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테크니컬 라이터(Technical Writer, 이하 TW)에게 요구되는 역량을 이야기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조건이 있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이다. 영어로 문서를 작성하는 이상 당연한 요구처럼 들리지만, 이 기준은 오랫동안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전제로 작동해 왔다.
기술 문서의 목적은 분명하다. 사용자가 제품이나 시스템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그럼에도 실제 평가 과정에서는 문서의 구조나 정보 설계보다 영어 표현의 ‘자연스러움’이 먼저 언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움의 기준은 대개 원어민의 언어 감각에 맞춰져 있다.
나 역시 영문 TW로 일하면서 이 간극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은 아니었지만, “더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을 것 같다”는 피드백은 늘 따라붙었다. 문제는 그 표현의 차이를 스스로 검증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내가 작성한 영어 문서를 충분히 확인하려면 네이티브 리뷰어나 전문 에디터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는 개인이 지속적으로 감당하기에는 현실적인 비용이 컸다. 결국 영어는 업무의 도구라기보다, 성과를 제한하는 변수로 작용했다.
이 경험은 한때 나를 TW라는 직무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영어 비중이 낮은 역할도 경험해 보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덜 쓰는 환경에서 더 큰 불편함을 느꼈다. 복잡한 정보를 구조화하고, 독자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일은 여전히 내가 가장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영문 TW로 돌아왔을 때,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환경이었다. AI 기반의 글쓰기 도구가 실질적인 업무 도구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AI는 단순히 문법 오류를 수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문장의 맥락을 고려해 더 자연스러운 표현을 제안하고, 문단의 흐름을 재구성하며,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여러 표현을 동시에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과거라면 사람의 시간을 빌려야 했던 작업들이 이제는 반복 가능하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변화는 TW의 역할을 분명하게 나눈다. 무엇을 설명할지, 어떤 순서로 정보를 배치할지, 독자가 어디에서 막힐지를 판단하는 일은 여전히 작성자의 몫이다. AI는 그 판단을 대신하지 않는다. 다만 표현의 선택지를 넓혀주고, 검증 비용을 낮춘다.
그 결과, TW는 영어 자체에 대한 부담보다 문서의 목적과 구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개인의 심리적 부담을 줄이는 차원을 넘어, 문서 품질 관리 방식 자체를 바꾸는 변화다.
여전히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은 분명한 강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TW의 필수 조건이어야 하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술 문서의 가치는 문학적 완성도가 아니라, 명확성과 재현 가능성, 그리고 사용자의 행동을 돕는 데 있기 때문이다.
AI는 TW의 전문성을 대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문성이 발휘되어야 할 영역, 즉 정보 구조 설계와 맥락 이해, 사용자 관점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점에서 AI는 경쟁자가 아니라 현실적인 협업 도구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원어민급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사실이 곧바로 한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AI의 등장 이후, 영어는 더 이상 넘지 못할 벽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변수로 바뀌었다.
원어민급 영어 실력이 아니라도 괜찮다. 적어도 영문 테크니컬 라이터라는 직무에서는, 이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그리고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분명히 AI에게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