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된다는 건, 레시피를 바꿔야 한다는 것

단호박 크림수프

by 땅콩쉐이크

세상을 20개월쯤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아들은 밥을 잘 먹는 편이다. 응가도 하루에 다섯 번씩 하고. 그런데 얼마 전부터 통 밥을 안 먹는다. 콩밥을 해주면 콩만 골라먹고 밥은 남긴다. 그러니까, 밥은 잘 먹는데 밥을 안 먹는 아이다. 스무 달 인생의 10% 정도는 밥을 안 먹는 아이로 자라는 중이다.


아들의 입맛은 잘 모르겠다. 고기는 잘 안 먹고, 간을 한다고 딱히 더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다. 콩, 파프리카, 무를 좋아한다. 어제는 생마늘도 잘 먹는다는 걸 알게 됐다. 자꾸 달라고 보채서 조금 잘라서 줬는데 (당해봐라 하는 심정이 없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또 달라고 졸랐다. 서둘러 마늘을 치우고는 다 먹어서 없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고구마를 좋아하니 비슷한 뭐 먹일만한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단호박이 떠올랐다. 그런데 호박을 사서 껍질을 깎아내고 씨를 발라내고 또 쓰레기가 나오고 하는 생각을 하니 영 귀찮다. 냉동 단호박을 냉큼 주문했다 (요즘은 온갖 것들을 냉동으로 판다).


원래는 강레오 아저씨가 만든 호박수프를 따라 할 생각이었다. 단호박을 팬에 볶고, '어쩌면 양파'도 볶고, 버터랑, 생크림을 넣고 끓이다가 믹서로 간다. 올리브 오일을 둘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치즈'도 좀 넣었을 거다.


왜 '어쩌면 양파'고, '아마도 치즈'냐면, 내가 유튜브를 건성으로 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호박수프를 볶아서 하는 건 저밖에 못 봤어요'라고 자랑하는 장면, 끓고 있는 수프에 희멀건 걸 넣는 장면만 봤다. 그러니까 사실 나머지는 상상이다. 그래도 그런 계획이 있었다. 볶고, 끓이고, 갈고.


여기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요즘 육아 휴직 중이므로 아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들은 그게 좋은가보다. 요즘은 울 때 '아빠~'하고 울고, 결코 엄마를 찾는 법이 없다. 이건 아이와 함께할 때 나는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엄마가 있더라도. 참고로 요즘 어린이집이 방학이라 우리 아들은 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다. 요컨대 나는 팬에 붙어 뭘 볶을 시간이 없었다.


단호박은 오븐에 굽기로 한다. 단호하게. 사실 올리브 오일을 좀 바르고 구우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그럴 새도 없다. 그래서 그냥 굽는다.


1. 단호박을 올리브유를 두른 팬에 볶는다. (못 볶음)
→1'. 단호박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오븐에 굽는다. (못 바름)
→1". 단호박을 오븐에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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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아들은 밥은 안 먹지만 밥을 잘 먹는다. 배고파하길래 호박을 좀 줬는데, 더 달라고 졸랐다. 조금 로스가 있을 건 생각했지만, 명절에 전 집어먹는 아들마냥 세 그릇이나 먹을 줄은 몰랐지. 호박이 부족해서 한번 더 구웠다.


1. 단호박을 올리브유를 두른 팬에 볶는다. (못 볶음)
→1'. 단호박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오븐에 굽는다. (못 바름)
→1". 단호박을 오븐에 굽는다.
→1"'. 아이에게 단호박을 뺏기고 단호박을 오븐에 '더' 굽는다 x2


사실 생략했지만 양파도 굽고, 감칠맛이 올라오면 좋을 것 같아 마늘도 구웠다. 전부 믹서기에 넣고 우유를 붓고 (아이가 있으므로 생크림은 없지만, 늘 우유는 있는 법이다) 갈았다. 이렇게 강레오 셰프의 레시피를 보고 만든 단호박 크림수프가 탄생했다.


글을 쓰면서 강레오 셰프가 단호박 수프를 만드는 동영상을 끝까지 봤다. 하나도 안 비슷하지만. 상상했던 레시피랑도 안 비슷했지만. 아무튼 강레오 셰프의 비법수프를 만들었다. 참고로 유튜브 제목은 '단호박 수프는 원래 안 달아요'인데 엄청 달다.


'단호박 이미 달죠? 양파 달죠? 구운 마늘 달죠? 수프가 달잖아요'


IMG_20260104_090911.jpg 후추 약간, 파슬리 약간으로 마무리했다


- 원래 레시피: 모름 (Youtube URL: Link)


- 내가 썸네일과 두 컷을 보고 상상한 레시피: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단호박을 볶는다.

단호박이 익기 시작하면 양파를 볶는다.

단호박과 양파에 생크림을 넣고 한 번 끓인다.

믹서에 갈면 완성!


- 실제 레시피:

단호박(~1kg), 양파(1개), 마늘(3알)을 오븐에 굽는다 (170도 25분).

아이에게 호박을 준다. (중요)

그만큼 또 굽는다.

소금/올리브유 약간, 우유는 농도 맞춰서 넣고 믹서에 다 같이 갈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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