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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Apr 08. 2024

김지후에게 주인공이란?

주제에 맞게 수업을 풀어낼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아마 교사마다 다를 것이다. 

내 경우는 수업 첫머리를  어떻게 시작할까 꽤 오랫동안 고심하는 편이다. 

사진이나, 동시, 그림책, 동영상, 이야기, 수수께끼, 다섯 고개 등 아이들이 수업 주제를 짐작할 수 있는 

동시에 흥미를 갖고 집중할 수 있는 소재를 주로 찾는다. 

아무래도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에게 익숙하고, 교육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매체는 그림책이다. 

그렇다보니 수업 첫머리에 함께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수업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그림책이 다 성공적이지는 않다. 



그 주 수업에는 요시타케 신스케라는 일본 작가가 쓴  '이게 정말 나일까?'라는 그림책을 선택했다. 

김지후라는 아이가 숙제를 대신해 줄 로봇을 사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기발한 설정인데 

만화 같은 그림체도 귀엽고, 내용도 아이들이 공감할만했다. 

특히 엄마가 잔소리할 때 김지후가 '아 등 간지러'하며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는 장면을 읽어줄 때 

아이들은 작게 소곤거렸다. 

"킥킥, 나도 저런 적 있는데.", "나도" 

이제까지 시도해 본 그림책 중에서 몇 번째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아이들은 이 책을 재미있어했다. 

과히 폭발적이었다. 



1반, 2반 수업을 끝낸 화요일이었다. 

교장실 앞을 우다다다 달려 돌봄 교실에 가려던 몇 명의 저학년 남자아이들이 내 눈에 딱 걸렸다. 

우리 학교는 급식실에서 나와 교장실과 행정실을 통과해 돌봄 교실이 있고,

 뒤쪽 아파트로 통하는 정문이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1층 본관 넓은 복도는 저학년 점심시간 이후엔 거의 아우토반이 되기 일쑤였다. 

소음에 견디다 못한 선생님들이 '조용히 합시다'라는 패널을 세워두었지만,  

가끔은 무용했다. 그날이 딱 그랬다. 


3명을 불러 세우고 보니 2학년이었다. 

2명은 오늘 수업한 반 아이들이었고, 한 명은 7반 김지후였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두 명이 자기들만 아는 '김지후 로봇 이야기'를 속닥거려 

김지후가 이야기를 해 달라고 따라붙었고, 두 명은 도망가는 형국이었다. 

아마 김지후는 자기를 놀리는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나머지 친구들은 무척 억울해했지만, 2학년으로서는 오늘'이게 정말 나일까'라는 책에서 본 

김지후 로봇이 나온 이야기가 재미있었다는 느낌만 있을 뿐, 

한 번 들은 그림책 전체 맥락이나 줄거리를 기억해 설명해 줄 능력이 없었다. 


나는 안전을 이유로 엄근진 선생님 모드로 전환해 주의를 주려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아이들이 수업내용을 방과 후까지 기억하다니...." 

아이들은 언제나 현재에 살기 때문에 정말 잘 잊어버린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말갛게 깜빡이는 눈동자들을 무수히 겪어오면서  나는 그 사실을 진즉에 깨달았다. 

'오, 기특한데?' 

혼자 감격해 마음이 약해진 나는, 주려던 주의 수위를 아주 약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덧붙였다. 

"아, 7반 수업은 금요일이어서 아직 지후가 모르겠구나. 그날은 네가 주인공이야."

내 말에, 줄거리를 말할 수 없었기에 놀렸다고 억울한 오해를 받은 두 명은  

지후에게 "맞아, 맞아, 주인공이 너야."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지후는 높고 큰 목소리로 대꾸한 후, 셋은 어깨동무를 하고 돌봄 교실로 갔다. 


아 그런데 내가 뒤늦게 코로나에 걸렸다. 

처음으로 앓은 코로나는 강력했고, 꼬박 일주일을 출근하지 못했다. 

억지로 몸을 추슬러 7반 수업을 하게 된 때는 

그 화요일부터 일주일이 지나고도 또 며칠 지난 금요일이었다. 

