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읽기 7
16세기 초에서 17세기까지
빛과 색채
16세기 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에 비해 르네상스 양식을 늦게 받아들였지만, 이후 르네상스 양식에 새로운 경쾌함과 따뜻함을 더해 근대의 어떤 다른 건축양식보다 밀접한 방식으로 헬레니즘 시대를 연상케 하였다. 이러한 양식의 가장 특징적인 건물 중 하나는 산마르코 성당의 도서관이다.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 야코포 산소비노는 자신의 양식을 베네치아의 밝은 빛에 어울리도록 완벽하게 적응시켰다. 피렌체의 화가들이 원근법이나 구도로 통일된 구성을 만들고 채색 하는 방식으로 색채를 부가적으로 간주했지만 베네지아 화가들은 색채에 대한 접근법이 달랐다. 다시 말해 중부 이탈리아의 고전기 화가들이 화면구성과 균형 잡힌 구도로 그림의 조화를 이룩했다면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채와 빛을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화가 조르조네는 이러한 영역에서 가장 혁명적인 업적을 이룩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 위대한 발견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어 베네치아 화가 중 가장 유명한 티치아노를 통해 이룩되었다. 티치아노는 미켈란젤로에 필적한 화가로 그의 뛰어난 솜씨는 전통적인 구도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색채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오래된 규칙을 과감히 뒤엎은 그의 대담성에 놀랐을 것이다. 무엇보다 티치아노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그의 인물 표현은 영원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이 생생한 느낌을 주어 권력자들이 그의 초상화를 그려 받는 영광을 위해 경쟁하게 만들었다. 한편 북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며 혁신적인 사고로 평가되었던 화가는 안토니오 알레그리였다. 그는 빛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능숙한 명암법으로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 후대의 여러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지식의 확산
16세기 초: 독일과 네덜란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대한 업적과 창안들은 알프스 북쪽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그들이 그러한 새로운 양식을 채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새로운 양식의 요구를 피상적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풍부한 장식적 모티프에 약간의 고전적인 형식을 가미하는 등 피상적으로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화가와 조각가의 경우는 달랐다. 이는 알프레드 뒤러의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이 새로운 원칙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뒤러는 헝가리에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소묘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뒤러는 목판화 공방에서 수습기간을 마친 뒤 남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남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기법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였다. 뒤러는 고딕 미술의 업적을 익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화와 동판화 그리고 목판화로 성경의 이야기를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끈기 있고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모사하였다. 뒤러는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였는데 라파엘로와 같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움의 ‘어떤 이념’이 아닌 확실한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인체를 과도하게 왜곡시켰다. 그러나 뒤러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남유럽 미술을 배우기 위해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의 나이 50에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제왕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예술적인 기량에 있어서 뒤러와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독일 화가는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이다.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만 그것을 활용했다. 그에게 있어서 미술은 오직 그림으로 교회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뤼네발트의 그림은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되어 온 미술의 법칙들을 거부하고 인물의 중요성에 따라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뒤러 세대에 세 번째로 유명한 독일의 미술가는 루카스 크라나흐로 그는 처음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였다. 크라나흐는 만년에 이르러 작센의 궁정화가가 되었는데 주로 마틴 루터와의 친분에 힘입어 명성을 얻었다. 16세기 초, 네덜란드 화가들은 옛날 방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는 새로운 양식을 따르는 미술가들이 아닌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같이 남유럽의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기를 거부한 미술가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미술가들이 자신이 본 것을 재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마련해 주었다.
