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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Apr 24. 2024

맞나? 그래가 우야노.

현승이는 입학할 때부터 또래보다 키가 컸다.

줄을 서면 다른 아이들이 현승이의 귀만큼 왔다. 

큰 키에 마른 몸, 짜증이 묻어있는 표정, 조금 삐딱하게 낀 안경과 그 너머에 있는 시선까지. 

맨 뒤에 앉은 현승이는 한눈에 봐도 까탈스러운 아이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쉬는 시간마다 현승이는 늘 민원을 제기했다. 

친구들이 자기를 때린다, 노는데 방해했다, 밀었다, 욕을 했다, 등등등. 

그런데 민원 내용을 가만 들어보면, 얼마나 구성지고, 그럴듯한 지 

현승이를 괴롭힌 아이를 당장 혼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 반의 정의가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올해 2학년인 현승이는 지난주  쉬는 시간에 블록을 가지고 지훈이와 놀았다. 

현승이는 1학년때부터 여러 아이들과 놀기보다 단짝인 지훈이와 둘이서 자주 놀았다. 

갑자기 현승이가 세상 억울한 얼굴로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 왔다. 

"선생님, 윤수가 블록을 발로 찼어요. 저는 지훈이와 터널을 만들고 있었을 뿐인데, 

윤수가 오더니 우리 블록을 발로 차서 못쓰게 만들었어요.  

마지막 블록만 꽂으면 완성되는 거였거든요. 너무 속상해요."

방해꾼으로 지목된 윤수는 블록이 있는 곳에 멍하게 서 있다가 

내가 현승이와 함께 바라보자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놀란다. 

그러고는 그 큰 눈에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고, 벌게진 눈을 꿈벅거린다. 



나는 다시 현승이를 보고 말한다. 

"맞나? 그래가 우야노?" 

현승이의 표정이 떨떠름하다. 

아마 그는 내가 당장 윤수를 불러 시시비비를 가리고, 윤수를 혼내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마음이 많이 속상하고, 짜증스러워요. 윤수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알았다고, 나중에 윤수를 불러 이야기해 보겠다고 하며 네가 윤수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며 보낸다. 

현승이는 윤수에게 뭐라고 한 후, 다시 지훈이와 블록을 가지고 논다. 



시종일관 장승처럼 그 자리에 서서 현승이와 나를 바라보던 윤수는, 점점 더 표정이 어두워진다. 

나는 살짝 다가가 윤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내가 묻자, 그렁그렁했던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엄마가 베트남 사람인 윤수는 또래보다 말이 유창하지 않다. 

"... (현승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안 놀아줘요. 저리 가라 했어요. "

떠듬떠듬 이야기하는 윤수의 말을 재구성해보니, 윤수도 블록놀이를 하고 싶었는데 현승이가 안 끼워줬고, 윤수가 옆에 서서 구경하는데 저리 가라며 현승이가 윤수 다리를 밀면서 옥신각신하다 블록이 망가졌다. 

나는 윤수에게 친구들이 못 놀게 버티고 서있지 말고, 놀이에 끼워주지 않아 속상하다고 말하는 연습을 여러 번 시킨다. 

윤수는 소매부리로 얼굴을 쓱쓱 문지르고, 나를 따라 말한다. 



나는 다시 현승이를 부른다.

함께 놀고 싶은 친구의 마음을 알아줘야 하며, 

같이 놀 수 없다면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한 참 이야기 나눈다. 

쉬는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가 버린다. 

시계를 힐끗 본 후, 한숨 쉬며 현승이가 묻는다. 

"선생님, 잘 못한 건 윤수인데 왜 제가 혼나야 해요?" 

그러면 나는 말한다. 

"이건 혼나는 게 아니야. 다정한 태도를 배우는 거야."

현승이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들어간다.

이어 블록을 정리하는 지훈이를 돕는다. 



1, 2학년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면(대체로 3학년까지) 정말 많은 민원이 발생한다.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다. 

말로 자신을 대변하고 친구를 옹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되어간다는 증거이며, 

따라서 정말 멋진 일이다. 



그러나 교사의 입장에서는 매일 반복되는 민원에 귀에 피가 날 지경이다. 

무엇보다 민원마다 시시비비를 가려줘야 할 것 같아 쉬는 시간이 오히려 더 괴롭다. 

한 때 나도 그랬다. 

학교에 와서 하루 종일 시시비비만 가리는 '판관 포청천'이 된 것 같았다. 

그러면서 자기 입장에서만 말하는 아이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찌푸린 얼굴로 다가오면 '또 뭐야?'라는 생각과 함께 짜증이 솟구쳤다. 



그 생각이 바뀐 건 어느 날 읽은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인류학자 브라이언 헤어 바네사 우즈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2020)에서 

인간이 현재 어느 종보다 지구상에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호기심이 있었고, 놀이를 통해 공감하고 협력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라고.


 

그의 의견에서 나는, 인간에게 있어 타인과 (되도록 다정하게)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살아가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것을 배워야 한다는 교육적 통찰을 함의한다고 생각한다. 

책장을 덮고 잠시 이 생각에 머물렀다. 

이어지는 생각과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어쩌면 아이들의 폭발적인 민원은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향상되는 과정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고 가 아니다.

서툴지만 서로 자기 입장에서 최대한 이야기해 보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으면서 오해하다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 의사소통 능력이 자라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의사소통 능력이 발휘되고 향상되는 순간은 어쩌면 국어 시간만이 아니라 

쉬는 시간, 분쟁이 난무할 때일지도 모른다. 

그때 교실에는 여유 있게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물론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에서 그 누군가는 대부분 교사일 테지만. 



그 후로 나는 대부분의 민원에 대해 끝까지 눈으로 호응하며 듣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말 무해한 말. 그러나 정말 강력한 말을 한다. 

"맞나? 그래가 우야노?"

(때때로 나는 내가 경상도 네이티브인 것이 좋다. 

경상도 말에는 이렇게 함축적으로 마음을 담아 호응할 수 있는 말들이 많다.)

대부분 아이들은 신나게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하다가 좀 전의 현승이처럼 머쓱해한다. 



이 말로 인해 공은 아이에게 넘어간다. 

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이는 고민한다. 

어떤 아이들은 몰라요라는 말로 공을 다시 내게 넘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자기가 옳다고 내게 더 피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자기 마음이 어땠는지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사안의 위험도에 따라 내가 나서는 경우도 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아이들 중에 중재자 역할을 해서 자기들끼리 해결한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같이 논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 안에서 많은 말들이 오고 간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직접 나서기보다 분쟁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목소리가 들리는,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서 지켜본다. 



현승이는 말로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는 정말 좋은 재주를 지녔다. 

그러나 그도 다른 사람의 입장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윤수는 버티고 서서 친구 놀이를 방해하지 말고, 행동보다는 말로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아이들이 어울려 사는 교실은 늘 삶의 현장이다. 

이들이 여기서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다름을 다정하게 대하는 태도를 배운다면 

이 세상이 조금 더 좋아지지 않을까?



다음 쉬는 시간, 현승이는 다시 블록을 가져온다. 

그 옆에 지훈이와 함께 윤수가 서있다. 

나와 공중에서 시선이 부딪친 현승이는, 지훈이와 윤수에게 말한다.

"이중 터널을 만들 거니까 블록을 이리 가져와서 쌓자"

블록을 쌓는 윤수의 표정이 해처럼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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