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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눌노리 18

- 책을 버리며

by 전종호


돌아보면 많이 떠돌았다. 금강가에 붙어살다가 군대를 마치고 돌아와 대학을 졸업하고 어찌어찌 임진강가에 와서 눌러살았다. 세어보니 고향에서 살던 어린 시절보다 더 오랜 20여 년 이상의 시간을 남의 동네 여기 임진강가에 와서 산 것이다. 시인 이정록이 내 시집을 읽고 “아니 형이 무슨 김삿갓이우? 온 나라를 떠돌며 시를 쓰고?” 한 것처럼, 뭐 이룬 것도 없이 정처 없는 삶이었다.

아이들도 다 둥지를 떠나 각자 제 삶을 찾아 떠난 마당에 퇴직 후에는 잠깐씩 가보았으나 좋았던 기억이 남았던, 제주, 무주, 통영, 구례, 속초, 이 다섯 곳을 물과 산을 교대로 겪으면 살아 보기로 했다. 히말라야가 보이는 포카라도 리스트에 끼웠으나 아내가 동의하지 않아 빼고 이 다섯 곳을 2년씩 또는 3년씩 돌면 운 좋으면 건강수명을 다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은퇴 설계라면 설계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버리는 일이었다. 쓰던 전자제품이나 덩치 큰 소파도 버리고 양복이나 옷가지도 정리하는 것. 버리는데 제일 큰 문젯거리는 책이었다. 이사 다닐 때마다 부지런히 버리고, 읽을 만한 책들은 주위의 선생님들께 선물로 주고, 교육과 관련된 학술서나 논문이나 저널 등은 학교 도서관에 주면서 짐을 주렸다.

책을 버릴 때 제일 먼저 한 것은 대학 다닐 때부터 끌고 다니던 창비 영인본을 비롯하여 잡지를 버리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사회과학 도서를 버리는 것이었다. 버리면서 보니 얼굴도 모르는 마르크스와 참 오랫동안 살았다. 세 번째는 종교 서적이었다. 그렇게 그들과 오래 살았으나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당신의 진면목을 보여 주지 않았다. 50년 이상 다녔던 교회도 ‘차별반대법’ 반대 설교만 하는 목사를 보면서 끊게 됨으로써 목사와 신학자들이 쓴 책도 폐기 목록에 추가되었다. 사실 읽지도 않고 무게와 부피만 차지하는 책으로 아내가 1순위로 버리라고 강요하는 책은 영어 원서들이었다. 박사과정 할 때 들여다 놓았던 책들, 이제는 거의 들여다보지 않는 책들이 폐기 1순위임에도 아직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슨 심사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지방 유랑의 계획을 포기하고 어쩌다 들어가게 살 눌노리의 삶을 위해서도 책을 버리는 것은 당장 시행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필요한 책도 아니려니와 작게 지어질 집에 공간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이제 머리가 아니라 몸을 많이 움직이고 써야 할 삶이 기다리기 있기 때문이다. 사실 버릴 것은 ‘책’이라는 물질보다도 같잖은 먹물 의식이나, 평생 ‘제대로 알지 못하고, 조금 아는 것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하고 입만 나불거리고 산 한없이 가벼운 삶'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버리며


책을 버린다

십수 년 안고 끌고 다니던 책들을 버린다

한때 맑은 영혼의 기운으로 이끌던

또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이나 굴레가 되었던 것들

이제 버리기로 했다

어떤 것들은 골수骨髓가 되고

어떤 것들은 전사戰士의 투지가 되고

어떤 것들은 한겨울 밤새 잠을 미루고

몰아쉬던 거친 숨소리가 되었던 것들

전사의 마음으로 타오르던 책을 버린다

관점을 버림으로써 투쟁도 지운다

참으로 오랫동안 피곤했다

다음으로 밥이 되었던 책을 버린다

견고한 뿌리가 되어 나의 밥이 되어 주었던

수많은 사상과 이론과 주장과 삶의 문법들

이것들이 내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삶의 등불이 되었을까

삶에 위로와 지혜를 주던 책도 버린다

울컥하고 힘들 때마다 등을 토닥여 주던

성현의 말씀과 시인의 노래들

나를 내려놓기 전에 버려야 한다

이제 가장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숨을 고르고 내 노래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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