미술의 위기
16세기 후반: 유럽
1500년경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등은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젊은 미술가들은 미켈란젤로가 연구했던 것을 익히고 모방하려고 하였고, 그 수법만을 모방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 시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당시 젊은 미술가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실 많은 미술가들 은 거장의 기법을 의심하고 그들을 능가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독창적인 시도를 한 건축가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안드레아 팔라디오였으며 미술가는 피렌체의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인 벤베누토 첼리니였다. 첼리니에게 있어서 미술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존경받는 공방의 주인이 아닌 군주나 추기경들이 그의 호의를 구하고자 하는 미술의 ‘대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같이 정통적인 기법을 피하고 싶어 한 화가 중에 파르미자니노도 있었는데 이러한 미술가들은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가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현대미술도 이들처럼 인습적인 아름다움과 다른 효과를 이룩하고자 하는 욕망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의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베네치아 출신의 틴토레토였다. 그는 앞선 대가들이 감동을 주기 위해 성경을 묘사했던 것과 달리 성경의 이야기를 엄숙하고 긴장감 있으며 극적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틴토레토는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16세기 화가 중에서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사람은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 엘 그레코였다. 그는 한동안 베네치아에 머무르다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했다. 엘 그레코는 매너리즘을 받아들였지만 이러한 방법을 새로운 목적에 사용했다. 그는 매너리즘의 기교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활용했다. 엘 그레코의 미술이 재발견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 미술가들이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게 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남유럽의 미술가들이 새롭고 놀라운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로 고민할 때 독일,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나라의 미술가들은 회화의 존속을 논의할 정도고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이를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가장 큰 수입원이었던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화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이러한 위기의 영향은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홀바인은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부딪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의 추천서를 받아 스위스를 떠나 영국에 갔다. 영국에 도착한 홀바인은 처음으로 토머스 모어 경 집안의 가족들을 담을 대형 초상화를 준비하였다. 결국 그는 영국에 정착하기로 하였고 헨리 8세로부터 궁정 화가라는 공식 직함을 받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성모상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궁정 화가의 일은 매우 다양했다. 하지만 그의 주된 임무는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홀바인이 떠나자 독일어권의 회화는 놀라울 정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죽자 영국의 미술도 그와 비슷했다.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 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이미 오래전부터 회화가 번창했으며 미술가들은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전문화하였다. 더 이상 제단화나 기타 다른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진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특기를 사줄 수 있는 시장을 발견하려고 애썼고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솜씨를 과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다. 북유럽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개발한 그림은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풍속화였다. 16세기 플랑드르 최대의 풍속화가는 피터 브뢰헬이었다. 그가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안트웨르펜과 브뤼셀에서 살면서 작업했다는 것 외에는 그의 일상에 관해서 알려진 것이 없다. 브뢰헬이 주로 그렸던 그림은 농민들의 일상 장면들이었다. 브뢰헬은 유쾌하지만 결코 단순하다고 볼 수 없는 그림으로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프랑스에서는 미술의 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북유럽 국가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아 프랑스 대부분의 화가들은 새로운 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발전하는 시각 세계
17세기 전반기: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라고 부른다. 양식의 명칭 즉, 고딕양식이나 매너리즘이 처음 쓰일 당시에는 낮추어 평가하거나 조롱하는 의미였던 것처럼 ‘바로크’라는 말도 17세기의 예술경향에 대해 반감이 있었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조롱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었다. 바로크라는 말은 터무니없거나 기괴하다는 의미로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채택한 방법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고전 건축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채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단어였다. 매너리즘에서 벗어난 건축과 회화는 둘 다 유사한 방식으로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했다. 특히 17세기 회화는 미술이 매우 상투적인 방식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미술에 관한 논쟁을 즐겼으며 그러한 논쟁은 미술 세계에서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 그들의 주된 쟁점은 서로 정반대의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두 화가 즉. 안니발레 카라치와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에 관한 것이었다. 이 들 두 화가가 매너리즘의 기교성을 극복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카라치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회복시키고자 했고 카라바조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진실, 즉 자신이 본 그대로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카라바조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카라바조는 관중들과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최초의 화가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비평에 개의치 않고 자기 작업에 열중했다. 카라바조의 자연을 충실하게 모사하려는 ‘자연주의’는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성경의 인물들을 보다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의 빛은 인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카라치와 카라바조는 19세기 유행에서 배제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 다시 진가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당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던 로마 회화에 불어넣은 자극과 영향은 대단했다. 로마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킨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귀도레니라고 볼 수 있다. 볼로냐 출신의 화가 귀도레니는 카라치 파에 입문하였고 한 때 그의 명성은 라파엘로와 비등할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라파엘로를 떠올리기를 원했다. 당시 미술은 미술가들 앞에 놓인 여러 방법 중 어떤 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야만 될 정도로 발전했다. 고전시대에 설정된 기준에 따라 자연을 이상화하는 방식을 공식화한 사람은 카라치와 레니, 그리고 레니의 추종자들이었다. 이것을 어떤 정해진 방법 같은 것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고전 미술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신고전주의적 또는 아카데믹한 방식이라 부른다.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이었고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회고적인 아름다움을 그려 유명해진 화가는 이탈리아로 귀화한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이었다.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카라치의 방식을 그대로 실천한 로랭의 영향은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들 곳에 나타났다.
