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커 체험 후 이어폰 잃어버린 자
두 번째 오디움 방문 결심
올해 3월, 나는 오디움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다. 오디움이란, 서울시 서초구에 있는 세계 최초의 오디오 박물관의 명칭이다. 도슨트님의 설명에 맞추어 투박한 디자인의 옛날 스피커를 구경하며 중간 중간 음악을 감상하는 시스템이 좋았었다. 오디움의 광활한 3층짜리 공간에 어찌 보면 다소 휑하게 진열되어 있는, '거대하다'는 말을 붙여야 할 스피커들. 요즘 구하기도 힘든 아주 고가의 것들이 오디움에는 몇 개씩 존재한다고 한다.
오디움은 사이트를 통해 사전 예약 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목, 금, 토 3일만 관람이 가능하며 시간도 정해져 있다. 자율 관람 불가능. 하지만 가장 큰 메리트는 이런 역사적인 스피커들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편해도, 예약이 잘 되지 않아도 당연 납득이 간다.
나는 귀가 예민하지 않고, 오히려 막귀에 가까운 사람이다. 지직거리는 이어폰도 뭐... 괴롭긴 하지만 들으라면 들을 수는 있다. 따라서 나같은 사람은 이 곳을 한 번 다녀온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90분 투어의 막바지에서 다음에 한번 더 와야겠다고 느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르티에 오르골. 100년이 넘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지난 3월에 방문했을 때 "모르티에 오르골은 현재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조만간 수리에 들어갈 것" 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수리 예정일이 4월이었다. 그럼 5월이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10시 타임에만 틀어주는데, 시간당 예약 가능한 사람은 25명 뿐이라 더 오기가 생겼다. '반드시 이 모르티에 오르골의 소리를 들어야겠다'는 욕심을 품게 되었다. 저 커다란 것이 어떻게 작동할까, 어떤 소리를 낼까 궁금했다.
기적적으로 취소표 예약에 성공했다 - 내가 바라는 10시 딱 이 타이밍에. 고로 5월 9일 10시에 나는 오디움을 가야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고 나는 수면 부족 인간이었습니다
5월 9일.
수면시간 1시간 10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갤럭시 워치는 가끔 조용히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숙면한 것으로 체크하곤 한다 - 어차피 알려준 대로 정직하게 잤다고 가정해도 1시간 40여분 잠을 잤다. 저 날, 새벽 5시 넘어서 핸드폰을 닫아 두고 한숨을 쉬며 눈을 감은 것이 떠오른다. 원래 불면증이 있긴 하지만, 저 날은 잠을 못 이룰 개인적인 이유가 있기는 했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데도 정신이 말짱하니 초조하기도 했다. 몸이 힘들 텐데, 오디움 가려면 8시에는 집에서 나가야 하는데.
다행히 기적적으로 잠에 들었고, 강박적으로 6시 40분 경에 눈이 떠졌다.
다소 멍한 상태에서 편의점에 들러 생명수와 같은 포카리를 한 병 끌어안고 오디움으로 향했다.
두 달 전에 본 건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외관은 찍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 보자마자 길다란 파이프에 압도 되었던 오디움의 외관.
일본 유명 건축가 쿠마켄고는 일본의 산토리 미술관, 도쿄 국립 경기장 등을 설계한 분이다. 그 쿠마켄고의 포트폴리오(?)에 들어가 있는 건물이 바로 이 오디움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꿈꾸었던 쿠마켄고는 알루미늄 파이프를 이용하여 빛과 그림자가 숲에 스며드는 느낌을 주어 도심 속 자연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나는 물론 이 의도를 완벽히 파악하지는 못하였으나, 예술적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굉장히 아름다운 구도로 지어졌음이 분명했다.
오디움 내부로 들어간 후 카톡 알림 안에 들어 있는 QR 코드를 찍고 티켓을 받았다. 그리고 큰 가방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증을 맡긴 후 락커 키를 하나 받았다.
오디움에서는 큰 가방을 맨 채로 전시를 볼 수가 없다. 가방에 설마 골동품 스피커 등을 집어 넣을 사람이 있겠냐만, 왠지 여기에는 관람을 편하게 해 주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중간 중간 앉아서 음악을 듣는 장소들이 있는데 거기서 매번 바스락 거리면서 가방을 들쳐맸다 다리 위에 올렸다 하는 것은 은근 피로한 일임에 분명하다. 다른 이들의 음악 감상에 방해도 되고 말이다.
락커에 가방을 넣어 두고 나의 생명수 포카리와도 잠시 작별한다.
정음:소리의 여정 티켓은 오디움의 건물 디자인을 본뜬 알루미늄 파이프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오디움 관람 인원은 최대 25명이라는 극소수로 구성된다. 여기 오신 분들은 타이밍에 성공하신 분이고, 적당히 즐기려는 분위기로 오신 분들은 없다. 진지한 분위기. 평일 오전 시간에 오디오 전시회를 위해 시간을 내신 분들인 만큼 열정적이다.
다시 즐겨 보는 2번째 소리의 여정
지난 번에 뵈었던 낯이 익은 도슨트님께서 투어를 진행해 주셨다. 확실히 지난 번에 한 번 들었기 때문에 사진을 많이 찍지는 않았고, 설명과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1930 ~ 1940년대의 스피커 제품들.