당연히 그때 수업해야 했던 내용은 담임 선생님이 대신했고,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주제를 풀어냈을 터였다.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새로운 주제 '성장흐름표를 만들어 보고, 자신의 성장 과정 알기'를 수업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김지후가 유독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김지후에 대해 쓰고 그리는 걸 귀찮아해서 수업에서 하는 것은 뭐든 대충 하는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소위 '머리는 있지만, 공부하기 싫어하는, 쓰는 것을 너무 귀찮아하는 남자아이'의 전형이라고 할까?

그래서 의외였다.


지후는 내게 까만 콩을 떠올리게 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작고 깡마른 몸집, 유난히 까맣고 반들반들한 눈동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찌나 동작이 빠르고 반응에 민첩한 지, 

교사 책상 앞자리에 앉아서도 뒷 문쪽 아이가 물통을 쏟으면 제일 먼저 달려갔다. 

콩 알이 톡톡 튀듯 뭐든 제일 먼저였다. 

자기 것을 하고 있으면서도 레이다는 교실 전체에 켜둔 마치 음... 어떨 때는 미어캣이라는 동물 같았다. 


거기다 지후는 높고 큰 목소리를 가지고 말도 잘했다. 

교실에 벌이 들어왔다거나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거나 

누구누구가 싸우거나 새로운 일이 생기면 

교실을 가득 차게 생중계해서 반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버렸다. 

아이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수업에 공을 들이는 나와는 

1학년 때부터 수업시간에 기싸움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과제가 주어지고 5분이 되지 않아 달려 나와서 "다 했어요." 하는 지후의 결과물은

 내가 보기에 너무 대충이었다. 

이 부분은 이렇게 고치고, 저 부분은 저렇게 하고 몇 번이나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과정을 거치면 

나중에는 오히려 처음에 묵묵히 한 아이들보다 늦었다. 


그랬던 지후인데 

금요일 수업에서는 얼마나 수업 내용에 집중하고 과정에 열심히 참여하던지 놀라웠다. 

수업 마지막, 자신이 만든 성장흐름표를 칠판에 가지런히 붙여두고, 

친구들의 것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갤러리 워킹 활동을 할 때였다. 


지후가 나를 힐끔힐끔 보더니 질문했다. 

"그 내가 주인공이라는 거, 언제 나와요?"

수업자료를 챙겨 교실을 나갈 준비로 바빴던 나는 '수업이 다 끝났는데 무슨 말이지?' 알아듣지 못했다. 

"응? 그게 뭔데?"

"아, 그때 돌봄실 갈 때 말했잖아요.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요."


아하, 그 그림책! 생각났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순간 미안했다. 

그래서 지난번에 하기로 했는데  선생님이 아파서 못했다, 다음에 꼭 읽어줄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손가락 걸어 약속했다. 

지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가 축 처져 자리에 들어갔다. 


칠판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만든 지후의 성장흐름표가 앞에서 10번째쯤 붙여져 있었다. 

매번 시간 내에 과제를 끝내지 못하던 지후였는데 오늘은 10번째로 완성했다는 뜻이다. 

오늘 수업 내내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을 지후의 마음이 느껴졌다. 


거의 열흘의 시간이었다. 

그 열흘이 무색하게 지후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순간을 떠올리고 기대했겠지. 


수업을 마무리하고, 교실을 나서는데 문득, 지후가 하던 행동들이 한 줄로 꿰어졌다. 

선생님과 친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내게는 수업을 방해하는 것이었지만 

지후에게는 주인공이 되는 방법이었구나. 

아, 수업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었구나. 


지난 1년 내내 지후와 했던 기싸움이 떠올랐다. 

튀어 오르려는 지후와 그것을 지적하던 나와의 끊임없는 실랑이. 

오히려 튀어 오르는 것을 수업에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

 구체적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다른 경험을 했을 테고, 지후와도 다른 관계를 맺고 있었겠지. 


1년 더 지후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야.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내 뒤통수에 대고 누가 인사한다. 

지후다. 

복도까지 나와 큰소리로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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