북유럽 사람으로 카라치나 카라바조 시대의 로마 분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접한 화가는 플랑드르 출신의 페터 파울 루벤스였다. 루벤스는 다채로운 사물의 표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였고 그들의 전통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전개되고 있던 새로운 미술에 경탄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흔들리지 않았다. 1608년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31세 청년으로 이탈리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다. 루벤스에게 그 이전, 어떤 화가도 누리지 못한 명성과 성공을 이루게 만든 것은 천부적 솜씨와 탁월한 재간의 조화에 있었다. 그의 예술은 사치와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고 그것은 왕족들의 권력을 미화하는 데 적합했다. 그 당시는 유럽의 종교적, 사회적 긴장이 대륙전역에 30년 전쟁으로 영국에는 내란으로 절정에 달해 있었다. 한쪽에는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받는 절대군주들과 다른 편에는 대부분이 신교도인 신흥 상업 도시들이 발흥하고 있었으며 네덜란드도 신교와 가톨릭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루벤스는 가톨릭 진영의 화가로서 독자적인 지위에 올라섰다. 루벤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고전적인 이상적 아름다움이 그에게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추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보고 좋아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루벤스의 많은 제자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람은 안토니 반 다이크였다. 그는 사물의 질감과 표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루벤스의 모든 기법을 곧 터득했으나 분위기는 스승과 달랐다. 그는 명성에 의해 밀려드는 주문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조수들에게 맡긴 탓에 초상화에 해독을 끼친 선례를 남겼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 세계를 풍부하게 해주는 귀족적인 품위와 유유자적한 신사적 태도의 이상을 그림 속에 구체화시킨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루벤스는 스페인을 수차례 여행했는데 이때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만났다. 벨라스케스는 그때까지 이탈리아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모방자들의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된 카라바조의 발견과 그의 방식에 커다란 감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자연주의’의 방식을 흡수하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루벤스의 충고로 벨라스케스는 위대한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 로마로 갔다. 그는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제외하고는 펠리페 4세의 궁정에서 존경받는 화가로 지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왕과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벨라스케스는 마술을 부린 것처럼 이들의 초상화를 매혹적인 그림들로 바꾸어 놓았다. 벨라스케스는 사물의 특징적인 인상만을 포착하고 꼭 필요한 것만을 묘사하고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았다. 19세기 파리의 인상주의자들이 과거의 어느 화가들보다 벨라스케스를 존경한 것은 이와 같은 효과 때문이었다. 이제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관찰하며 색채와 빛의 새로운 조화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다. 이는 유럽의 가톨릭 진영의 미술가들이나 신교도의 네덜란드에 살던 미술가들이나 모두 같았으며 이러한 새로운 임무에 그들의 열정을 쏟았다.