가운데에 선 채 처음으로 스피커를 청음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미국식과 독일식 두 개의 스피커를 비교해서 틀어 주시는데 비슷한 듯 하만 분명 다른 것이 느껴진다.
유성 영화 시대가 열리면서 함께 시작된 극장용 스피커의 시대.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곳에 진열 되는 물건인 만큼, 외관은 투박한 편이다. 난 이런 것도 좋아하지만.
중간에 스튜디오 모니터도 청음할 수 있었는데, 1940년대의 오디오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풍부한 소리가 들려서 살짝 심취해 음악을 들었다. 약간 뒤에서 따라가다 보니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다 차 버려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정음:소리의 여정 투어는 3층에서 시작되어 한 층씩 아래로 이동하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다.
2층으로 내려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축음기 섹션. 살짝 맹맹한 사운드가 은근히 매력적인 축음기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지만 굉장히 큰 소리가 난다. 이것은 혼(Horn)의 위엄...
앞에 놓인 원통은 실린더. 음악이 새겨진 통이다. 실린더에 홈을 파며 녹음을 해 두고 축음기를 작동하면, 실린더가 돌아가며 바늘이 홈을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그에 따른 진동을 재생하여 연주가 되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이 축음기 섹션에는 옛날 5센트 동전을 넣어야만 작동되는 커다란 주크박스도 하나 있다. 만약 소리를 듣고 싶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가서 5센트 동전을 하나 주워 와야만 한다.
살짝 공포심 마저도 들었던 2층의 혼 스피커. 웨스턴일렉트릭에서 1930년대에 만든 스피커라고 한다. 사이즈를 보면 대강 짐작이 가겠지만 이것은 수천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사용되는 규모이다. 사람만한 스피커 3대가 달려 있는 이 공간에서는 그야말로 소리에 압도될 수 밖에 없다.
1층으로 내려오면 카메라 섹션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로망, 라이카가 한두개도 아니고 그야말로 널부러져(?) 아니 표현이 좀 이상한데. 암튼 어마무시하게 많다. 스파이 요원들이 쓰던 아주아주 작은 미니미 사이즈의 카메라들도 곳곳에 놓여져 있다. 나는 여기서 30분도 더 있을 수 있지만, 이 곳은 오디움이므로 카메라는 아주 잠시 훑어 지나가는 구역이다. 에르메스 에디션 카메라도 하나 있었는데 예쁜 컬러가 눈길을 끌었다.
1층의 마지막 구역인 오르골 섹션. 오르골에 대한 로망을 이 곳의 빈티지한 오르골을 보며 살짝 풀 수 있었다. (언젠가는 삿포로에 있는 오르골당에 가 보고 싶다.)
결국 들을 수 없었던 Th. MORTIER
드디어 최종 장소에 도착했다, 미러포닉1, M1이 기다리고 있는 이 공간.
하지만, 이번에도 모르티에 오르골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아직 수리를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 6월에는 수리가 가능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라는 마음이 들면서도 '오늘은 왠지 헛걸음했다.'라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는 피로감이 화르륵 몰려 오는 것을 느꼈다. 잠을 1시간 조금 넘게 자고 온 여파가 너무 컸다.
미러포닉1이 있는 이 공간에서 4곡의 음악을 연달아 듣는 것으로 소리의 여정은 끝이 난다. 잠시 로비의 둥근 의자에 앉아 포카리로 전해질을 채운 후, 집으로 가던 길에 종각역에서 내렸다.
이 날은 비가 와서 몸이 떨리기에 몸에 단백질을 넣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종각역 어느 건물 지하에 있는 10,900원짜리 런치 샤브인데, 고기의 양이 꽤 많았기에 나중에 한 번 더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같은 건물에 있는 내 최애 쌀국수 가게에 가려던 건데, 간판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 좋은 샤브샤브집을 알게 되었다, 럭키.
이어폰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 날, 어디에선가 이어폰을 잃어버렸다. 어디에서인지조차도 모르겠다. 오디움과 음식점에 전화를 해 보았는데 분실물 중에 이어폰은 없었다고 하였다. 아, 버스 안에서 잃어 버렸나 보다.
구입한 지 1년을 못 채운 내 이어폰. 속이 쓰려 왔다. 게다가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챙겨야 하는 내가, 잃어버린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고? 이어폰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다음날 오후, 외출 준비를 하면서 알아차렸다. 당연히 집에 있는 줄 알고 몇십 분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혹시나 싶어 블루투스 연결을 보니 해제되어 있었다. 내게는 이 일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강박증도 피곤 앞에서는 별 수 없구나 - 새로 데리고 온 이 녀석마저 잃어 버리면 내 멘탈은 완전히 탈탈 털려버릴 것만 같다.
그래도 좋게 생각 해야지
예약하기 힘든 오디움을 2번 다녀왔다.
미러포닉1으로 총 8곡을 들은 셈이다.
스피커가 내심 아쉬웠던 오픈핏에어를 보내고, 최신형 오픈핏2를 데리고 왔다.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스피커에 둘러싸여 90분을 보내고 175,000원에 산 이어폰을 잃어 버렸다.
좋게 생각해야지.
그리고 나는 이 날 이후로 잠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으니, 교훈도 얻었고.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