론 길지는 않지만,
교사가 느끼기에 찰나에 불과하지만,
그 순간이 분명 있다.
짝과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은 양쪽 발을 그리고,
이긴 사람은 양쪽 손을 그리기로 했다.
정완이는 져서 양 발을 그렸는데 삐뚤삐뚤했지만,
발톱도 그려 넣고, 발가락 위에 주름과 털까지 나타내었다.
아프다던 왼쪽 검지 손가락도 곧잘 움직였다.
드디어 완성한 손자국과 발자국을
넓은 예절실 바닥에 붙이고,
손자국에 발자국을 따라 네 발로 기어보았다.
마지막에는 양쪽 끝에서 각각 동시에 출발한 아이들이
중간에서 만나 가위바위보를 하고 자기 자리로 뛰어들어갔다.
세상에!
그 별 거 아닐 것 같은 활동에
아이들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각 팀의 주자를 응원하는 소리가
월드컵 경기 때 보다 더 대단했다.
덕분에 내 귀는 먹먹했고,
내 손목의 와치는 소음이 너무 심하다고
계속 경고를 줬다.
정완이는 몸놀림이 느렸다.
손을 짚고, 발을 짚고, 다시 손을 짚는데 주춤거렸다.
원숭이처럼 폴짝폴짝 움직이는 대다수의 남자아이들 틈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그러나
앙다문 입술,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
거친 호흡에 커진 콧구멍,
발그레한 두 뺨을 한 정완이는
그래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끝까지
그 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마지막 즈음 몸에 힘이 다 빠졌는지
아이들은 바닥에 눕거나
벽에 기대 길게 늘어져 앉았다.
나는 활동을 마치며 새롭게 깨닫거나,
느낀 점이 있는 사람은
내 옆으로 나와서 발표하라고 했다.
정완이를 비롯한 몇몇이 손을 들고 뛰어나왔다.
주로 활발하게 움직였던 남자아이들이었다.
돌아가며 소감을 말했다.
손의 특징과 발의 특징에 대해 알게 된 점 위주로,
활동을 하면서 손과 발의 소중함과
쓰임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다 정완이 차례가 되었다.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너무 순수하게 기쁨으로 빛나는얼굴을 보자,
나는 짓궂게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니? 정완아,
너 아픈 손가락은 어떻게 되었어?
손가락이 아프면 같이 공부 못하는 건데.
에고, 선생님이 깜빡 잊어버렸네.
지금도 아프니? 지금이라도 보건실에 가 있을까?"
화들짝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눈을 크게 뜨고,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정완이의 모습에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뒤돌아서서 입술을 깨물고,
흔들리는 어깨를 진정시야 했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는 길,
나는 줄을 맞춰 앞 선 아이를 따라가는
정완이 옆에서 같이 걸었다.
정완이는 내가 다가가자 살그머니 내 손을 잡았다.
아프다던 왼 손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보며
지금은 괜찮은지를 물은 후,
괜찮다는 정완이에게 말했다.
"다음에도 아플 거야?"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이라니.
미리 알고 아플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나.
그러나 그 순간 정완이는 현명하게 대답했다.
"절대 안 아플 거예요."
아, 이 녀석을 어떻게 하지?
며칠 전 기초학력부장이 내게
올해도 한글 튼튼 교실 수업을 좀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방과 후에 1년에 60시간 정도
2~3학년 한글 미해득 학생 한 명을 맡아서
집중적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전체 아이들이 한글을 알고,
함께 수업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한글 미해득 학생만 배려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한글 해득에 결정적인 시기인
이때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것이다.
작년에 했을 때 보람은 있었지만,
출장이 잦을 때(수석교사는 생각보다 출장이 잦다.)는
시간 맞추기에 여간 애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올해는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고사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정완이를 보자
또 마음이 약해진다.
아, 이 녀석을 어떻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