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신발이 이어준 우정
신발을 신은 인어공주와 신발을 벗어던진 소녀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는 건 분명 사람이었다. 바닷가에 산책을 나온 소녀는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갔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였다. 우선 숨 쉬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가까이서 얼굴을 들여다보니 자기랑 또래처럼 보였다. 소녀는 여자애가 걱정되어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으로 몸을 감싸주고 그녀를 깨웠다.
“이봐요, 이봐요, 정신 차려요.”
바로 일어나지 못하는 거 보니 기절한 모양이다. 소녀는 난처해졌고 괜히 인적이 드문 이곳으로 산책을 나온 자신을 잠깐 탓했다. 사실 소녀는 짝짝이 다리를 가졌다. 왼쪽 다리가 성장을 못했는데,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 고칠 수가 없다고 했다. 다리를 심하게 절지 않았지만 짝짝이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만큼은 힘들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소녀의 부모는 아이에게 신발을 맞춰줄 수 없었다. 소녀에게는 오래 전에 작은 발에 맞춰 산 딱 한 켤레의 신발만이 있었다. 오른발을 신발에 우겨넣어야 했고, 걸을 때마다 발이 터질 듯 아팠지만 참고 걸어야 했다. 하지만 바닷가 모래사장에서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을 수 있어서 가끔 이곳으로 산책을 나왔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큰일을 만난 것이다. 제발 이 여자애가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따가운 햇살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던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소녀 주변에서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잃었던 여자애가 슬며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소녀는 얼른 그녀에게 말을 건다.
“괜찮아요? 정신 좀 들어요?”
여자애는 깜짝 놀라면서 얼른 일어나더니 주변을 바라본다. 시선이 자신의 다리에 닿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놀란 표정은 점점 환희로 바뀐다. 자신의 몸에 다리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다리를 연신 만지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가 걱정돼서 소녀는 또 묻는다.
“다리가 아파요? 왜 그래요?”
얼마 후 소녀는 알게 된다. 여자애는 말을 할 수 없는 아이라는 걸.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말하는 걸 포기해 버렸다. 소녀는 손가락으로 모래바닥에 글자를 썼다.
“이렇게 글을 써 봐요. 집이 어디에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하지만 여자애는 글을 쓸 줄 몰랐다. 사실 여자애는 사람이 아닌 인어공주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열다섯 살 생일 때 물위로 올라와 인간이 탄 배를 처음 구경하다가 왕자를 보게 됐다. 처음 본 잘생긴 남자에게 호기심이 들어 계속 지켜보다가 갑자기 닥친 폭풍에 그 배가 난파를 당했을 때 바다에 빠진 왕자를 온 힘을 다해 구해줬었다. 해변에 누운 왕자가 깨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바다로 돌아왔지만 그의 곁에 있어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인간이 되기로 결심하고 마녀에게 목소리를 팔고 인간의 다리를 얻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앞에 있는 소녀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왕자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인어공주는 힘을 내보기로 했다.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한발 내딛자 발에서 칼날에 베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비명 소리조차 새어나오지도 않았다. 고통에 순간 비틀거리는 그녀를 소녀가 옆에서 부축해줬다. 꾹 참고 한발 더 내딛어 본다. 너무 아파서 이를 악 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부축하던 소녀는 재빨리 눈치 챘다. 저 말 못하는 여자애는 걸을 때마다 발이 아프다는 것을. 그건 소녀가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을 때마다 느끼는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애는 지금 걸을 때마다 발이 아파서 발을 움추렸다 폈다 하고 있었다. 그 고통을 알기에 소녀는 선뜻 그녀에게 자기의 신발을 내어 주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발이 아픈가 보네요. 이 신발 신고 걸어볼래요?”
인어공주는 처음으로 신발이라는 것을 신어봤다. 신발 속에 조심스럽게 발을 넣고 한 걸음 떼어 보았다. 두툼한 밑창 덕분에 발이 아프지 않았다. 인어공주는 너무 기뻐 소녀를 향해 크게 미소 지었다. 소녀도 그녀가 더 이상 발이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같이 미소 지었다.
소녀는 인어공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쓰러졌는데 갈 곳도 없어 보이고 아무래도 어른들에게 상의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어공주에게 종이와 펜을 주며 무언가를 써보라고 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대신에 한 남자의 모습을 그렸다. 소녀의 엄마가 말했다.
“이 그림 속 남자를 찾는 것 같구나.”
그러자 소녀가 말했다.
제가 이 여자애에게 글자를 가르쳐 줄게요.
그럼 이 남자가 누군지 글로 쓸 수 있을 거예요.
소녀의 부모는 인어공주가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날부터 소녀는 인어공주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인어공주는 소녀 덕분에 조금씩 인간 세계를 배워나갔고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인어공주는 소녀가 제 또래와 좀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됐다. 자신은 고향에서 항상 언니들과 친구들과 함께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신나게 놀았는데 소녀는 항상 집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게 유일한 놀이인 듯 보였다. 그래서 소녀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쓰기로 했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서 쓴 말은 ‘나가서 놀자’였다. 여자애가 드디어 글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깨닫자 소녀는 무척 기뻤다. 하지만 여자애의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망설이다가 이렇게 적었다.
‘나는 짝짝이 다리를 가졌어.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면 발이 아파. 그래서 집에 있고 싶어.’
인어공주가 대답했다.
‘그런 신발을 벗고 걸으면 되잖아.’
소녀는 인어공주의 대답을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신발을 벗으면 발이 안 아플 텐데 말이야.’
그래서 인어공주는 신발을 신고 소녀는 신발을 벗고 도시 곳곳을 신나게 돌아다녔다. 도시는 축제 분위기였다. 내일 있을 왕자의 결혼식 준비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성문을 지날 때 마침 왕자의 약혼녀인 이웃나라 공주가 도착해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소녀와 인어공주는 필담을 나누었다.
“저 예쁜 여자는 누구야?”
“이웃나라 공주야.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해줬는데 왕자가 그 사실에 감동해서 그녀를 신부로 맞이하기로 했대”
성문이 열리고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왕자의 행렬이 나왔다. 멀리서 왕자의 얼굴을 본 순간, 인어공주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가족을 떠나 마녀에게 목소리를 팔고 다리를 얻어 여기까지 오게 만든, 그녀의 사랑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왕자를 향해 달려갔다. 호위병들이 인어공주를 저지하는 소란이 일어나자 왕자가 다가왔다. 인어공주는 얼른 판서를 했다. ‘나에요, 바다에 빠진 당신을 구한 사람.’
왕자는 놀란 눈으로 인어공주를 바라봤다. 그리고 기억해 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거센 파도가 그를 덮치려고 한 순간, ’이제 정말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든 순간, 온 몸으로 파도를 막아준 그 얼굴이. 바로 그녀였다. 왕자는 왈칵 그녀를 끌어안았다. “드디어 찾았군요, 내 사랑.”
그렇게 인어공주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돌봐준 소녀를 궁으로 불러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오늘도 두 소녀는 바닷가 산책을 즐긴다. 소녀는 더 이상 발이 아프지 않다. 여왕이 된 인어공주가 나라에서 실력이 가장 좋은 구두 장인을 불러 평생 소녀에게 맞춤 신발을 만들어 주기로 했지만, 가끔 이렇게 신발을 벗고 걷는 일이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둘은 해변을 걷다가 수면이 얕은 물에 발을 담그고 서로 물을 뿌리며 놀기 시작한다. 파도의 물거품이 그녀들의 다리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공중으로 튄 물방물이 햇살을 받아 무지개 색으로 빛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