자연의 거울
17세기: 네덜란드
유럽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으로 대립하고 있을 때 네덜란드 남부 지역은 가톨릭으로 남아 루벤스는 교회와 군주 또는 왕들의 권력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많은 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부유한 상업도시였던 네덜란드 북쪽 지방 사람들은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대부분 신교를 믿었다. 그들은 남부의 호사스러운 허식을 싫어했고, 도시가 점차 안정된 기반을 확보해 가면서 부가 축적됨에 따라 세계관도 성숙해 갔다. 17세기 네덜란드 시민들은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을 휩쓸었던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교 사회에서 지속될 수 있었던 회화의 영역은 초상화였다. 성공한 상인들은 자신의 모습을 후손에게 남기고 싶어 했고, 시장이나 시의원으로 선출된 사람들은 자신의 직위를 나타내는 표지가 들어있는 초상화를 원했다.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 화가들 중 초상화를 그리는 소질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주문을 받아 그림을 제작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했다. 중세나 르네상스의 대가들과 달리 그들은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나서 구매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 이제 미술가들은 한 사람의 후원자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구매하는 대중을 상대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화가의 수고를 덜어주는 중간상인, 즉 화상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었고 화가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했다. 그래서 유명하지 않은 화가가 명성을 이룰 수 있는 길은 회화의 특수한 장르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16세기 북유럽에서 시작된 전문화의 경향은 17세기에 와서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그림을 흥미 있게 그리기 위해 극적인 시선을 끄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의 한 부분을 그렸을 뿐이며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점을 발견한 최초의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헤이그 출신인 얀 반 호이엔을 들 수 있다. 그는 별다를 특징 없는 자기 고향의 들판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배어있는 풍경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소박한 풍경 속에서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블리헤르나 반 호이엔과 같은 네덜란드 화가들이었다. 네덜란드의 최고 화가는 렘브란트 반 레인을 들 수 있다. 렘브란트는 레오나르도나 뒤러처럼 자신이 관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고 미켈란젤로처럼 존경받는 천재도 아니고 루벤스와 같이 당대의 지도자들과 어울렸던 화가도 아니었지만 젊은 시절 파산의 비애와 노년에 이르기까지 불굴의 의지를 반영한 그의 생애의 기록인 자화상은 그의 독특한 자서전이 되어 그를 거장들 중 누구보다 친숙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렘브란트는 1606년 레이덴에서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얼마 안 가서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포기했다. 25세가 되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눈부신 성공을 했지만 점차 인기가 떨어지고 파산하게 되고 두 번째 아내와 아들의 도움으로 완전한 몰락에서는 겨우 벗어났지만 1669년에 사망했을 당시 그에게 남은 것은 헌 옷 몇 벌과 화구만 남아있었다. 렘브란트는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판단할 권리는 화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그의 초상화에서 실제 인물과 직접 대면하여 그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공감을 구하는 그의 절박함과 외로움 그리고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그가 표현한 인물의 눈은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이 느껴진다. 렘브란트는 뒤러와 마찬가지로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판화가로서도 유명했다. 그가 사용한 기술은 직접 긁어서 파내는 목판화나 동판화가 아니라 부식 동판화인 에칭이었다. 렘브란트는 카라바조의 영향으로 조화와 아름다움보다 진실성과 성실성을 중요시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당시 어떤 화가도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는 유쾌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따르는 많은 화가들도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화가는 브뢰헬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전통의 흐름을 완성시킨 17세기 화가는 얀 반 호이엔의 사위인 얀 스텐이었다. 우리는 흔히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을 얀 스텐의 작품에서 보는 것 같이 유쾌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렘브란트의 정신에 가까운 분위기를 표현한 화가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은 야콥 만 로이스달이었다. 그는 생애의 전반기를 아를렘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북유럽 풍경의 시정을 발견하였다. 네덜란드 미술이 자연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미술에 반영된 자연은 화가의 마음, 즉 그의 취향이나 기분을 반영한다. 네덜란드 회화 중에서 가장 전문화된 분야인 정물화가 흥미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예이다. 정물그림에서 화가들은 그들이 그리고 싶은 물건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배치할 수 있었다. 사소한 말 몇 마디가 아름다운 노래의 가사가 되듯이 사소한 사물들로도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17세기 화가들이 가시적인 세계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모색했던 것은 중요한 주제가 없이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래서 동일한 종류의 주제만을 평생 그린 네덜란드의 전문 화가들은 결국 주제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이러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렘브란트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베르메르 반 델프트였다. 베르메르는 평생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작품 중에는 의미심장하거나 거창한 주제를 다룬 것이 거의 없다. 이렇게 단순하고 가식 없는 그림이 불후의 명작이 된 이유는 질감, 색채 및 형태들을 완벽하게 묘사하는 베르메르의 표현 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최고 걸작들이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바로 부드러움과 정확성을 그의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시킨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